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046 교권이 바닥에 추락했어 아주 (1)
* * *
45.
“자만이 심하시군. 귀족 나으리.”
“자만일지 자신일지는 시험해 보면 알겠지.”
“킥, 오답의 대가는 비쌀 거라고.”
난 가만히 있는데 왜 얘들끼리 지랄일까?
이해는 조금 힘든 일이지만, 지들끼리 싸워 준다니 나는 발 빼고 구경이나 해 주는 게 옳은 일이지 싶다.
한 마디 더 얹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언제나 잘 되가는 일을 망치는 건 쓸데없이 더해지는 한 마디라는 것을 잘 안다.
뭐 가령 ‘그래! 난 어디 안 가니까 누구 하나 뒤지면 말해 줘!’ 같은 말 말이다.
녀석들은 서로 조금도 물러서려 하고 있지 않았다.
‘이름이 데울···이랑 아가페 뭐시기였던가?’
하기사 뭐, 문제아 1등부터 10등까지를 모아다 한 자리에 모아 놨는데 파탄이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대체 얼마나 병신들이어야 이 라인업을 하나로 묶을 생각을 하나 싶었다만, 그냥 머리 비우고 짬처리 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서슬퍼런 단검 한 자루와 롱소드 두 자루가 대치하며 서슬퍼렇게 빛났다.
그런데··· 흐음, 이상하다.
‘아가페 가문 사람이면 내가 알 법도 한데.’
아가페 가(家)라면 남쪽의 평원을 수호하는 4대 검식의 일원.
내가 소네트 이 가증스러운 녀석을 알고 있었듯이, 아가페의 아들이라면 내가 알 확률이 높다.
그야 뭐, 옛날에 내가 직책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때에는 온 제국 귀족들—특히 기사라는 것들이—이 내게 몰려와 자식 소개를 하고는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쟤는··· 확실하다. 확실하게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저쪽은 알아보겠는데 말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하얀색과 검은색, 두 가지 색이 섞인 머리칼을 지닌 소녀를 돌아보았다.
저건 성수의 부작용 중 하나, 모발의 탈색 과정이다.
성수를 나 이상으로 물처럼 마시고, 찢어지는 근육의 고통을 강해진다는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또라이들.
그 끝끝내 신경계가 퇴화하고 고통도 뎌디게 느끼는 변태들의 특징이 바로 저 머리칼이었다.
나 또라이니까 피해 다니세요 하고 말해주는 경고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4대 검식 중 하나, 북방 산맥의 프리드웬.
저 변태들의 머리칼을 굳이 모방해서 따라할 놈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플레타 프리드웬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저 아이는 십수년 전에 분명히 봤던—엄밀히 말하면 자랑 당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저 소년, 아가페의 이름을 걸고 아가페의 검술을 펼치는 저 소년만큼은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아가페의 아들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그 녀석은 아니다.
왜냐면, 나는 아가페의 아들이 이미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페의 ‘유일한’ 후계자는, 이미 아카데미에 입학한 상태였다.
심지어 몇 년 전에.
‘아가페네 아들내미가 아카데미 입학했다고 몇날 며칠 동안 신문 1면을 장식했었지.’
몇날 며칠동안 불세출의 천재라면서 떠들어 댔으니 아무리 나라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럼 저건 서자이거나··· 꼭꼭 숨겨둔 둘째이거나.
대충 결론을 내리자면 그 정도 인물이 되지 않을까.
‘아무리 둘째라도 아들내미라면 분명 소개를 했을 텐데······.’
흐음.
하지만 가짜라고 치부하기에는 저 검술은 명명백백히 아가페의 유성식(???)이 분명했다.
아가페 가의 외견은 따라해도 검술은 따라할 수 없는 법이다.
4대 검식의 검술이라는 것이, 어중이떠중이가 흉내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카앙!
내가 대충 추억을 되짚으며 주변을 돌아볼 무렵, 어느덧 녀석들은 칼을 맞대고 있었다.
활기차니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그래. 사내새끼들끼리 싸울 수도 있는 거지.’
몇 번이고 강철의 마찰음이 반복해서 들려오며, 놈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기본적으로 투척술로 거리를 만들며 일격 필살의 기회를 노리는 데울과, 양손에 든 쌍검을 휘두르며 맹렬하게 뒤쫓는 아가페.
아가페는 이미 반쯤 지친 상태여서, 데울의 뒤를 쫓는 속도가 확실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4대 검가의 자식.
그런 것 쯤은 의미도 없는 핸디캡이라고 소리치는 양 맹렬하게 압박을 반복하고 있었다.
역시 언제나 좆밥 싸움이 제일 재미있는지라, 먹을 것 없나 주머니를 뒤적거릴 찰나.
우리의 바른생활 사나이 로렌스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또 내 곁으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 저기, 아무도 안 말리십니까?”
“·내가 왜? 개꿀잼인데. 쟤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말릴 생각 하는 애들 아무도 없잖아.”
“개꿀잼이라는 말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몰라. 요즘 애들이 쓰더라.”
“교양있는 화법을··· 아닙니다. 알아서 하십쇼.”
얘도 슬슬 좀 웃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어른한테 말대꾸하면 주먹부터 날아가야 하는데, 그동안 본 정이 있으니 한 번은 참아 준다.
“여자애도 아니고 사내새끼들끼리 치고받을 수도 있는 거지 뭘.”
심지어 그 결과로 내가 좀 더 편하게 된다면 금상첨화, 말릴 이유도 전혀 없지 않던가?
둘중에 하나가 ‘안타까운 상황’에 부딪히면 조금 곤란해지긴 하겠지만, 그 곤란해지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위에서 직관하는 로뎀 교수일 테니 내 알 바도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상황까지 가기 전에 저 교수가 알아서 말릴 테고—
녀석들의 검격이 채 열 합을 더 부딪히기 전에, 내 예상은 적중했다.
“상황이 재밌어지네요오~”
‘인정하기 싫지만, 강하군.’
이놈이고 저놈이고 무시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지금껏 쉬이 밟아 왔던 패배자 놈들과는 그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수십 수백번의 실전을 거치고 그 이상의 사선을 넘나든 경험.
저 데울이라는 녀석은 그 경험이 녹아든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장검과 단검— 그 분명한 리치의 이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제레딘 아가페는 저 뒷골목의 소년에게 정타를 먹일 수가 없었다.
‘내가 더 빨라. 하지만··· 도망은 녀석이 한 수 위다.’
왼 손의 검으로 압박하고, 오른손의 검으로 찔러 들어간다.
무릇 쌍검의 장점이란 자연스러운 공격의 연계에 있는 법이니, 제레딘은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허투루 취급할 생각이 없었다.
찌르고, 베고, 찌른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상하여 파고들고,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그 일련의 과정에 섬세한 기술의 면모는 썩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망가는 상대를 쫓을 뿐이니 허상을 섞어 착각을 줄 필요도, 방어의 경로를 예상하여 검로를 뒤틀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놀랍도록 단순하고 쾌속한 검격이 이어짐에도— 그 검은 닿지 않았다.
데울은 검을 섞어가며 반격하기보단, 품 속의 단검을 날려가며 피신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장검이 단검보다 길다고 한들, 미련 없이 대치 구도를 던져 버리고 도망쳐 다니면 리치의 이점은 분명하게 퇴색된다.
아무리 화려하고 복잡한 검술을 펼쳐도 검의 간격 밖에 있으면 그만.
모든 검수에게 통용되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리고 한 순간의 빈틈을 찔러, 녀석의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다.
—카앙!
단검 따위야 쉽게 튕겨낸다고 하지만, 진짜는 바로 그 다음.
날아드는 단검을 쳐내느라 움직인 왼팔의 사각으로 데울이 짓쳐들었다.
다음에 쇄도하는 것은 투척한 단검이 아니라 급소를 향해 찔러드는 날카로운 일격.
데울의 단검은 제레딘의 왼쪽 목 아래를 향해 찔러들어왔고, 제레딘은 고개를 틀어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단검에는 조금의 피가 묻어 있었고, 제레딘의 목 부근의 옅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물 흐르듯 데울의 왼손, 두 번째 단검이 복부를 향했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제레딘은 고개를 원래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몸 전체를 비틀어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를 뻗었다.
강렬한 충격음이 울리고,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금 벌어진다.
‘···머리를 노렸는데.’
소리는 거창했지만 데울에게 큰 타격은 없었다. 첫 번째로 공격했던 오른팔은 이미 제레딘의 공격을 예상하고 방어를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울은 코웃음을 치며 공격을 막아낸 오른손을 털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데울이 이긴 공방이었다.
어찌 되었든, 피를 본 것은 제레딘 쪽이었으니까.
“그 유명한 아가페의 도련님도 별 것 아니군 그래. 실망스러운걸.”
“그 혀부터 잘라내어 하수구에 버리는 게 좋겠군.”
“아니면 네가 하수구에 떨어지던가.”
데울은 곧바로 달려드는 제레딘을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다음 생각한 행동은 품에서 단검을 다시금 꺼내어 날리는 것.
빈틈을 노리며 최선의 일격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데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손을 멈추었다.
‘괴물 같은 놈······.’
오른팔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고작 한 번의 발차기를 막아낸 대가로 오른팔을 통째로 내 줄 뻔 했다는 것이다.
‘저 많은 몬스터를 잡아내고도 저만한 힘이 남아 있다는 거냐.’
과연 4대 검식.
뒷골목의 태생과는 그 몸부터가 다르다는 건가.
미간이 찡하니 저려 왔지만, 순순히 무릎 꿇어 줄 생각은 없었다.
데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태생을 믿고, 자신의 힘도 아닌 부모의 힘을 믿고 설치는 것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런 놈들의 미간에 주먹을 꽂아 주는 것이고 말이다.
데울은 단검을 고쳐 잡았다.
자신도 비장의 수 한두 개쯤은 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선보일 만큼 싼 녀석은 아니지만— 피차 자존심의 가격으로 친다면 싸게 먹히는 것일 테지.
데울과 제레딘은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피차 물러설 생각은 없으니 방법은 하나 뿐.
하지만 격돌하기 직전, 허공에서 황금빛 물결이 퍼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재밌어지네요오~”
물결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뎀이었다.
심각해지기 전에 교수가 개입할 것이라 모두가 예상하기는 했지만, 썩 바라고 있지는 않았다.
누구도 싸움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퍽 흥미롭다는 의미.
그 흥을 중간에 끊는 것을 누군들 좋아할 리가 없었다.
당사자인 제레딘과 데울 또한 마찬가지였다.
“···교수, 방해하지 마라.”
엄멈머 저 호로새끼 봐봐 저거.
세상에 아주 그냥 학교가 거꾸로 돌아간다.
대체 뭘 어떻게 배워쳐먹었길래 선생님한테 말본새가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만 싸우라면 좀 그만 싸울 것이지!
꼭 저렇게 피를 봐야 하나?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 놈들이 아닐 수가 없다.
“어휴, 선생님한테 저게 무슨 말버릇이야? 교권이 땅에 떨어졌어 아주.”
“교 뭐라구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있던 소네트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내 말을 잘 못 들었나?
“교권 임마. 교권. 몰라?”
“아뇨. 그··· 아니에요.”
소네트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얘는 무슨 약이라도 먹었나, 말을 못 하네.
아무튼, 로뎀 교수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상황을 돌아보았다.
데울과 제레딘은 여전히 칼을 뽑아들고 대치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곱 명은 10미터쯤 떨어져 아주 흥미로운 대결을 관람하고 있었다.
문제아 1번부터 10번이 모여 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싸움 싫어하는 놈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싸우지 말라면 싸우지 말아야지. 폭력주의자 놈들.’
나는 되도록 비폭력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절대로, 저 놈들 싸우는 걸 보니 상대가 쫌 빡세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약해졌기로소니 고작 저 핏덩어리들을 못 이기겠는가.
어른 된 도리로서 굳이 이겨먹을 필요가 없는 것 뿐이다.
게다가 싸우지 말라니까 뭐 어쩌겠는가!
교수님 말 들어야지.
곧, 로뎀의 말이 이어졌다.
“말릴 생각 없는데요? 재밌어서 가까이서 보려구요. 마저 해 보세요. 마저 싸우시고 저기 실베니아 양이랑 2차전도 하셔야죠.”
이 미친년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