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JY엔터테인먼트.]
[연기연습실]
철컥.
“선생님 저 왔습니다...”
“아-!”
“....”
‘연습하고 계셨구나.’
프린트물을 가져온 도경은 은은한 조명 한가운데서 발성연습을 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그가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평생 연기 인생을 걸어왔음에도 저 지루한 훈련을 매일 2시간씩 하는 그의 공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노쇠한 몸이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파동은 파릇하다 못해 생기가 넘쳐난다. 상상이 되는가? 80년인 인생이 담긴 농후함에서 피어나오는 생기가 말이다.
‘대단해. 저런 게 숭고하다는 거겠지.’
전생에 30대에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도경에게 있어 이재순이 머무르고 있는 선상은 도경에게 있어 미지의 세계였다.
아무리 도경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재순처럼 세월이란 흐름을 겪고서도 저렇게 될지는 그 또한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주지만 많은 것도 앗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저 나이쯤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 지옥과도 같던 전쟁 속에 자신이 늙어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도경은 문득 자신이 80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떠올렸지만, 도저히 상상도 안 가는 미래에 이내 상념을 털어 버렸다.
‘정말 재미있는 것투성이야.’
문학과 예술이 극도로 발달 된 현대 사회는 정말로 도경에게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재순이나 박진용같이 한 분야에 특화된 예인을 만나고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척박했던 가르드 세계와 비교하면 도경에게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끼익.
“응?”
“아... 죄송해요.”
몰래 걸음을 옮기던 도경의 발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에 이재순은 발성을 멈추고 연습실을 찾아온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허. 뭐 죄송할 거라고? 오늘은 일찍 왔구나.”
“아아... 오늘 잠 좀 설쳐서 말이에요.”
단톡도 모자라 며칠 지나 소희와 함께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드림걸즈 떠올린 도경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정신없는 녀석들이었지...’
서운함을 표현하다가 이내 고맙다고 말하는 둥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신없는 녀석들이었다.
자신에게 툴툴거리다가 결국 놀 사람이 없다고 자신에게 찡찡거리며 놀아달라는 녀석들에게 ‘마피아’란 게임으로 온종일 시달린 자신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참! 고맙단 말을 해야겠구나.”
“네?”
“어제 명식이에게 이야기 들었다. 우리 [러블리] 애들 1위 한 거 말이다.”
“아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 아이들이 제 곡을 잘 불러줘서 고맙죠.”
보통이라면 장난을 치기 위해 으쓱거릴 테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도경은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입밖에 꺼내었다.
‘이 영감님은 내뱉는 말이 모두가 다 진심이란 말이야.’
도경이 이재순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내뱉는 말 모두가 하나같이 무게가 담겨있는 진심인 것을 느껴서였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붙이거나 하지 않는데도 이재순이 내뱉는 말에선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파동으로 감정을 느끼는 감각을 지닌 도경으로서는 이재순이 내뱉는 말에 와 닿는 무게는 더욱 심했다.
“허허허. 그래? 우리 러블리 애들이 그리 노래를 잘 했니?”
“네. 못 불렀다면 제가 곡을 주지 않았을 거예요. 제 생각엔 아이돌로 있기보단 나중에 아티스트로서 키워야 할 애들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명식이에게도 이야기해줘야겠어. 정말 대견한 애들이야.”
도경이 [러블리]들에게 하는 칭찬에 이재순이 웃음 지었고 이것을 목격한 도경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의외로 [러블리] 애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선생님이 아이돌을 좋아하다니 생각 못 했는데요?”
“허허허. 주리 연기를 가르쳐 주다 친해졌는데 심성이 나쁘지 않던 애들이더구나.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하지. 그리고 그 어린애들이 우리 소속사에서 음악 한다고 많이 고생해서 안 되기도 했고 말이야. 알다시피 이쪽과 달리 우리 소속사는 배우들에게 특화가 돼 있어 사실 마음이 불편했단다.”
“그렇군요. 저희 회사랑은 반대네요. 저희는 음악에 특화되어 있어서요. 연기는 전멸이라 서요.”
“허허허. 예전에는 이곳도 괜찮은 배우들도 있던 거로 알았는데 안타까운 일이지.”
“저도 얼핏 들었는데 그 예전에 사건으로 회사 내에서도 꽤나 심각했나 보더라고요. 사장님하고 임원들하고 사이가 엄청 험악했다고 들었어요.”
미국진출의 실패로 한 번 휘청였던 [JY]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쪽에만 한정 했던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다른 분야를 키우며 진정한 엔터테인먼트로 나아가려 했지만, 정용환의 사건 이후. 정용환을 따라 신인배우들의 이주와 배우지망생 확보의 어려움으로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원래라면 떠나가려던 배우들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아티스트들의 뜻을 존중해주려던 박진용의 신념 하에 [JY]는 소속된 배우들을 순순히 보내주었던 박진용의 선택에 그런 결과가 발생된 것이다.
당연히 회사 내에서 박진용의 운영방식에 말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사람 좋은 것도 어진 간이 해야지……. 이러니 다른 두 대형기획사와 비교당하며 손색 있다는 말을 듣는 거라고요.”
“허허. 그래도 나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박진용 사장을 존경한단다.”
“하긴, 뭐... 저도 싫지 않아요.”
피식.
‘그래서 이곳을 들어왔으니 말이야.’
사업가이면서도 손해를 보는 낭만파에 음악 바보인 박진용을 떠올리며 도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철저하게 사업가다운 수환을 가졌다면 [JY]는 [TG]와 [LSM]에 손색이 있다는 평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경은 이런 점이 좋아 [JY]를 선택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요즘 사회에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일부러 손해를 자초하는 바보사장이 마음에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호구면 어때?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이성적],[합리적],[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요즘 현대인이라면 도경을 가치관은 조금 철없이 보일 수 있었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은 게 도경의 인생관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도경은 이성과 합리보다 열혈바보인 마무에게서 꿈과 열정을 배웠고 오랜 전쟁터에서 이것저것 따지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해든 손색이든 그건 내가 책임지고 채우면 그만이야.’
물끄러미.
‘이번에도 무언가 생각하고 있나 보군.’
배우로서 굴러먹다 보면 상대방의 눈을 보면 그가 어떤 상태인지 감이 온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녀석이야.’
이재순은 도경이란 아이는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살피는 것이 습관인 이재순은 도경이 사실은 겉보기 언행과 달리 사색을 많이 하고 사람의 관찰하는 시야를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유쾌하게 말을 하지만 도경의 두 눈은 고요하고 차분하게 상대를 살피고 다녔기 때문이다.
‘타고났다...’
처음에는 자신을 요구한 당돌한 청년에 대한 호기심이었지만, 도경이란 젊은이에 대한 이질감을 느낀 순간부터는 호기심이 동한 이재순은 일부러 도경을 자신의 옆에 두었다.
그리고 관찰한 결과 도경의 다른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천성적으로 배우로서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어.’
도경을 보다 보면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언행으로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을 말이다.
뚜렷이 들리는 선명한 목소리와 효과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몸짓.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도경은 지니고 있었다.
“눈빛...!”
여과 없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도경의 눈동자는 본능적으로 그가 어떤 상태인지 무의식 선상 안에서 정보를 건네주었다.
배우로서 그만한 천성적으로 좋은 재능은 없다는 게 이재순의 생각이었다.
‘차 매니저가 분명 도경은 연기할 줄 안다고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리고 호기심은 조그마한 욕심으로 자라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재순은 도경의 연기 유무에 대해서 차 매니저에게 물어보았다.
(정보대로라면 연기를 배운 적은 없을 겁니다. 다만...)
(다만?)
(연기는 할 줄 알더군요.)
(할 줄 안다...?)
(그게...)
정진석 PD와 첫 만남에서 도경이 정진석 PD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연기했던 것을 떠올린 차도한은 이재순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었고 그 결과 도경에 대한 이재순의 욕심과 호기심이 한층 더 불타올랐다.
‘궁금해...’
차도한의 건네주는 정보에 이재순은 몸이 달아올랐다.
‘과연 어떤 연기를 할까?’
다름 아닌 도경의 연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재순은 도경의 연기를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연예계에 대선배라지만 [JY]소속도 아니고 무작정 도경에게 연기해보라 요구하는 것은 경우 없는 행동임을 알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위치에 선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이러한 부분은 더욱더 조심하고 경계한다고 생각하는 이재순은 도경과의 자신의 관계가 진전 될 때까지 자신의 욕망을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씨익.
하늘은 스스로 돋는 자를 돋는다 했던가?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재순은 운이 좋게도 도경의 연기를 확인할 기회를 얻었다.
그에 따라 이재순은 오랜만에 기대되는 미소를 지으며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허허허.”
“응?”
‘오늘따라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
홀로 웃음을 짓는 이재순을 보며 도경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후에 그가 웃음 지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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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꿈꾸는 소녀들의 사생활? 그 지금 촬영하고 있다는 [드림걸즈] 기획 예능 말하는 거예요?”
“그래.”
“지금 거기 저보고 출연해 달라고요?”
“어. 부탁할게”
“이모! 여기 꽃 등심 3인분 가져다주세요.”
“......”
바쁜 사람이 오랜만에 술자리 하자는 소리에 나왔더니 알고 보니 용건이 있는 자리였음을 알고는 괘씸한 느낌에 도경은 박진용을 향해 심통을 부렸다.
“야. 그러지 말고 한 번 나와 줘. 제작진이나 애들이 모두 너를 지목했다고.”
“저를 지목했다고요? 대체 뭘 하는데요?”
“별거 없고 너랑 애들이 상황극을 하는 거야..”
“상황극?”
연기에 연자도 모를 애들을 데리고 상황극이라니 도경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 이번에 이재순 선생님이 우리 기획사에 연기지도 해주잖아.”
“네.”
“드림걸즈 애들이 이재순 선생님께 상황극을 통해 연기지도를 받는 게 컨셉이긴 한데 말이야.”
“상대역을 정해야 하는데 애매하단 말이지.”
“아...”
도경의 표정을 본 박진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지만 걔네들이 너무 연기를 못하잖아.”
“음... 뭐, 춤 노래만 배운 애들인데 어쩔 수 없죠.”
“그래. 그래서 네 힘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나마 네가 애들하고 친해서 부담 없이 연기할 수 있는 상대가 너니까 말이야. 생각해봐 걔들한테 정극을 연기하는 상대방을 붙이면 어찌 될지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직 하네요.”
“그래 내말이...”
박진용이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중간부터 감을 잡은 도경은 그의 말을 상상하다 한숨을 쉬었다. 그 애들에게 정극을 하는 파트너를 붙인다면 방송이 이도 저도 아닌 노잼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에 도경은 장을 지질 수 있었다.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그 말은?”
“출연할게요. 남도 아니고 명색이 나한테 프로듀싱 받은 애들인데 도와줄 거 확실히 도와줘야죠.”
모르는 얼굴들도 아니고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은 애들인데 노잼의 길에 빠지는 것을 방치 할 순 없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도경아 고맙다. 고마워.”
“어휴. 그렇게 좋으세요? 아주 애지중지 하시네요.”
“요즘 드림걸즈 때문에 내가 회사에서 어깨 제대로 피는 거 모르냐? 내 감인데 걔들은 더욱더 뜰 거다. 그렇게 되면 아주 떵떵거려줄 테다!”
“참 내... 누가 들으면 회사에 사장님 적밖에 없는 줄 알겠어요.”
“임원들이 나에게 눈치를 얼마나 주는지 알면 네가 그런 말 못 할걸?”
“이 회사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하하하.”
박진용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도경은 앞에 있는 술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방송에 대해서 생각했다. 출연할 마음이 정해지자 드림걸즈 애들과 어떻게 상황극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흐음, 상황극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나?’
한 예능프로그램의 MC를 맡은 만큼 자연스레 예능에 걸맞는 몇 가지의 아이디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도경은 이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드림걸즈를 이용한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까닭이다.
탁!
“그게 좋겠어.”
“응?”
“형! 저한테 좋은 생각이 났는데 말이에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도경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박진용을 향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꺼내 들었고 이에 도경의 이야기를 듣던 박진용의 얼굴에 재밌겠다는 웃음이 지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