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소녀검성-41화 (41/47)

〈 41화 〉 #040 문제아들의 모임 (1)

* * *

40.

소네트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윙크하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그, 그래도 꽤 훌륭하지 않았어요?”

“아가리 묵념하고 팔굽혀펴기 실시한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에이, 이렇게 귀여운 저한테 어떻게 그렇게 잔혹한 짓을······..”

못 할 이유가 없지.

나는 빵긋 웃는 얼굴로 녀석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빠악!

“아악!”

“감옥 들어갔다 나온 기억이 아직도 안 잊힌다.”

“씨이··· 미, 미안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에 도와줬잖아요. 침대도 양보해 주고.”

침대?

그건 또 뭔······.

‘······아, 판잣집에 있었던 그 침대.’

하긴 이상하긴 했다.

들어와서 스윽 둘러보더니, 대뜸 침대를 양보하지 않았던가.

굳이 그럴 이유도, 그럴 사이도 아닌 초면인데 왜 그러는지 퍽 수상했다만···

이 녀석 나름의 배려였던 모양이다.

·········.

“그런데 그거, 결국 네가 눕지 않았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그래?”

“그쵸."

어쨌든 간에.

“그래도 결국 맞을 걸 알고는 있었으니까 변장했던 거겠지?”

“아, 뭐··· 그, 그런 이유도 있었죠! 내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 때문이기도 하구요. 바, 반반이라고 할까?”

"주먹 반 발차기 반으로 맞고 싶다는 소리냐?"

"너무 폭력적이지 않아요? 다 큰 숙녀가 무슨 폭력을!"

"내가 좀 폭력적이라서."

나는 웃는 얼굴로 소네트의 귀를 잡아당겼다.

싫어하는 사람? 그래, 알 만 하구만.

생각해 보면 소네트는 행동거지는 이 따위여도 꼴에 귀족의 여식이다.

마법사랍시고 ‘그냥 소네트’라고 우겨대고 있지만, 나는 내 동료 중 하나가 귀여운 손녀랍시고 저 녀석을 소개하던 날을 아직 기억한다.

그래. 소네트 아이카반.

저 아이는 흔히들 ‘4대 검식’이라 부르는 기사 명문의 일원이었다.

동쪽 협해의 아이카반.

서쪽 수림의 맥네어리.

남쪽 평원의 아가페.

북쪽 설산의 프리드웬.

기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검객으로서 저 아이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찬연한 재능이 있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당연한 일이요, 아이카반은 자신들의 딸을 제국 제일의 기사로 키워낼 준비를 끝내 놓았으리라.

그런데 그런 가문의 장녀가 대뜸 집안 가보 훔쳐들고 나와서 마법쟁이 하겠다고 깝치고 있다고?

‘지금까지 안 잡힌 게 용하구만.’

나는 소네트도 알지만, 이 녀석의 아비도 안다.

‘포엠 아이카반.’

녀석의 정도를 모르는 교육 방식을 생각하면, 아예 입학 시험에 끼어들어서 시험을 망쳐 놓으려 했을 수도 있다.

뒤에서 힘을 좀 쓰면 소네트의 입학을 취소하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예전의 내가 알던 그 속 검은 놈이라면 충분히 그리 할 만 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나? 애를 그대로 내버려 둘 놈이 아닌데….’

기사든 마법사든, 어릴 때부터 기반을 다지고 쌓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 녀석이 서 있는 자세만 보아도 지금까지는 분명 훌륭하게 기사의 길을 걸어왔음이 분명할 터인데······.

“소네트. 그런데 너······.”

“네, 넷?”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됐어.”

“뭐예요. 갑자기 무안하게. 뭔데요?”

“됐다 임마. 필요없어.”

됐다. 물어서 뭐하겠냐.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당장 누군가를 걱정하고 참견할 입장이던가?

그 놈의 마법, 지가 좋으니까 배우든 말든 하겠지.

‘당장 내 처지를 알면 모가지를 따려 할 놈들이 수십 수레일 텐데, 걱정은 무슨.’

웬지 내 꼴을 돌아보니 괜히 울적해진다.

특히나 따뜻한데도 왠지 추운 것 같은 허벅지가 시린 것 같다.

훌쩍.

‘······아냐. 그래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래도 내가 나름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다.

적은 많아도 그만큼 친구가 있지 않은가!

가령 끔찍한 가정이긴 하지만 일단 황제가 그러할 테다.

또 미운 정 가득한 옛 동료들이 그러할 테고.

또 우리 마누라가······.

마누라가······.

마누라···는······.

잘 모르겠다.

내 모가지를 뜯어 버리려 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걱정해 줄 것이다.

뭐 그건 그거고.

“이제 기다리면 되는 거냐? 방금부터 묘하게 밖이 조용해 진 것 같은데.”

“난동피우는 사람들을 제압해서 돌려보내는 과정일 거예요. 종종 있으니까, 방에서 대기하는 게 좋대요.”

“흐음.”

그 쪽이 이상할 것 없는 대처이긴 하다.

자신의 실력이나 재능을 납득하지 못해 발악하는 녀석은 언제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스스로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발전하는 것 또한 탁월한 재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놈들은 정말 구제불능의 머저리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즉, 앞으로 시간이 꽤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소네트를 향해 웃으며 어께에 손을 올렸다.

“잘 됐군. 그럼 엎드려. 하나에 앞으로. 둘에 잘하자.”

“요, 용서하는 분위기 아니었나요······?”

“하나.”

“저, 저기······.”

“하나!”

“아, 앞으로······.”

“목소리가 작다!! 하나!!”

“앞으로오오!!!”

고요함.

아르칸티아 황실의 궁전을 두고 그것을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곳에 출입하는 관리들은 십중팔구 그 단어를 선택하리라.

하루에도 수백 명의 대관과 수천 명의 병사가 드나드는 장소임에도 황궁의 중심에 다가설수록 허용되는 것은 오로지 고요와 정적 뿐이다.

한계까지 조심하여 내딛는 발걸음 소리와, 계속해서 책상을 넘나드는 종잇장 소리, 그리고 그 위를 쉴 새 없이 오가는 펜촉 소리······.

“다음.”

그리고 그 고요를 꿰뚫는 단 한 명의 발언.

그것이 이 장소, 아르칸티아 황제의 집무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었다.

대략 30m길이의 거대한 홀의 양쪽으로 수십 명의 관리들이 위치하여 각자에게 넘겨진 서류를 반복하여 검토하며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검토하고 정리하여 또 걸러낸 끝에—

방의 끝에 있는 단 한 사람,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 다다른다.

직후, 서류의 운명이 결정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단지 3초.

—쿵!

황금 반지에 새겨진 붉은 용의 인장이 찍히거나, 혹은 그녀의 손 안에서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거나.

이 살풍경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두고, 이곳의 업무를 보았던 관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기계의 부품으로 사용하는 곳’··· 이라고.

그 표현에는 단 한치의 과장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리되는 서류는 하루에도 수천 건.

황제의 시간을 허비시킬 수는 없으니 그녀의 손에는 항상 무언가가 들려 있어야만 했고, 그에 따라 대관들은 단 한 순간의 휴식도 없이 눈과 손을 놀려야만 했다.

모르는 이가 말한다면 업무 시간에 일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 하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 그들이 업무 도중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이번 기수 입학하는 아이들입니다.”

“두고 가라.”

바로, 이 모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직접 무언가의 결재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서류를 들고 온 백금발의 중년인은 긴 책상의 빈 곳에 서류 뭉치를 두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조금은 쉬면서 하시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어떻게 해야 짐을 과로사시킬 수 있을지 매일매일 참신한 방법을 고안하는 그대가 할 말인가?”

“불가역적인 일입니다. 제 의지는 아니지요.”

“흥. 웃기지도 않아.”

이 침묵의 공간에서 저토록 당당히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하물며 직접 황제의 앞까지 나아가 무언가를 건낼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소수였고 말이다.

가슴에 수놓아진 푸른 파도의 문장과, 세월에 풍파된 흐린 백금색의 머리칼— 포엠 아이카반 공작.

그는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평소에는 아이들을 살피시는 것, 퍽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대신들이 무능한 통에 짐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후계를 어찌할지가 매일의 고민거리이니 말이야.”

“···농이 심하십니다. 후계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이카반 공작은 눈쌀을 찌푸렸다.

후계? 무엇의 후계 말인가.

아무리 지금의 황제— 그녀에게 아직 아이가 없다고는 하나, 황가의 계승을 다른 핏줄에게 잇게 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황제.

다른 이름으로는, 용의 마지막 자손.

먼 과거 그 시작을 드래곤과 함께한 이 제국의 황가에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혹자는 그저 전설일 뿐이라고 힐난하기도 하나···.

글쎄. 그 힘은 강대하고도 명확하다.

무어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그 핏줄은 태생으로서 ‘인간이 아닌’ 범주의 생물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이 수천 년동안 이 제국의 존립을 가능케 했다.

당장 이 방의 존재 그 자체로서 용의 핏줄이 있음이 증명되지 않던가.

황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이카반 공작의 팔을 툭 치고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짐이 일찍 죽으면 분명 과로 아니면 화병일 텐데, 그 이유를 쫓아 감히 황제를 시해한 범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그리 되면 그대들은 싹 다 교수형인데, 미리미리 그 후계를 찾아 놔야지.”

“헛, 허허······.”

“웃지 마라. 그대 얘기다.”

그녀는 서랍에서 굵은 시가 하나를 꺼내어 끝을 잘라내곤 불을 붙였다.

검은 살모사. 동쪽의 이국, 바시프론에서 들여오는 일품 중의 일품으로 유명한 물건이다.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서 못 구한다는 그런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한껏 빨아들이는 황제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오히려 한 모금을 뱉어낸 이후에는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고, 깊은 한숨과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누가 보아도 익숙하지 않은 흡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이고 그것을 다시 빨아들여, 독하디 독한 연기가 주변을 채우게 만들었다.

보다 못한 아이카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검은 살모사는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물건은 아니지요. 아직도 시도하시는 겁니까? 애당초 실베스터 경은 이미 금연한 지 오래입니다.”

“그가 좋아했던 것을 짐도 알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이 냄새가 썩 좋구나. 그가 짐의 옆에 서 있는 기분이야.”

“········.”

아이카반 공작은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실베스터의 피습이 알려진지 벌써 보름 째.

소란이 생기지 않게 정보를 통제하고 상황을 수습하고는 있었지만, 제국의 고위 인사 몇몇은 그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검성과 직접적인 연이 있는 사람이나 4대 검식의 가주, 더하여—

당연하게도, 황제 그녀도 그 몇몇에 포함되는 인원이었고 말이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 죽을 남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분명 그렇겠지. 아직 르 미에에게서 다른 말은 없었나?”

“까마귀 여왕은 그저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필시 낭보를 들고 오겠지요.”

황제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분하기는 하지만, 황실 정보부보다 까마귀의 말이 수십 배는 더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이 대륙에서 까마귀가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대륙의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르 미에. 까마귀 여왕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은 말이다.

옛날 검성과의 인연도 짙었던 그녀이니 조사를 허투루 하지는 않으리라.

“···그래. 아카데미 신입생이라고.”

황제는 결국 시선을 돌려 아이카반 공작이 가져온 서류를 집어들었다.

지금은 의미없는 걱정 대신 다른 무언가로 의식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의미없는 시간 낭비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사락. 사락.

“흐음.”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삼백 명, 행정학과를 제외하면 이백 명의 입학생들 중 가장 훌륭한 이들만이 이 명단에 실려 있었다.

황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녀의 흥미도 한정되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인재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몇 개의 페이지가 의미없이 넘어가던 중, 그녀의 시선이 한 소녀에게서 멈추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써 내어 제출한 답안지에서 말이다.

“이 아이는··· 0점이라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필기는 그렇지만, 실기 쪽에서 우수한—”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카데미에서 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짐이 더 잘 알아. 짐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그녀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리 보아도 만점인데, 이게 어찌 0점이란 말이냐?”

“그것은······.”

“그대가 보아라.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실베니아.

이미 첫 번째 시험에서부터 눈여겨오고 있던 아이였고, 그 아이가 어떤 누구와 연관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는 바다.

다른 이가 저 답안을 썼더라면 그저 어린아이의 망상으로 치부했겠으나, 검성의 방계와 연관이 있다면 저 답안지에 휘갈겨진 정답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기사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저 효율과 승리만에 국한된 답안.

그리고 역사서의 기록이 뭐가 중요하다며 비웃는 것처럼, 극소수만이 아는 진짜 ‘진실’을 적어내는 대범함.

‘죽기 싫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라. 네 팔을 꺾어서라도 적의 목숨을 취한다면 그것이 승리다.’

그래, 검성 실베스터의 방식이다.

동시에— 명예를 아는 기사들이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방식이기도 하다.

“한 치의 틀림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진실이기에, 오히려 묻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그대가 짐을 훈계하는가?”

“송구합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허나 시험이란것은 곧 정해진 답안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교수들이 모르는 것을 답안으로 쳐 줄 수는 없지요. 특히나 젊은 교수들이라면 더더욱.”

“허.”

“그래도 합격한 아이입니다. 결과는 좋았으니 불문에 붙여도 좋을 터. 필기가 전부 오답임에도 붙었다는 것은, 베르투스가 손을 썼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카반 공작은 의도적으로 교수와 실베니아 간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아이다.

구태여 이 이상 황제의 관심을 끌 필요는 없었다.

무어라 해야 할까?

굳이 비유하자면, 새로 산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어린아이의 감정이라 해야 옳을까.

신하가 황제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은 불충이라 해야겠으나, 그에게 그런 감정은 없었다.

진실보다 득이 되는 거짓이 있는 법이다.

굳이 산만한 주제를 꺼내어 황제의 주의를 돌릴 필요는 없을 테다.

이런 식으로, 몇몇 주제는 조금씩 왜곡되고 곡해되어 그녀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가령— 아카데미의 신입생들 중 ‘뱀’이 몇몇 섞여 있다는 급보라던가.

하지만 아이카반은 그것을 전할 생각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이미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하였고, 그곳의 교수들은 고작 잠복한 뱀들 따위에게 고전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이지.’

즉, 굳이 황제의 업무를 방해하고 신경을 흐트리면서까지 전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은 완만하게 해결될 테니까.

“굳이 환상을 깰 필요는 없다는 건가. 베르투스도... 나이를 먹었군.”

황제는 그리 대꾸했다.

아이카반 공작의 말이 맞았다.

저 답안을 ‘정답’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들은 몇 존재하지 않을 테다.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본, 이미 반백이 넘은 노장이거나— 혹은, 그 당사자 검성의 제자이거나.

아카데미의 수석 교관인 베르투스는 전자에 속했다.

그는 실베스터의 곁에서 전쟁을 치렀던 은퇴한 노장이니 역사의 진실을 알리라.

허나··· 그렇다면.

“그럼, 이 아이는 무엇이란 말이냐?”

검성의 제자는 아니다.

그녀가 알기로 실베스터가 남긴 제자는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은 이미 죽었고, 한 명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명의 위치는 이미 명확하게 파악되어 있었다.

북방대공 리아힘과 솔디어 베르트랑 후작, 그리고—

황제, 그녀 자신.

아무리 솔디어가 그녀의 후원자로 있다고 해도 이것은 정도를 지나쳤다.

솔디어가 이 답안지를 써낼 수 있을까?

단언하자면, 무리다.

아무리 그에게 사사했다고 한들 그의 성정은 근본적으로 명예로운 기사이니까.

이것은 차라리, 실베스터 그가 직접 쓴 답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솔디어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동의합니다. 그 천치는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하니.”

“····개인적인 원한은 알아서 해결하라. 공작. 지금은—”

황제는 잠깐 말끝을 끌었고, 그 순간 뇌리에 몇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아니야. 하지만, 그것은.'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지금 확인하기에는 섵부른 것들이었다.

그것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존재들은 황제인 그녀라고 해도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자들이었으니까.

무얼. 당연한 일이다.

영웅과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관계자도 그에 상응하는 자임이 당연하지 않은가.

월계수의 마녀나 태양신의 성왕, 혹은 검성의 아내....

특히 마지막은, 황제 그녀로서는 썩 만나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다.

황제는 곧 서류 다발을 내려놓으며 아이카반 공작을 돌아보았다.

“일단 주목해서 지켜보아라. 미묘한 시기에, 참으로 시선을 끄는 아이가 왔구나."

검성이 사라진 지금.

하필이면 그를 마법처럼 빼닮은 여자아이라니.

황제는 입가에 지은 헛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딸이라도 되는 건지, 원."

결단코,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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