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네가 있어 소중했던 시간들
사람들의 함성이 무색하게 환호성을 뚫고 나오는 도경의 노랫소리.
예상치 못한 도경의 등장.
그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술렁이다가 지르던 소리도 이내 멈추고선 그의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게 선물이었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관중을 바라보는 도경의 모습이 전광판으로 잡혔다.
붉은 머리를 넘긴 채로 깔끔한 모습을 한 도경이 환한 빛 사이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은 홀리듯 그를 바라보았고 심사위원들 모두 놀란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도경을 보았다.
“저게, 박도경이라고?”
“어, 어...”
“놀랍네요.”
여태 보아왔던 모습과 다른 도경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임팩트 있게 다가온 것이다. 도경과 같은 한 식구가 된 박진용도 놀랐는데 주변에 있던 심사위원들이야 오죽할까.
음악적인 소양뿐만이 아니라 도경의 숨겨져 왔던 또 다른 면모에 모두가 도경의 모습을 감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터벅터벅.
‘반짝이는 보석 같다.’
자신의 근처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오는 도경을 직접 보는 성준이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무대 위 하얗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생기를 발하는 도경.
새 하얀 빛을 받아들여 자신의 광채인 것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발하는 도경에게 감탄밖에 안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지?’
무대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런 큰 무대가 처음일 것이 분명할 텐데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도경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네가 있어 따스했던 순간들 내 맘속에서
살아 숨 쉬어]
그리고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도경의 노래.
그냥 툭 내뱉는데 사람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도경의 목소리는 이제는 마성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도경의 노래에 가슴 아린 감정을 맛보고 있을 때. 한 사람만은 도경이 발휘하는 힘에 감탄과 희열로 물들어 있었다.
“무대에서 더욱 완벽해지는구나!”
무대를 바라보는 박진용은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도경에게 짜릿한 전율을 맛보고 있었다.
스튜디오실에서 도경의 녹은 된 음원을 들었기에 익히 아는 노래였음에도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가 더욱 좋으니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은 사람들 앞에 서야 해.”
무대라는 곳에 진열되어 있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보석.
박진용은 도경이라는 존재가 무대 위에 서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를 애써 증명하지 않는다. 도경은 그저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빛을 발하며 사람들을 홀릴 뿐이다.
그것이 무대 위에 도경이라는 사람의 존재감이었다.
“하하하. 저 녀석이 내 회사의 아티스트라는 거지.”
무대를 감상해야 하는데 자신의 수중에 보물을 가진 기쁨에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박진용은 헤벌쭉 웃으며 도경을 보았다.
‘정말 운이 좋았어.’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건 도경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다.
아니. 보람정도를 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도경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 보배와도 같은 인재가 제 발로 자신의 회사에 찾아와 줬으니 말이다.
박진용은 이번 연도의 자신의 운은 분명 도경을 가지는데 다 소모했을 거라 확신했다.
[네게 하지 못한 말
사랑해.]
“히야~.”
저릿저릿.
박진용의 딴생각이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도경의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아리게 만들기 시작한다.
저 사랑해라는 도경의 한마디에 가슴이 너무나 저릿하고 욱신거려 박진용은 그만 두 눈이 질끈 하고 감아 버렸다.
스르륵.
잡생각은 이내 사라지고 도경의 노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만큼 저 사랑해란 단어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많은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기이잉.
한 소절 끝내고 무대 중앙에 선 도경은 자신의 앞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앞의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한다.
‘왔구나.’
어둠 속 멀리 놓여 있었지만, 현재 도경의 예민할 때로 예민해진 감각은 한 인물을 찾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행이에요. 아저씨.’
배시시.
도경의 얼굴에 정말로 다행이라는 미소가 지어졌다.
전의 폐인 같았던 모습과는 달리 깔끔한 복색으로 바뀌어있었지만, 도경은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조상현]
광화문 거리에서 만난 인연이자 [소중한 시간들]이라는 노래의 탄생하는 계기를 준 장본인.
그 당시 나쁜 마음을 먹었던 중년인인 조상현이었다.
하지만 조상현을 위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던 도경의 행동이 그의 나쁜 선택을 막은 것 같았다.
도경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저 자리에 서 있는 게 그 증거였다.
힐끔.
‘아내 분하고 같이 왔구나.’
조상현의 옆에 앉아있던 여성을 본 도경은 그녀가 조상현의 아내인 것을 알았다.
펑퍼진 함 옷으로 숨겼지만, 뼈밖에 남아있지 않는 앙상한 몸.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안색에 눈에 생기가 없다.
마음이 병이 든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기이잉
도경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흔히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도경은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껌껌한 어둠.
아무런 희망 한 점 없는 짙은 절망이란 어둠이 펼쳐진다.
욱신욱신.
자식을 잃은 엄마로서의 상상 못 할 슬픔과 절망이 느껴지자 도경은 가슴 한편이 강하게 욱신거렸다.
하지만 도경은 그녀의 마음에 빛이 있을 거라 믿었다.
‘분명 있을 거야.’
저런 절망과 슬픔이 괜히 생길 리 없다. 도경은 그녀의 짙은 어둠을 헤엄치며 희망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두근.
도경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을까 그녀의 어둠 속에 작고 연약한 빛이 감지되었다.
미약하지만 그 빛에는 따스한 온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느낀 도경은 그녀의 마음을 자신의 가슴에 투영시켰다.
이 노래를 태어나게 해준 조상현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슈우욱.
도경이란 도화지에게 그녀의 감정이 서서히 덮씌워 지기 시작한다.
‘당신들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소중했던 시간들]
이 노래를 만든 계기를 준 당사자들을 위로하지 못한다면 이 노래를 만든 보람이 없지 않은가.
도경은 조심스레 자신의 이능을 일깨운다.
‘천천히 부드럽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 위로하기 위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도경은 천천히 부드럽게 힘을 풀어나간다.
후으읍.
[시린 눈물 속에
녹여 주었던 네 마음을
너보다 아픈 누군가를
안아주었던 따스함을 가르쳐준 너]
“어?”
“누구지?”
도경의 노랫소리에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해 맑게 웃고 있는 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다.
불안에 떨고 있던 부모를 달래고 울고 있던 친구를 달래가며 안아주었던 착하고 착한 소년.
스르륵.
노랫소리로 누군가 떠오른다니 거짓말 같은 말이지만 정말로 도경의 노래를 들은 모두는 그러한 소년을 떠올렸다.
“상덕이... 상덕이야?”
“여, 여보?”
모두 낯선 소년을 떠올리고 있을 때.
조상현의 아내 김현아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도경의 노래를 들으며 울고 있던 조상현은 깜짝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했던 아내의 눈에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난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있단 걸.]
“...!”
도경의 말.
그의 노랫소리가 전하는 말에 김현아는 놀란 눈으로 도경의 얼굴을 보며 이내 눈동자를 쉴 새 없이 떨기 시작했다.
도경이 불렀던 노래가 드디어 그녀의 귓가에 닿은 것이다.
[네가 있어 소중했던 시간들
너는 내게 선물이었어
네가 있어 따스했던 순간들
내 맘속에 살아 숨 쉬어]
뒤늦게 이해한 도경의 노래에 김현아의 코끝이 찡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한다.
도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아들이 살아 있었던 시간들이 전부 선물같이 소중했고 그녀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게 나는 네 엄마인걸.’
세상에 나와 자신의 손을 잡던 그 작은 따스한 손길도, 당근과 피망이 싫다며 결국 울음보를 터트렸던 어이없던 기억도, 밤늦게 퇴근한 자신의 남편이 사 온 아이스크림 하나에 함박웃음을 짓던 아들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지금 와서는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기억이 없었다.
[내게 하지 못한 말]
자신의 가슴속에 남겨진 자식을 떠올리고 있을 때. 도경의 아련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리며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사랑해.]
주륵.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했다.
사랑이란 말은 그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였던 것뿐이었다.
그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표현도 상관이 없었다.
(네가 이세상의 전부야.)
(네가 있어 행복해.)
(우리 아들 최고야)
(기특한 아들.)
(건강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정말로 못다한 말이 많았다.
주르륵.
“흑흑흑. 아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왜 좀 더 많은 말들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슬픔에 김현아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자식에게 사과하였다.
[하고 싶은 것들
많이 있었겠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미래가 온다. 믿었었지.]
그녀의 사과처럼 도경은 미안함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한 소년을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모두를 위한 노래도 도경을 위한 노래도 아니었다.
이름 모를 소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두 부부를 위로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래였다.
그 둘의 마음을 대신해 노래하는 것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대체 무슨 감정을 지녀야 저런 노래를 불러야 저렇게 부를 수 있는 거야?’
바로 옆에서 코러스를 넣으며 도경의 노래를 모두 들은 성준의 두 눈은 이미 촉촉해져 있었다. 이제 곧 도경과 함께 듀엣으로 열창을 해야 하는데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추슬러보려고 했건만 소용없다.
[이루고 싶었던 꿈을 얘기했었지.]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자꾸만 자신 또래의 소년이 웃는 모습의 잔상에 성준은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대체 누구니?’
마치 자신의 친구처럼 다가와 웃음 지으며 자신에게 자기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낯선 소년.
‘누구기에 왜 이리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거야?’
도경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소년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한없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치잇.”
꾸욱.
친구같이 친근한 소년이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에 안타까움과 분함에 눈물이 나려는 것을 성준은 간신히 참았다.
슬퍼하는 것도 좋지만 이 무대를 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망친다면 그 소년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네가 있어 행복했던 시간들
다시 내게 허락한다면]
점점 줄어드는 음악 소리.
도경의 섬세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노래의 감정선을 이끌며 클라이맥스로 다가선다. 동시에 옆에 있던 성준과 눈을 마주쳐 왔다.
[지난날의 행복했던 추억을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준비됐어?’
끄덕.
‘됐어요.’
“후으으읍!”
마음을 추스린 성준은 도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몸속 안으로 공기를 받아들인다.
콰쾅!
그와 함께 조용히 고조되었던 노래의 선율들이 절정을 맞이하며 다채로운 소리들로 폭발하며 무대를 올렸고 그 위에 성준의 고음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 하늘 높이 분출하였다.
[네가 있어~! 소중했던 시간들
너는 내게 선물 이었어.] -성준&도경
“.....!”
성준의 물기어린 고음과 그를 부드럽게 감싸 공명시키는 도경의 노랫소리의 향연에 사람들 모두 말 못할 감동을 맛보았다.
[네가 있어 따스했던 순간들
내 맘 속에 살아 숨 쉬어 ] -도경&성준
우우우웅!
도경과 성준의 외치는 풍부한 음색이 담긴 목소리가 무대를 넘어 공연장 전체를 가득 채우며 사람들을 감싸았다.
“아아..!”
자신들을 감싸는 기이한 공명에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는다.
흐릿했던 소년의 얼굴이 선명함을 되찾으며 뚜렷한 인상으로 그들의 뇌리로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은 순박한 인상의 고등학생.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한 그 학생은 모두를 향해 웃음 짓고 있었다.
[내게 하지 못한 말]
시큰.
바보처럼 웃는 맑디맑은 웃음에 모두들 진한 슬픔을 맛보았는데 왜 저 웃음이 그렇게나 슬프게 느껴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랑해.] -도경&성준
애잔함을 넘어서 말로 형용 못 하는 슬픔에 모두 정신이 팔리고 있을 때. 도경과 성준의 마지막 속삭임에 노래는 끝을 고한다.
“후우~.”
“.......”
노래를 끝마친 도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물들였던 슬픔들의 감정을 하나둘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노래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내뱉었다.
이 이상 이러한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좋지 못했다.
‘이제는 그만 슬퍼하세요.’
감정을 털어낸 도경은 자신의 남편을 끌어안으며 울고 있는 김아현을 바라보며 이 노래가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길 희망하였다.
남겨진 사람으로서 일평생을 슬퍼하는 것은 떠난 이들로서는 원치 않을 것이리라.
도경은 그리 믿었다.
“휴. 힘들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온전히 남을 위한 노래.
도경은 짧은 한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표현했지만, 그의 노래를 들은 수천의 관중들은 환호하는 것도 잊고 도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이 어색한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희망인 MC조차 넋을 놓고 있을 정도였으니 도경이 보인 무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