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대표실에 갑자기 난입한 도경을 보며 박명식이 말을 더듬었다.
“바,박도경? 여길 어떻게...?”
“안녕하세요. 대표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 그래요.”
평범한 인상과 달리 직접 뿜어져 나오는 도경의 박력과 강렬한 눈빛에 박명식은 자신도 모르게 압도당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까 뭐든지 할 수 있다는데 그 말 진짜입니까?”
“뭐, 뭐? 그리고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갑자기...!”
“작업실에 안 계셔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어차피 이곳에 있다는 거는 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일 텐데 당사자인 저와 직접 이야기 나누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고?”
풀썩.
도경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아 보였다.
“어디, 우선 사과부터 들어 볼까요?”
“....”
“이, 익...!”
도경의 행동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이크 누가 보겠어...!’
끼이익.
철컥.
도경 뒤에 있던 러블리 멤버를 맡고 있는 매니저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혹시나 이 상황을 지켜볼 눈이 있을까. 서둘러 대표실의 열려있는 문을 닫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외부에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과하라고?’
다리를 꼬고 도발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도경의 모습에 한우신은 이를 갈았다.
사과 한다고 박명식에게 큰 소리 쳤으나. 사실은 도경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구슬리며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이었던 그에게 있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과하라 말하는 도경의 요구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거나 다름없었다.
까닥까닥.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건방진 놈...!’
꼰 다리를 흔들며 자신을 응시하는 도경을 보며 한우신은 도저히 사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대충 넘기거나 거짓 사과를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도경의 행동이 너무나도 건방져서 자존심이 상해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피식.
‘애초에 사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도경의 이런 행동들은 한우신이 정말로 사과할 생각이 있나 떠본 거였지만 역시나 그의 얼굴엔 고뇌나 고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러시죠? 설마.. 선배님 사과하기 싫으신 건가요? 그럼 앨범에서 풋사랑 노래를 뺄까요? 그럼 다 해결되는데 말이에요.”
“우신아 그건 안 된다. 이미 뮤직비디오와 프로모션 영상까지 모두 홍보와 일정이 잡혀 있는 상태야. 빼면 곤란해져.”
도경의 말을 듣고 있던 박명식이 대경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저었다.
[러블리] 멤버들이 부른 풋사랑이란 노래의 반응이 좋은 것을 확인하고 회사에서 마지막이란 생각을 가지며 이번 3집 앨범에 수록곡에 2개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 그중 하나인 [풋사랑]을 빼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도경의 말대로 앨범에서 그 노래를 빼 버린다면 제작비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은 물론. 이번 [러블리]의 컴백에도 많은 혼선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씨익.
“어쩌죠? 대표님이 저리 말하는데 말입니다. 선배님.”
“우신아...!”
“크으으...”
대표도 한 몫 거든 상태에 도경은 더욱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우신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일단 사과부터 하시죠. 선배님. 우선 사과를 해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겠어요?”
사람의 본심과 역량을 알아보기 쉬운 방법들 중 하나가 그 상대방을 궁지에 모는 것이다.
앞에는 건방진 자신이, 뒤에는 도경에게 사과하며 이번 일을 책임지기를 원하는 대표가 지켜보는 궁지에 몰린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도경은 기대되었다.
“태어나서 사과 안 해보셨습니까? 사과가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그리 망설이십니까 선배님?”
까닥까닥.
울컥!
“너 감히 선배한테...!”
사과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계속해서 열 받게 하는 도경의 언행에 결국 한우신이 참지 못하고 터지고 말았다.
‘선배? 결국, 나이 가지고 들먹이는 건가?’
자신의 한 치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그의 반응에 도경은 실소를 지었다.
“선배요?”
“그래. 이 건방진 녀석아 감히 선배한테 어디서 배운 말본새야?”
“하...! 어쩜 이리 반전도 드라마도 없는 사람일까?”
“뭐?”
“당신같이 입만 털 줄 아는 사람들은 대체 왜 이리 자존심이 강한지 모르겠어.”
덥석!
“어억!?”
휙.
도경은 사나운 눈초리로 한우신을 향해 일어나서 그의 멱살을 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린 후.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에 집어 던졌다.
풀썩!
“윽!? 너 이 새끼 지금...!”
푹신한 소파에 대(大)자로 떨어져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한 한우신은 도경을 향해 따지려 들었다.
“아아. 어딜 일어나려고? 그냥 앉아 있어.”
콱!
“흐아아!”
자신의 소중한 곳을 발로 짓밟은 도경의 행동에 한우신은 본능적으로 요상한 비명을 질렀다.
꾸욱.
“속상해서 그랬다고?”
도경은 그를 짓밟은 발에 힘을 천천히 실으면서 한우신과 눈을 마주보며 나지막이 그가 여기서했던 말들을 읊조렸다.
“선배니까 다독이면 될 거라고? [러블리]들을 생각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개소리하고 앉아있네. 너...! 사실 그 애들에게 관심 없잖아?”
“윽!”
“무, 무서워... 대체 이 녀석 뭐야?”
덜덜덜.
마치 흉포한 맹수 한 마리가 자신의 눈앞에 풀어져 놓여 있는 기분을 받은 한우신은 몸을 떨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먹힐 것 같은 본능의 발현이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네가 [러블리] 애들에게 정말로 관심을 가졌다면 작곡가로서 그딴 곡을 주지 않았겠지.”
[러블리] 멤버들의 노래들이 사실은 회사 내의 전속작곡가의 손에 제작되었다 들었을 때 도경은 어처구니없어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2년을 같이 붙어있으면서 훌륭한 기량을 지닌 [러블리] 애들에게 그딴 형편없는 곡을 주었던 작곡가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직접 한우신을 마주하고 나니 도경은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이딴 놈이 작곡가라고...’
노래 부르는 이의 기량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줘야 할 작곡가가 오히려 기량을 억누르고 재능을 망치려 든다.
“네가 관심 가지는 건 오직 네 체면과 자신의 안위뿐이지... 너 같은 건 작곡가가 아니야.”
노래를 하는 입장의 사람으로서 도경은 한우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우우웅.
도경은 능력을 이용해 자신이 그에게 품은 감정의 일부를 개방하여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한우신의 머릿속에 벌레가 무참히 짓밟는 환영이 스쳐 지나간다
콰지직.
“아으...!”
마치 자신의 바닥에 짓뭉개져서 터지는 벌레가 된 것 같은 감각에 한우신은 말을 잇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러블리 애들에게서 그리고 이 회사에서 떨어져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으...”
나지막한 신음성만 흘리는 한신우를 보며 도경이 마지막으로 고하였다.
“그게 네가 [러블리]애들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야.”
“.......”
---
“둘이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우신 작곡가님 모시고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러블리 매니저는 도경에 의해서 넋 나간 한우신을 일으켜 세우며 대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대표실 밖을 나섰다.
철컥!
한바탕 소동이 휩쓸어간 자리.
도경과 박명식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으음...’
힐끔.
원래라면 대표인 자신이 도경의 눈치를 볼 일은 없어야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 갑은 도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조용히 도경을 바라보았다.
한우신에게 건들거렸던 것과 달리 몸의 자세를 바르게 피며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는 도경의 모습에 박명식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알 수가 없군.’
조금 전에 한 마리의 맹수 같이 거칠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묘한 분위기를 풍겨오는 도경을 보며 박명식은 도경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겉모습은 평범한 젊은 청년인데 분위기가 범상치 않단 말이야...’
옷 위로 느껴지는 탄탄한 몸매와 붉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유한 평범한 인상인 청년의 모습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자꾸만 도경에게서 노련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윽.
“죄송합니다. 대표님.”
“응?”
“대표님 사무실에 예의 없이 들이닥친 거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도경 씨에게 피해를 끼쳐서 죄송하지요.”
“그렇습니까.”
고개를 숙이면서도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도경의 깔끔하면서도 담백한 사과에 박명식은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도경 씨에게 피해를 끼쳐서 미안하지요.”
“그렇습니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직접 눈을 마주치는 도경의 눈빛에 박명식은 왜 자신이 도경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깨달았다.
‘저 눈 때문이구나.’
번쩍.
검은 진주처럼 영롱한 광채를 품은 도경의 눈빛에 박명식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그대로 투영되는 눈이야.’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도경의 두 눈은 그의 인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생기로 가득 찬 그 두 눈에서 도경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를 알려 왔기 때문이다.
“좋은 눈이군요.”
“네?”
“배우를 하기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요.”
박명식의 순수한 칭찬에 도경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연기자와 배우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속사 대표답게 자신에게서 배우의 재능을 찾는 그의 태도가 꽤 유쾌했다.
“하하하. 칭찬 감사해요. 그래도 저는 노래를 더 잘합니다.”
“그렇지요. 예전에 K스타에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설마 작곡하는 실력까지 그리 대단 할줄이야. [러블리] 애들에게 도경 씨가 카일이라고 들었을 때는 더 놀랐답니다.”
“그래요? 제가 좀 유능하지요?”
“네? 하하하하.”
뻔뻔하고 능글맞은데 의외로 밉지 않은 그 모습에 박명식이 처음으로 부담에서 벗어나 웃음을 터트렸다.
‘허례허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타입이구나. 그렇다면...’
잠깐의 대화를 나눴지만 슬슬 도경의 성격이 감을 잡은 박명식은 웃음 지으며 도경을 향해 말을 건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희가 어떻게 하면 이번 일에 대해서 도경 씨에게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저희가 최대한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씨익.
“화끈하시네요. 대표님. 저를 다룰 줄 아시는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피곤한 수 싸움을 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박명식을 보며 도경은 미소 지었다.
‘쓰레기 같은 작곡가를 써서 걱정했는데 이 사람은 그래도 대표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지금 박명식의 보인 행동 덕분에 도경은 자신의 마음이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한 회사의 대표가 자기보다 새카맣게 어린 도경을 향해 진중히 사과를 표하고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깍듯이 대하면서 성의를 보여 왔다.
한 회사의 대표 자리에 올라선 자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도경도 그를 향해 성의를 보여야 했다.
“우선. [러블리] 앨범의 노래는 건드릴 생각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되요. 그건 저도 원치 않거든요.”
“휴우. 그거 다행이군요.”
“다만, 제가 경솔하게 [러블리]의 작곡을 맡아서 제 소속사와 약조한 카일의 비밀을 지키지 못하여 저와 소속사의 신뢰 관계가 금 간 것에 대해선 [밀리언]소속사가 책임을 져주셔야 하겠습니다.”
도경의 논리정연한 말에 박명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해왔다. 도경이 내뱉은 말 어디에도 박명식이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회사의 무리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최대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혹 생각해둔 게 있으십니까?”
끄덕.
“네.”
‘역시. 무언가 생각해둔 바가 있었구나.’
도경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그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씨이익.
“그건...!”
자신에 대한 소속사와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과 동시에 [러블리]에게도 [밀리언] 소속사에게도 나쁘지 않는 조건을 지닌 자신의 명안을 떠올린 도경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지어졌다.
꿀꺽.
“그건?”
“선생님...”
티를 내려하지 않지만, 자신이 무슨 제안을 해올지 몰라 긴장이 역력한 박명식의 얼굴을 보며 도경은 결국 너털웃음을 지었고 대표실을 오면서 마주친 한 인물의 이름을 그에게 꺼내었다.
“...이재순 선생님을 원합니다.”
“네?”
자신의 말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박명식을 향해 도경은 자신이 생각한 제안을 그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
도경의 설명을 듣던 박명식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묘한 표정이 떠오르다 이내 그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지어진다.
긴장했던 박명식이 웃음이 나올 만큼. 도경이 제시한 제안은 [JY],[밀리언] 두 소속사에게 아주 좋은 명안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