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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소녀검성-36화 (36/47)

〈 36화 〉 #035 삥 뜯으면 정답이 나와요(5)

* * *

35.

“일단, 부상으로 준비된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빨리도 가져온다.”

“민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지금 이 악물었니?”

“그럴 리가요…….”

크흡, 하는 영문모를 소리가 들렸지만 그 정도는 너그럽게 무시해주기로 했다.

잠시 후, 안내원은 몇 가지 문서를 정리하여 내 앞으로 가져왔다.

아직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것을 보니, 준비되지 않았었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세 페이지 정도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종이를 멀리하고 눈을 찌푸려 읽으려는 것을 참으며 리스트를 살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페이지에 있는 것들은 별로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교내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식사권이라던가, 하루나 이틀 정도의 외출권, 그리고 지각을 몇 번 정도 허용해 주겠다는 사면권 등.

‘그야말로 학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자질구레한 혜택… 필요 없어.’

증표 하나나 두개 정도 더 모으는 것이야 쉬운 일이니, 그에 따른 보상도 가벼운 것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세 번째 페이지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꽤 흥미로운 것들이 있었다.

자잘하게 여러 분류로 나누어 카테고리처럼 마련되어 있었지만, 결국 큰 갈래로 따지면 세 가지.

그 중 첫 번째는 무기였다.

아카데미와 제휴한 대장간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전용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보급품이나 기성품은 내게 맞는 것이 없으니 지금으로서 내게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지만, 솔디어에게도 부탁할 수 있어.’

시험 일정이 촉박하여 그것에 관하여 말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편지를 보낸다면 솔디어는 기꺼이 나를 위해 최고의 장인을 섭외해 줄 테다.

‘아니, 어쩌면 이미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 투명 세로 반바지 같은 뭔가가 또 나올지도 모르니,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개입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다음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두 번째는 마법이었다.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도서관의 마법서 중, 금서를 제외한 무엇이든 간에 한 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마법사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제안이지만 내게는 아니다.

내 마나는 오랜 시간 연마하여 그 질은 무엇보다도 짙지만, 양은 결코 많다 할 수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수련한 사람이 아니기에 마나의 용적이 적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내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서를 들고 나와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시전할 마나가 없다는 소리다.

‘내겐 전투에 응용할 간단하고 가벼운 고속마법이면 족해. 더는 필요 없어.’

내 시선이 세 번째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고 내가 찾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내가 찾던 것’ 이라는 표정은 조금 부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상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이 녀석들이 뭘 준비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단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말이 있다.

‘돈 쓰는 것이 아카데미에 흐르는 강물 같다.’

기본적으로 황실이 지원하는 탓에 예산 자체가 빵빵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현장 체험’ 따위의 명목으로 학생을 외부로 돌려 의뢰를 해결하는 등의 수단으로 돈을 긁어모은다.

아카데미보다 돈을 많이 쓰는 집단은 황실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돈지랄의 전문가들이 준비했는데, 뭘 해도 잘 해 놨겠지.’

딱 그거 하나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과연.

역시 돈을 물 쓰듯 하는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나는 세 번째 페이지, 마지막에 쓰여진 문단을 훑듯 쓰다듬었다.

“엘로힘의 비약이라…….”

내 옛 친우…….

…아니다.

친구라기 하기엔 뭣하고, 알고 지내는 웬수 정도의 사이인 대연금술사 엘로힘.

수십년 전부터 이 아카데미 골방에 틀어박혀 얹혀살고 있다는 말은 계속해서 들었지만, 이리 직접 단서를 접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뭐, 그 방구석 개 날백수 녀석이 어디 틀어박히는 건 항상 있는 일이니 특이할 것도 아니었지만, 구태여 이리 비약을 만들어서 던져주는 걸 보면 놈도 눈치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는 것도 없는데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오고,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다 주고, 잠자리는 푹신하고…….

결국 눈치가 보여서라도 밥값은 해야겠다— 하는 느낌으로 나온 게 저 비약일 테다.

‘어쨌든 엘로힘 녀석이 아카데미에 아직 있다는 소리군.’

그건 상당히 반가운 소리다.

날백수라도 대연금술사라는 칭호를 도박으로 딴 건 아니니까.

‘……어쩌면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설령 거기까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이 상황에 대한 조금의 개선책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대충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즈음, 안내원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비약을 원하시는 겁니까?”

“생각 중인 거 안 보여?”

“……….”

“아니다 야. 네가 생각해 봐라.”

“무, 무엇을…….”

“이건 다섯 개만 있어도 딸 수 있잖아. 근데 봐. 내 증표가 몇 개?”

그녀는 말없이 눈으로 증표를 세기 시작했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열… 열 여섯 개… 네요.”

“그치? 그럼 비약 세 개쯤 줄 수 있는 거냐?”

“그건 무리입니다. 준비되어 있는 것이 하나 뿐이기에… 애초에 가장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부상으로 증여할 물품이었습니다. 다섯 개를 전부 획득하고,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학생이요.”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죄송합니다.”

알고 있다.

그 날백수가 밥값이랍시고 비약을 세 개씩이나 만들어 주는 인간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그녀가 줄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물어 봤다.

무리한 요구를 하기 전에는 미리 ‘미안하다’, 혹은 ‘죄송하다’같은 말을 들어 둬야만 한다.

사과의 말은 한 번은 쉽지만, 연속으로 두 번은 결코 쉽지 않으니 말이다.

애초에 비약 세개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주아주 심플한, 단 하나의 요구다.

“그럼, 내가 엘로힘 본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조금 빡세겠지만, 지금쯤 아무것도 안 하고 쳐놀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면 명분만 있으면 안 될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교수들의 답변을 느긋하게 기다릴 의향이 있었고, 안내원은 난처한 표정과 함께 다시금 교수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대답은 찰나가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그건 어려울 거다. 영애.”

눈앞의 안내원이 아닌, 내 뒤편에서 말이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간편한 복장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교복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외견으로 보아 최소한 삼십 줄.

…결코 학생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자라면— 아마도 교사이리라.

나는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기사학과의 창술교관, 질레타라 한다. 실베니아 영애… 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호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하던 말이나 계속해 보시죠.”

“말 뜻 그대로다. 엘로힘 님께서 칩거하시고 누구와도 대면하지 않으신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 교장 선생님을 제외하면, 우리 교수진도 그분과 대면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럼 그 방구석 폐인이 언제는 누굴 만나기 좋아했다는 투로 말하는군.

당연하고 말고를 떠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라, 나는 비웃음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뭔가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안 된다’ 라고 말하지, ‘어렵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렵다는 말은, ‘어떻게든 하면 되기는 한다’는 말이지 않던가.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원하는 질문을 해 주었다.

필경, 이 대답을 원했을 테지.

“절대로,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합니까?”

“글쎄…….”

질레타라고 자신을 소개한 교사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말을 거는 시점부터 내게 썩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저 웃음은 그야말로 ‘걸려들었구나’ 같은 의미에 가까웠다.

‘걸려들어?’

풋, 웃기는 소리.

내가 걸려들어 ‘준’ 거다.

그리고— 과연.

“그리 말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내기 하나 하는 건 어떻겠나?”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기?”

“별 거창한 건 아니다. 내가 지면, 교수회의에 네 요구를 직접 올리고 통과시키겠다. 아! 당연히 이번 시험도 통과다. 그래도 명목상 필기 시험이니 대충 써서 내기만 하면 통과시켜 주마.”

‘직접 올리고’, ‘통과시키겠다’.

실베니아는 그 단어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통과시켜보도록 노력하겠다—

같은, 머저리도 맺지 않을 법한 약속이 아니었으니까.

실베니아는 살풋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진다면?”

“……고작 응시생과 교사의 내기다. 그 대가가 크면 안 되겠지?”

질레타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 눈빛에는 일견 악의를 품고 있었다.

대가가 크면 안 돼?

‘내 입으로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질레타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입학을 때려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실베니아의 요구?

들어줄 수 있다.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설령 이의를 제기한다 해도, 힘 앞에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질레타는 실베니아가 싫었다.

이성은 ‘문제 없다’라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그의 정의가 허락하지 않았다.

공평. 공정. 정대.

이 편파의 어디에 그러한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러한 편파가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로, 저 소녀가 찬란한 재능을 품은 아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질레타는 확신했다.

재능은 언제나 그만한 노력을 한 자에게, 그만한 성품을 지닌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전장을 넘은 노익장들의 성격이 괴팍해지는 경우야 있다지만, 저 소녀는 고작해야 십대.

그런 외부의 변화조차 없었을진데 저런 성격이라면, 미래에 어찌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시험해 보고 싶었다.

과연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도 이 아카데미의 문 안으로 들여보낼 가치가 있는 아이인지.

물론, 자신을 실망시킨다면…….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베르트랑의 비호가 두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질레타는 결국 한숨과 함께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지면 요구는 그냥 넘어가고, 너는 멀쩡히 시험을 치르는 걸로 하지. 대신, 초과분의 증표는 압수하는 것으로. 어떤가?”

그러나— 상상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내기를 그딴 식으로 합니까? 쫄보도 아니고.”

“뭐?”

실베니아는 불만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하죠. 제가 지면 깔끔하게 입학 포기하겠습니다. 제가 이기면, 이 카탈로그 뒷면에 있는 것들 전부 내놓으십쇼. 당연히 엘로힘 건은 덤이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교관님이 이기면 되지 않습니까?”

이성은 거부하라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당연히 자신이 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친 요구였다.

카탈로그 뒷면에 있는 것 전부를 요구한다고?

그 정도면 이미 편파가 아니다.

편애지.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더욱 그릇된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질레타는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규모의 내기가 아니야. 신중하자.’

질레타는 그리 생각했다.

“쫄립니까?”

소녀가 웃으며 그리 말하기 전까지…

…대략 3초 정도는 말이다.

"설마, 교관님씩이나 되시는 분이…쫄려서?"

곧, 질레타의 목에 혈관이 두드러졌다.

‘그래 뭐 까이꺼, 이기면 그만이지.’

가만두지 않겠다. 거지 같은 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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