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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128화 (128/357)

128화

[밀리언]엔터테인먼트

“...슬슬 나 올 때가 됐는데”

차도한은 굳은 표정으로 대표실 근처에 있는 대기실 앞에서 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혹시,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약속한 시간에 차도한이 집 앞으로 도경을 데리러 왔을 때. 도경은 이미 밀리언 기획사에 도착해 있었고 이에 차도한이 대경한 상태로 서둘러 밀리언 기획사에 왔을 때는 도경이 대표실에 쳐들어간 이후였다.

“설마 대표실까지 쳐들어갈 줄이야.”

도경의 이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일이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일. 도경이 경솔한 일을 하지 않기를 빌 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후우.”

“저희는 논의가 된 줄 알았는데 매니저님도 모르고 계셨군요.”

“알았다면 이곳에 절대 보내지 않았겠죠.”

“하하...하.....”

옆에서 차도한이 한숨을 쉬며 한기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을 보며 [러블리] 매니저 박현수가 그의 눈치를 살피었다.

‘이 사람도 만만치 않구나. 어떻게 둘이 다니지? 완전 성격이 달라 보이는데 말이야.’

그 연예인의 그 매니저라고 차도한 또한 한 성격 하는 것을 눈치챈 박현수는 식은땀을 흘리었다.

도경이 불이라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차도한 매니저는 얼음이었다.

“후우.”

“......”

‘너무 괴롭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 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기실의 문 앞을 지켜보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박현수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을 받아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화장실로 가는 척 하고 대기실 밖을 나왔다.

중얼.

“아아. 몸에 안 좋아... 집에 가고 싶다.”

뜨거운 도경과 싸늘한 차도한.

오늘 그 두 사람에 제대로 시달린 덕분에 박명식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박현수의 푸념을 듣고는 누군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고생이 많네.”

“그러게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화들짝.

“어!?”

‘이 목소리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시선을 뒤늦게 눈치 챈 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경 씨? 그리고 이재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꾸벅.

“그래요. 아까 마주쳤었지. 도경이를 통해 그 쪽이 주리 매니저인지 뒤늦게 알았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는가?”

“네, 네. 선생님 덕분에요. 주리가 선생님께 많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그 아이가 노력을 부단히도 한 거지.”

자신을 이렇게 고생시킨 붉은 머리의 천진난만한 청년과 그의 옆에 서있는 백발의 인자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에 박현수는 의아한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힐끔.

“저기에 차 매니저님이 와 계신 건가요?”

“네,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선생님! 저와 같이 들어가 주시죠. 제 매니저가 많이 무서운 사람이라 선생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허허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니에요. 선생님을 보면 분명 놀라 아무 말도 못 할걸요? 항상 차갑게 구는 사람인데 한번 놀려주자 구요. 분명 재밌는 경험이 될 거에요.”

“허허... 그래?”

도경의 장난기가 가득한 넉살에 이재순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차도한에 설명을 들으며 내심 재밌을 거 같아 도경의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 주기로 하였다.

‘대체 왜, 저 둘이 같이...?’

예상외로 격식 없이 어울리는 도경과 이재순의 모습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화기애애한 둘의 모습에 도경과 박명식 대표의 일이 나쁘지 않게 해결된 듯싶었다.

똑똑똑!

“차 매니저님 저 들어갈게요. 화내지 마세요.”

“제발 나잇값 좀 하십시오...!”

“이크! 화 많이 나셨구나. 하하하. 들어갈게요.”

도경은 차갑다 못해 서리가 내려앉는 차도한의 목소리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이재순을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선생님 지금..!”

“허허허.”

끼이익.

도경의 그 사인에 이재순은 웃음 지으며 문의 손 고리를 잡고 돌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뒤로 최대한 자신의 몸을 숨기는 노련함을 보이면서 말이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이재순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차도한은 문이 열리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제정신 이라니. 그거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인가? 허허...”

“누구? 아...!”

차도한은 보기 드물게 격정적으로 화를 내려 했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자신의 앞의 있는 노인이 누군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서, 선생님? 여길 어떻게...?”

“하하. 내가 장난 좀 쳤어요.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 낯이 익네요?”

“아...”

차도한은 그 답지 않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노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재순 선생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배우이자 방송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이재순].

한국이라는 나라에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이 생겼을 때부터 TV 화면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비치며 지금까지 드라마. 영화, 연극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현재 방송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오래된 거목(巨木)을 보며 경탄하듯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빈틈없는 자기관리와 연기에 대한 신념으로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이재순은 장르불문하고 많은 연예계 종사자들에게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형! 이재순 선생님은 정말 대단해! 내가 뭘 해도 연기에 흔들림이 전혀 없어. 진짜... 내가 맡은 배역이 너무 짧은 조연이라 아쉽다. 함께 더 연기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형 나도 언젠가는 이재순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될 거야!)

그러한 고목의 만남과 동시에 떠오르는 과거에 차도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재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예전에 대하드라마 [피의 눈물]에 현도의 역할을 맡았던 정용환의 매니저를 맡았던 차도한 이라고 합니다. 때는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역시나 어쩐지 낯이 있다 싶었어. 그런데 정용환의 예전 매니저라면...”

“네... 제가 그 매니저입니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배우로 충무로의 블루칩에서 현재에 와서는 대세 배우로 확정된 스타로 떠오른 정용환의 유명한 사건을 이재순이 모를 리가 없었다.

“후우... 정말 한평생을 뒹굴고 있지만, 이 바닥은 여전해.”

“......”

꾸욱.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유망한 배우를 착취하며 앞길을 막으려 했던 매니저를 눈앞에 보고 있는 이재순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적인 어조로 자신이 몸담은 세계를 비판했다.

그의 말에 차도한의 고개를 떨어뜨리며 티 나지 않게 안쪽 입술을 씹으며 밀려오는 씁쓸함을 달래었다.

자신이 이쪽 업계에서 어떻게 소문이 나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헛소문이 주변에 만연하니 말이야.”

“!?”

휙.

“...그 말씀은...?”

의외의 말이 담긴 음성에 차도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온아한 미소를 지으며 따스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재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 이는 가슴을 진정시킨 차도한은 이재순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라네. 자네 같은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를 리 없지 않은가.”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재순의 신뢰에 차도한이 자소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곤란하게도 이 노인네가 기억력 하나는 꽤 쓸 만하거든. 자네 그 약속 기억하나?”

“약속? 아...!”

“허... 지금 생각이 났나 보군.”

“그건...!”

꾸깃.

이재순의 말에 차도한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대로 자신은 한때 뭣도 모르고 저 거목을 향해서 한 가지의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용환이를 지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녀석을 꼭 이재순 배우님 같은 연기자로 키우겠습니다.)

이재순과 차도한.

두 사람은 모두 과거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허허허허.”

과거의 회한과 그리움이 섞인 심경이 복잡한 차도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재순이 웃음 지었다.

“어때? 나 같은 배우 만들기 쉽지 않지?”

“네...”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차도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굴을 들지 못했고 이재순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가며 대기실을 가득 채운다.

물끄러미.

“......”

‘이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여기선 그냥 조용히 있자.’

그저 잠깐의 장난에 차도한을 살짝 놀래주려 했던 거였는데 설마 이런 신파극이 펼쳐질 줄은 상상 못 했던 도경은 대기실 문밖에서 한참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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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안녕하십니까.”

벌떡!

“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JY엔터테인먼트] 대표실.

현재 박진용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와 이재순이 건네는 손을 붙잡아 인사를 올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쭈빗.

박진용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뒤에 있는 도경과 차도한에게 사정을 물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원로배우이자 연예계의 거성인 이재순이 난데없이 자신의 대표실을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헤헤헤. 사장님 제가 한 건 했습니다.”

“으응? 도경아 그게 무슨 말이니?”

‘저게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거야? 왜 선배님이 여길 찾아와?’

도경의 멱살을 붙잡고 속 시원히 외치고 싶었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이재순의 존재 때문에 박진용은 자신의 태도를 매우 조심스레 여기어야 했다.

“사장님 우선 이것부터 읽어 보시죠. 여기...!”

“그래. 도한아. 너라도 설명은 응? 협약?”

[JY & 밀리언 협약서]

노란 서류봉투에서 차도한이 건네는 흰색 종이들의 서류를 받아들인 박진용은 맨 앞에 적혀있는 제목을 읽고는 다음 페이지를 읽으려 했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을 멈추었다.

힐끔.

“저기...”

“아! 부담 없이 읽어요. 나는 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감사합니다.”

반쯤 서류를 넘기다 만 박진용을 보며 이재순은 그의 의도를 빠르게 이해하고는 앞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걸음을 옮기었다.

“선생님. 여기 생강차요. 목을 많이 사용하셔서 이거 드시면 좋으실 거예요.”

“음?”

도경은 대표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과와 음료를 내놓고 있었고 이재순은 도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도경은 이재순을 보며 웃음 지었다.

“헤헤헤. 제가 단독으로 사고를 많이 쳤잖아요. 눈치라도 봐서 이런 거라도 해야죠.”

도경이 손수 음료를 만들어 돌리는 이유는 정말로 그다웠지만 이재순은 도경의 다른 점에 신경을 썼다.

“흐음... 눈치라. 그나저나 내가 목을 사용한 건 어떻게 알았니?”

“헤헤. 제가 음에 민감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젠 연로하신데 오늘처럼 발성연습은 2시간은 넘기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목 조금 아프시죠? 계속해서 이렇게 연습하시면 나중에 탈나실 거예요.”

“그게...!”

“이게 정말입니까?”

“!?”

평소 매일 하던 발성 연습이 마음에 들지 않자 조금 무리를 했던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간파한 도경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은 이재순은 무언가 도경에게 더 물어보려 했지만, 뒤에 들려오는 소리에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정말로 이재순 선생님이 저희 [JY]에 1년간 주 1회 연기지도를 해주신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건 대박이다.’

[배우들의 무덤]

정용환 사건 덕분에 연기자들 사이에서 늪이라고 오명을 쓴 [JY]엔터테인먼트.

요즘이야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연기자 지망생이나 배우들 사이에선 [JY]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다.

“대신에 이번 저희의 실수로 도경이에게 빚진 것은 없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놀람도 잠시 기획사 대표로서 박진용의 계산은 빨랐다.

이재순이라는 대배우가 [JY]의 연기를 직접 지도하고 신경을 써준다?

지금 이 사실이 주변에만 퍼져 나간다면 배우들의 무덤이란 오명 따위는 금방 씻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만큼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이재순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파워는 막강했다.

‘후후후. 역시나 좋아하는군. 이걸로 나의 신뢰는...!’

“근데 한 가지 조건을 걸었으면 하네.”

“!?”

환희의 물들어있는 박진용을 보며 도경이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재순 쪽에서 무언가 조건을 걸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혹시 무슨 조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어려운 건 아니고 내가 그래도 나이도 있으니 힘이 부칠 때가 있을 수 있는데 내 일을 도와줄 조수를 붙여줬으면 하네.”

“아, 그거라면 야...”

“여기 도경이를 붙여줬으면 하네만.”

“네?”

“자, 잠깐 선생님.”

이재순의 예상치 못한 요구.

대표실에 있는 모두가 놀랐지만 이내 박진용은 빠르게 정신 차리고는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박진용의 머릿속 계산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부려 먹어 주십쇼. 그리고 된다면 인성교육도...!”

“사장님!”

“고맙네. 그럼 잘 부탁하이.”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상황에 도경의 얼굴에서 득의양양한 미소가 사라지고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축하드립니다. 중요한 직책을 맡으셨군요. 앞으로 주말도 회사에 나오셔야겠군요.”

“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차 매니저는 도경을 향해 속삭이며 고소를 지었고 도경은 울상을 지었다.

‘...망했어.’

‘후후. 오랜만에 재밌겠어.’

도경과 이재순 두 사람의 상반되는 생각이 서로의 머릿 속에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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