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XX체육관
“여기인가?”
겉은 허름한 공장처럼 보이지만 공 튕기는 소리에 체육관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바라보며 도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육관에 들려오는 수많은 농구공이 퉁기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한국에도 농구가 인기가 많은 가보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웬 농구래?”
[한 사람 비었는데 농구 한게임 하게 나와.]
다짜고짜 전화 와서 농구하자는 박진용의 막무가내의 요구에 어이가 없었지만,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어 나오긴 했는데 지금 장소를 둘러보자 묘한 느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데 차들이 왜 이리 많아? 조금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이곳에 자신을 불러낼 때 초조해 보였던 박진용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자신의 방송 스케줄을 묻거나, 농구를 어느 정도 했는지를 묻는 그의 이상한 언행이 지금 신경 쓰였다.
마치 호구조사에 가까웠던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점점 꺼림칙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어!? [라수]에 박도경 씨 아니세요?”
“아, 네 맞는데요?”
“반갑습니다.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예, 어딜?”
갑자기 한 여성이 도경을 알아보더니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끌고 간다.
그에 도경은 당황했지만 그리 싫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을 이끌고 가는 여성이 꽤나 귀여운 스타일이어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어우, 몰랐는데 한국여자도 꽤나 적극적이구나.’
“아. 벌써부터 이놈의 매력이란... 저기요.”
“네?”
“그 쪽분이 마음에 들지만 제가 사장님하고 3년간은 연애를 안 한다고 약속해서요.”
“!?”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은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진 도경으로서는 지금 상황은 바가워야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데뷔를 한 이상 아무나 막 즐길 수 없는 몸이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
도경은 자신의 매력에 홀딱 빠진 이 어린양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도록 부드럽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저기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런 자존심이 상했나?’
“하하하. 정말 죄송해요.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럼 이만...!”
덥석.
황당한 표정을 짓는 여성을 보며 도경은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생각했다.
자존심에 상처 난 여성은 무엇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이유에서였다.
“박도경 씨! 촬영 장소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거든요? 그리고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참고로 그쪽도 제 타입 아니거든요?”
“네? 촬영 장소요?”
“응!?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분명 박진용씨하고 이야기 다 됐다고 하셨는데...?”
“뭐라구요?”
부들부들.
‘이, 인간이...!’
자신의 찜찜했던 감각의 정체를 파악한 도경은 박진용을 향해 이를 갈았지만, 도경의 앞의 있던 여성은 자꾸만 시간을 끄는 도경이 갑갑할 뿐이었다.
“시간 없어요.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아... 잠깐만요. 우선 사장님에게 통화부터 좀 하고...!”
“바로 코앞에 있는데 무슨 통화에요. 빨리 오세요. 이래서 신인이란...”
“아아, 잠깐만요. 이거 뭔가 오해가...”
질질질!
[스트릿 예체능]은 한시가 시급한 상황인데 시간을 끌고 있는 도경을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
드르륵.
“박도경 씨. 오셨습니다!”
휘익!
도경을 체육관으로 이끌고 온 그녀의 말에 모두가 문 앞에 서 있는 도경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제작진들과 뒤로 농구연습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연예인들 시선에 도경은 무언가 잘못 돼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장님은 어디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도경은 서둘러 자신을 이곳에 부른 당사자를 찾았다.
퉁! 퉁!
“하하하! 도경이 왔구나!”
“네... 사장님”
해맑게 웃으며 농구공을 튕기고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박진용의 모습에 울컥한 도경은 당장이라도 이 상황에 대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러긴 힘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도경이 네가 외국에서 농구 좀 했다며? 그래서 사장인 내가 힘 좀 써봤지. [스트릿 예체능]이라고 알지?”
“네. 차도한 매니저님에게 운동하는 예능프로그램이 들어 봤어요. 사장님도 현재 출연 중이시라고요.”
“그래그래. 센터가 비었는데 도경이 너 한번 테스트받아보라고 불렀어.”
빠득.
분명 자신의 성격상 이런 귀찮은 예능은 하지 않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저리 으스대며 한건 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사람을 낚다니 절로 이가 갈렸다.
둘이서는 분명 거절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경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다.
‘그걸 노리고 안 알려준게 분명해.’
[스트릿 예체능]과 연예인 농구팀 모두 지켜 보고 있는 곳에 와놓고 방송 출연을 그냥 고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충하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겉과 속이 다른 대답을 하는 도경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예의를 갖춰 연예계 선배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선배님들 [JY]신인 아티스트 박도경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이렇게 도경의 갑작스러운 [센터] 포지션의 입단 테스트가 시작 되었다.
한편 그런 도경을 째진 눈으로 바라보는 통통한 얼굴의 한 남자가 옆에 있는 박진용을 향해 물었다.
“마! 저거 네 말과 달리 얌전한데?”
“믿지 마. 저거 다 내숭이야. 속으로 나 욕하면서 지금 어떻게 하면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 굴리고 있을걸?”
“진용이 네가 사장인데? 신인이 그러겠나?”
“보통신인이 아니어서 말이야.”
“그래? 괜히 네가 이야기하니까 호기심 가네.”
예체능을 이끄는 MC 강원동의 물음에 박진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도경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웃으며 제작진과 농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간간히 자신에게 찌릿 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 말고 테스트받은 사람들이 앞에 3명이나 있었단 거죠?”
“그래. 그렇다고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오기 전에 다른 연예인 3명도 테스트를 받고 갔다는 사실에 도경은 어이가 없었다.
‘나, 아니어도 할 사람 많구먼 대체 왜 날 부른 거야?’
“도경 씨. 테스트 시작 10분 전입니다. 운동복 입고 준비해 주세요.”
“아? 운동복. 잠시만요.”
타다닥.
제작진의 말에 도경은 서둘러 박진용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장님!”
“응?”
“아! 안녕하십니까. 강원동 선배님. [JY]신인 아티스트 박도경이라고 합니다.”
박진용에게 여분의 운동복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도경은 그의 옆에 있는 인물을 알아보곤 서둘러 인사를 건네었다.
푸짐한 체격에 박진용 뒤에 앉아 있어 매니저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보니 익숙한 얼굴이다.
연예인들에 대해 잘 모르는 도경이라도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내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래. 잘 해보자.”
“넵.”
‘방송과 달리 되게 과묵하구나.’
“그래도 도경이 네가 밖에서는 예의를 차릴 줄 아는구나! 걱정했는데 제법이네.”
찌릿.
방송에서는 항상 하이텐션을 유지하며 시끄러웠던 강원동이 사실은 과묵한 사람이라는 게 의외였지만 도경은 우선 자신을 보고 깐족거리는 박진용에게 관심을 되돌렸다.
“그게 할 소립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하던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하하하! 미리 말하면 안 한다고 할 거 아니야.”
“알면서 왜 그랬어요?”
“야. 내 사정도 이해해줘라. 내가 명색이 소속사 사장인데 너한테 까였다고 해봐. 보기 참 좋겠다. 그리고 네가 먼저 농구 잘한다고 라디오 수다에 얘기했잖아? 그걸 보고 제작진이 너 불러 달라고 한 거니까 너 책임도 있다. 내가 예체능 팀에서 뛰고 있는데 제작진이 부탁하는 걸 어떻게 거절하겠어?”
“뭐... 그건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박진용의 사정을 듣자 도경은 납득이 가는 한편 그래도 자신이 낚인 것에 한탄을 했지만 박진용의 말에 이내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가 순순히 왔을까?”
“안 왔죠.”
“거봐.”
“으.......”
도경의 반응에 박진용은 거 보라는 듯이 바라보며 쓴 웃음 지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테스트만이라도 성실히 봐줘라.”
“테스트 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성실히 보는 건 좀...”
“응?”
“쳇...! 아니에요 우선 운동복이나 가져다주세요. 이러다 개념 없는 놈으로 찍히겠어요.”
“하하하! 도경이 많이 컸네. 개념도 생각하고 잠시만...”
뒤적뒤적.
박진용은 도경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배낭에서 여벌의 운동복을 꺼내 주었다.
“여기 네 머리색에 딱 어울린다.”
“요즘 깔 맞춤 촌스럽다 들었거든요?”
“인마. 운동복은 조금 촌스러운 게 멋이야. 참, 너 발사이즈는 몇이냐?”
“275요.”
붉은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상하의 세트인 운동복을 살피는 도경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마음에 드는지 이리저리 살피며 자신의 몸에 대보고 있었다.
“어 내 신발은 너무 큰데?”
“얼마나 차이 나는데요?”
“285. 다른 사람들 거 빌려줄까?”
“됐어요. 운동화 끈 조이면 별반 차이 안 나요.”
도경과 박진용의 대화를 빵을 먹으면서 듣고 있던 강원동은 흘끔 옆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 그 둘에게 툭 던졌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농구화에 도경은 강원동을 바라보았다.
“이거 써라.”
“아... 감사합니다.”
“그래. 고마우면 우리 방송 분량 좀 잘 뽑아봐라.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네...”
우물우물.
‘이 사람 조용하다 싶었더니 촬영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거구나.’
자신에게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린 강원동을 바라본 도경은 그의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강원동이 빵을 흡입하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에는 촬영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분주함이 서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국민 MC가 아니라는 건가?’
국민 MC 강원동.
전설적인 씨름선수에서 갑자기 은퇴 후 코미디언을 시작. 그리고 마지막엔 최고의 국민MC중 하나로 우뚝 올라선 대단한 존재.
그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재밌는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목격하니 더욱 독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빵 하나 줄까?”
“아, 아닙니다.”
우물우물.
“아까 말 얼추 들어보니까 예능팀 하기 싫어한 거 같던데 맞나?”
“네? 아... 혹시 신경에 거슬리셨어요?”
“괘 안타. 너보다 더 싸가지 없는 애들 수없이 봤다.”
‘그럼 안 괜찮은 거잖아...!’
“아, 제가 한국에 오래 떨어져 있다 와서 다시 해외로 나간다는 게 싫어서요. 듣기 안 좋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피식.
도경의 말에 강원동이 웃긴 놈을 본다는 눈빛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너 오기 전에 테스트받은 사람 중에 프로선수로 활동하다 은퇴한 사람도 있다. 아나?”
“아... 좀 전에 들었습니다.”
“......”
“......”
피식.
“여튼 테스트 봐야 하니 옷 갈아입고 온나. 촬영까지 별로 시간 안 남았다.”
“넵!”
심각한 분위기까지 안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경은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고 그의 등 뒤를 바라보던 남자 둘은 도경에 대해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한다.
“형이 보기에 어때?”
“쫄지도 않는다. 자 골 때리네.”
중간에 자극적인 말을 써서 겁을 줘 봤는데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깔끔히 사과하는 도경의 모습을 떠올리며 강원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신인이 자신한테 이 정도로 압박받으면서 싸가지 없다는 말까지 들으면 거의 공황상태에 빠질 텐데 도경은 한 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진용이 네 말대로 재밌는 아다.”
“그렇지? 눈여겨 봐둬. 올해 제일 핫하게 될 라이징 스타니까.”
“그건 봐야지.”
“두고 봐. 지금 아직 잘 모르고 있지만, 가요계를 다 엎을 녀석이니까.”
흘깃.
“많이 기대하나 봐?”
“기대 정도가 아니라 저 녀석이 뜰 거라 나는 100퍼센트 확신해.”
“......”
자기 자식이 칭찬받는 것처럼 신나하는 박진용을 보며 강원동은 박진용이 도경이란 신인을 많이 아끼는 것을 넘어 맹신하고 있다고 느꼈다.
‘상태 보니 위험한데? 또 쪽박 치려고 하나?’
요즘에 잔잔하더니 이번에 또 새로 병이 도진 듯하였다.
예전에도 물건을 찾았다면서 물불 안 가렸던 박진용을 옆에서 본 적 있던 강원동은 이번에는 도경이 그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이 들었다.
“뭐, 내 알바 아니지...”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강원동이 다년간 연예계를 겪으면서 깨달은 사실은 연예인 걱정만큼 쓸모없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성공을 하든 쪽박을 치든 그들만의 결과였고 그 결과는 어느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곳이 연예계란 마굴이었다.
‘근데 평범하지 않긴 했어.’
(아, 제가 한국에 오래 떨어져 있다 와서 다시 해외로 나간다는 게 싫어서요. 듣기 안 좋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도경과 대화중 강원동은 이 말을 듣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지가 붙을 거라고 생각 안 하면 웬만해선 그런 이야기는못 꺼내지.”
씨익.
요즘 신인 애들은 소속사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에 조심성이 많고 형식적이라 별로 재미없었는데 자기의 미래를 확신하는 패기를 보여준 도경의 모습은 오랜만에 신선했다.
“오오오!”
“몸 봐 대박이다.”
“운동하는 사람인가?”
“와...”
웅성웅성!
“음, 뭐꼬?”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강원동은 소란스러운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점마 가수시킬 거라 하지 않았나? 몸 끝내주게 좋네? [JY]에서 노래 안가르치고 운동만 시켰나?”
“어? 어...!? 그러게 대체 저건 뭘까...?”
박진용은 강원동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항상 빈둥거리면서 뒹굴뒹굴하는 도경이 저런 몸을 갖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