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044 문제아들의 모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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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인간과 마수의 차이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지성의 정도.
당면한 상황을 파악하고 전력의 차이를 인지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 단지 그것 뿐이다.
아무리 바위를 부수는 근력과 땅을 울리는 포효를 지니고 있다 한들 마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야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들판 짐승의 것보다도 강렬하고 원초적이어서, 눈앞의 목표물을 인식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의 사냥을 우선하여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피부가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신경치 않는다.
그저 적을 죽이고, 그 뼈와 살을 취할 수 있으면 그뿐.
그것이 마수의 지성이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짐승리면 ‘마수’라고 부를 일도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마수에게는 약자의 위협이 먹혀들지 않는다.
압도적인 강자가 떨쳐내는 표효에는 겁먹고 꼬리를 말더라도—애초에 ‘목표물’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니까—자신이 이길 수 있을 법한 상대에게서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그래서 곤란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저 마수들의 목표는 그저 내 목을 찢어발기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더라도, 자신에게 향할 위협과 피해를 저울질한다.
“이봐.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는 게 좋을 텐데.”
“너는 숨 쉬고 눈을 깜빡이는 일에도 책임을 지는 모양이지?”
“······재밌군. 아무 무기도 없는 걸 보니, 마법사인 모양인데··· 이 거리에서 그렇게 입을 놀릴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그리고 마수와는 다르게 그 저울에 다른 무언가를 더 얹기도 아주 쉽다.
그렇기에 인간을 이기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일이다.
—카앙!
“···?!”
순식간에 뽑혀나온 녀석의 검은 중간에 가로막혔다.
빠르긴 더럽게 빠르다.
아마 신체강화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지금의 나보다도 빠를 테지.
하지만 ‘인간을 이긴다’는 것은 딱히 ‘무력으로 제압한다’라는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그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령, 이렇게.
“말도 안 돼! 맨 다리로···?!”
“마나. 배리어인가. 아니. 저렇게 몸을 두르듯이. 펼치는. 것은··· 마법.이 아닌. 무투의 기술.”
“저 몸으로 ”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수들은 이미 들러리에 불과했다.
마수보다 더한 괴물들이 열 명이나 모여 있으니, 저딴 게 위협이나 되겠는가?
이 놈들의 시선에 당장 신기한 것은 저 마수들보다 내 다리일 것이다.
정확히는, 이 망할 ‘투명 반바지’ 다리 말이다.
그래. 정령 각인이 새겨져 있고, 은빛 바실리스크의 가죽으로 만든 빌어먹을 바지!
만드는 데에 성 하나 값이 들어갔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것은 견고하게 칼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내 책임 걱정하지 말고, 네가 감당할 일이나 걱정하지 그래?”
“...네년, 마법사가 아니군.”
“마법사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고?”
내 이죽거림에 놈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올 수는 없다.
이미 검을 휘두른 상황, 다리에 강기를 두를 수 있는 수준의 무투가가 상대라면 이것은 이미 무투가의 거리다.
한 발짝 더 내딛는다면, 내 다리가 그대로 검을 감아올려 머리를 부수리라는 것을 저놈은 안다.
‘물론 내게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지만.’
알 게 뭔가.
놈은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착각할 수 밖에 없다.
그야 어떤 미친 새끼가 투명 반바지를 만들기 위해 용의 가죽을 쓰고, 정령 각인을 박아 넣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딴 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분명 나라도 속을 것이다.
나는 다리를 내리곤 저 멀리의 마수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한 번 더 하고 싶으면, 저거나 치우고 오던가.’
놈은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그대로 검을 내리고 뒤돌아 마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도 안 한다.
저것들 전부 자신 혼자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충 구경이나 하려는데, 로렌스가 어느덧 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실베니아. 괜찮은 겁니까? 정말이지, 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을 도발하는 겁니까. 아버지께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그저 잠자코 지켜보라고 하셨지만···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봉황이 참새의 뜻을 어찌 알겠냐······.”
“예?”
“됐어 임마.”
너는 뭐가 나오든 앵간하면 잡을 테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나는 저기서 그냥 사자가 튀어나와도 그대로 이승이랑 굿바이 인사에요.
사람이랑 마수는 체급이 다르다니까?
“쟤 곧 돌아오면 싸우자고 깝칠 텐데, 적당히 상대 좀 해 줘라. 너랑 비슷비슷 할 거야.”
“······당신이 도발한 걸 왜 제가 합니까?”
“찬물도 위아래도 있지, 너 하나 못 잡는 애랑 내가 싸워야겠냐?”
“·········.”
하고싶은 말이 많은 표정인데, 솔디어가 교육을 좀 하긴 한 모양인지 로렌스는 입을 그냥 닫았다.
암. 어린놈이 어른 말씀에 따박따박 말대꾸하면 세상에 거꾸로 돌아가는 법이지.
플레타 프리드웬은 지금까지의 평생을 무예에 바쳐왔노라고 확신하는 소녀였다.
북방 산맥의 수호자, 거산의 프리드웬.
그리고 그 이름을 잇는 소녀.
4대 검식의 하나 뿐인 외동딸로 태어나 제국 제일의 기사를 꿈꾸는 삶은 소녀가 돌아보기에 썩 나쁘지 않은 그것이었다. 그 자질은 평범하여 줄곧 한계라는 벽에 막히고는 하였으나, 그 때마다 직접 제 손으로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것을 원했고, 언제나 혹사를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며 뼈에 새긴 것은 강함을 향한 동경이었으며.
또한, 어제까지의 자신이 짊어지던 한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방금의 일순간, 바람을 가르고 부딪힌 두 사람의 공격이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저 성질 나쁜 남자애의 검은 익숙해. 아가페의 유성식(???)이야.’
분명 그 황금색 번쩍번쩍 교수가 말하기로 4대 검식의 후계가 셋이나 있다고 했다.
플레타 자신을 제외하면 둘이 남을텐데—아무래도 저 소년이 그 주인공 중 하나인 듯 보였다.
4대 검식끼리는 종종 검술의 교류도 있는 편이기에 알 수 있었다.
비록 후계자들은 꽁꽁 싸매 숨기느라 서로 만난 적은 없으나, 플레타의 검이라면 원정기사들이 펼치는 것을 몇 번이고 본 기억이 있었다.
홀로 마수 무리에게 다가가 사투를 벌이는 저 소년의 것은 분명 그 기사들의 것과 똑 닮아 있었다.
완성도 면에서 보아도, 충동적인 기운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밤하늘의 별이 되리’라 속삭이는 그들의 가언에 걸맞게, 공간을 수놓는 소년의 검무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한 땀 한 땀의 노력이 베어 있는 유성.
플레타는 그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저 검기를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나 저 소녀, 실베니아라고 불린 저 소녀의 수준은 소년과 비교해도 얼마만한 노력이 들어갔을지 쉬이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몸을 저렇게 강화할 수 있다고? 그것도 발도, 주먹도 아니고 종아리를···. 검에도 베이지 않을 정도로? 불가능한 일일 텐데······.’
마나로 몸을 강화하고, 나아가 막을 둘러 보호하는 것은 주로 사용하는 부위일수록, 또 본디 튼튼한 부위일수록 강화가 용이하다.
그러니까 대체로 무투가의 경우에는 각 관절 부위와 손과 발 정도—
혹은 다리를 주로 쓰는 유파의 경우에는 잘 쳐 줘서 정강이 부위까지는 강철과 같이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으로 도검을 막아내려 한다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것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경지라면 갑옷 따위는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 최강의 존재는 검성이 아니라 권성(?成)이라 불렸을 테다.
“대단한걸······.”
어느덧 플레타의 입 밖으로 생각이 흘러나왔다.
이럴 마음은 없었는데 싶어 주워담으려 해도, 이미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소년이 들어버린 뒤였다.
“누가? 저 생각없는 전투광이랑 노출증 미친년 중에 누구?”
“···둘 다?”
“내가 봤을 땐 그냥 둘 다 병신이야.”
“·····데울. 지난번 부터 말하는데, 너는 말을 좀 곱게 할 필요가 있어. ”
데울은 2차 시험 때부터 플레타와 우연히 함께하게 된 소년이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검은색 머리칼에 특징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얼굴과 목 여기저기에 드러난 흉터들은 소년이 썩 유복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교복도 무언가를 훔친 것인지 혹은 빼앗은 것인지, 묘하게 사이즈가 맞지 않아 모양새가 제멋대로였다. 자캣은 애초에 입을 의지조차 없는지 대충 허리에 묶어 놓았고 말이다.
한 쪽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의 외동딸, 한 쪽은 뒷골목의 무법자.
그 둘이 함께하는 데에 별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 같은 판잣집을 사용했을 뿐이고, 상대의 실력이 꽤 괜찮다 생각한 그들이 서로를 인정했을 뿐.
데울은 귀찮은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나보다 쎈 사람한테는 어련히 잘 한다니까?”
“그래. 어련히도 그러시겠지.”
그냥 실베니아. 성은 없다.
다시 말해 무언가 특별한 피를 이은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별을 짓이기는 혈통도, 몸을 담금질하는 비술도 없는 일반적인 아이가 저런 재능이라니.
플레타는 저 소녀가 마지막 한 명의 4대 검식이라고 해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성이야 뭐, 차라리 숨겼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던가.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평민이라면.
플레타는 데울을 돌아보며 말했다.
“쟤가 평민이면 너는 좀 더 흥미를 가져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귀찮게시리.”
“강한 사람이랑 싸우는 거 좋아한다면서.”
“그건 너 아니냐? 괜한 사람한테 누명 씌우는 거 아니다.”
“나는 무턱대고 싸움을 거는 싸움광은 아냐.”
“누군들 전투광인줄 아나. 나는 얻을 거 없는 싸움은 안 해. 그리고······.”
데울은 여유롭게 하품하는 실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만치에서 홀로 고독한 싸움을 펼치는—지금까지 아무도 안 도와줬다는 소리다— 아가페 가문의 소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데울이 실베니아를 쳐다보는 시선도 썩 다르지 않았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강한 사람이랑 싸우는 거 좋아한다고. 쟤는 해당 사항 없어.”
“뭐? 너도 봤잖아. 그 짧은 순간에 다리에 마나를 둘러 칼을 막았다고. 아가페 쪽이 검기를 쓰지 않기는 했지만······. 그야 그건 당연한 거고.”
검기를 일으킨다는 건 그냥 여기서 널 죽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용자에 따라서는 강철도 두부처럼 가르는 것이 검기일진데, 기습으로 그런 공격을 하면 아무리 4대 검식의 직계라 한들 추궁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었다.
위협일 뿐이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검기를 일으켜 공격하고서? 웃기지도 않은 소리.
아까의 공방에 어떤 속마음들이 숨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데울은 확신하고 있었다.
“저거 다 속임수라고. 뭣하면 확인시켜 줄까?”
“확인? 어떻게? 결국 가서 싸우게?”
“싸울 것까지도 없지. 저 놈 실력이 진짜면 날 눈치챌 테고, 가짜면 그냥 당할 테니.”
데울은 품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내어 역수로 쥐었다.
“머리만 조금 슬쩍 해 올게. 저 신기한 은발, 갖고 싶지 않아?”
“뭐? 야, 잠깐······.”
플레타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데울은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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