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드디어 오늘인가?”
1달 남짓이었지만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재순이 보낸 초대장 [임꺽정]의 시나리오.
천한 백정으로 태어나 혼란스러운 조선 시대에서 도적으로 활약하며 나라를 뒤집어엎을 뻔한 전무후무한 도적 임꺽정.
도경은 임꺽정이란 캐릭터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작업을 무한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은하수의 멤버들과 연락이 안 될 정도로 도경은 임꺽정이란 캐릭터에 깊이 빠져 있던 시간이었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잘 표현했지. 작가가 누구인지 몰라도 대단해.’
쉽게 말해 시나리오가 좋았다.
산도적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임꺽정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다룰 뿐만이 아니라 현대적인 입맛에 맞게 각색을 하는 젊은 감각까지 솔직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젊은 임꺽정이라...”
오리지널의 임꺽정을 비틀고 각색한 트렌디한 사극이었지만 임꺽정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상징과 뜻은 변질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화시켜 수많은 갈등과 억압 속에 임꺽정의 일갈 하나하나 빛을 품고 있는 작품이었다.
“다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요.”
“이런 자리는 일찍 가서 준비하는 게 좋으니까요.”
“하긴 차 매니저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시겠어요. 원래는 배우 담당 매니저 였죠?”
“...가시죠.”
‘이크! 실수했구나...’
이제 조금은 차도한 매니저와 친해졌다 생각해서 나온 실수였다.
도경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하필 그게 차도한의 민감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경은 이번에는 자신이 조금 무신경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냉정하고 차분한 성격의 차도한을 저 정도로 동요하게 만드는 과거 일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 오디션에 집중하자.”
차도한을 성격을 떠올린 도경은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내 오디션에 대해 집중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털어버렸다.
저벅저벅.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심한 동요를 보이는 차도한의 모습에 도경 또한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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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내가 어제 분명 말했잖아요. 오디션 전에는 커피가 아니라 차를 마신다고...!”
“미, 미안 나가서 내가 사 올게!”
“됐어!”
한 미청년이 매니저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그에게 집어 던지려다 주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화를 삭이며 그에게 커피를 건네었다.
“제발 매니저면 매니저답게 제대로 일해요.”
“으응.”
“젠장...! 오디션일 때 민감한 거 뻔히 알면서... 응!?”
움찔.
“.......”
짜증을 냈던 남자는 고개를 돌리며 거친 발걸음을 옮기다가 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도한이 형... 여긴 왜?”
“......”
“하긴 대답할 리 없나?”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차도한을 보며 청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녀석이 이번에 형이 키우는 배우야?”
자신의 뒤에 있는 도경에게 시선을 옮긴 그 눈빛에 차도한은 이내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도경을 소개 시켜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용환 배우님. 이쪽은 [JY]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 박도경이라고 합니다.”
“정말 형은 옛날과 변한 게 없구나. 꼭 그렇게 거리 두고 인사를 해야겠어? 근데... 박도경?”
자신에게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는 차도한의 모습에 대쪽 같은 성격은 여전하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도경이란 배우를 본 적이 없는 정용환은 살짝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적 없는데 신인배우인가 보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저기 용환아 배우가 아니라 요즘 예능에서 활약하는 신인이야..”
“예능? 배우가 아니였어?”
“응. 내가 알기로 배우출신이 아니야.”
옆에서 있던 매니저의 말에 용환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도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예능 하는 애가 연기오디션에 온 거야? 도한이형 이거 진짜야? 형이 지금 예능 하는 신인을 뒷바라지하고 있는 거야?”
도경을 보다 차도한을 향해 시선을 옮긴 정용환은 그를 향해 실망스러운 눈길을 보내었다.
“형! 이런 꼴 보려고 거기 남았던 거야?”
“......”
“하... 떨어질 때로 떨어졌구나.”
자신보다 나이는 배도 많을 그에게 쓴 말을 건네는 정용환을 차도한 뒤에서 보고 있던 도경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거, 재밌는 소리 하시네. 어이!”
“!?”
“어, 어이?”
“그래 너 말이야. 못 배워 처먹은 새끼야. 네가 뭔데 우리 차 매니저님한테 떨어졌다 뭐라 지껄여?”
“뭐, 뭐라고?”
갑자기 자신과 차도한 사이에 껴드는 도경을 보며 정용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은 자신이 지금 누구인지 모른다 말인가?
충무로 스타 [정용환]
충무로를 대표하는 20대 배우를 뽑으라고 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용환을 뽑을 것이다.
선하면서도 남성답게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훈훈한 비쥬얼로 연기에 지칠지 모르는 열의까지 지닌 그는 배우 중에 배우로 뽑히는 인물 이었다.
올해 개봉한 [추억살인]이란 영화에서 연쇄살인마로서 메소드 연기로 펼치며 이제 와서는 대한민국의 영화계를 이끌어갈 전도유망한 배우라는 찬사까지 듣고 있었다.
“왜? 내가 어렵게 말했나? 쉽게 말해줘? 내 매니저한테 친한 척하지 말란 말이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몰라 새끼야. 그럼 넌 내가 누군지 알아?”
“허...”
아무리 봐도 저 신인은 자신이 모르는 눈치였다.
이곳에 오디션을 본다는 것은 그래도 배우를 지망한다는 건데 자신에 대해 모르다니 정용환은 도경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완전 꼴통이네... 정말로 형이 맡는 연예인 맞아? 형 이런 애들 질색했잖아?”
“꼴통이라도...”
“응?”
“너보다는 낫다.”
“!?”
“푸하하하하!”
차도한이 설마 저런 말을 건넬 줄 몰랐기에 정용환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뒤에 이 상황을 다 보고 있던 도경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찌나 웃음소리가 컸는지 주변에서 그 둘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정용환 씨. 제가 맡은 연예인이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이쪽 생리를 잘 몰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안 엮었으면 좋겠군요.”
“형...”
시선을 의식한 차도한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가 조용히 내뱉는 말들은 모두 정용환을 향한 축객령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과의 표시로...”
뒤적뒤적.
“페퍼민트 차입니다. 오디션 잘 보시길...”
탁.
“.......”
자신의 손에 보온병을 쥐어준 그는 도경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용환은 말없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따스한 보온병을 멍하니 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체 이 치약 맛이 나는 걸 먹는지 이해 못 하겠단 말이야.)
(그냥 주는 데로 먹어. 너는 싫어할지 몰라도 이게 네 몸에 맞는 차야.)
(차라리. 한약을 먹이지그래?)
(네가 월급 올려주면 생각해 볼게.)
(헤헤. 잘 먹을 게 형.)
(어휴 진짜...)
“날 따라왔으면 저딴 일이 없었을 텐데 멍청하긴...!”
꾹.
따스한 온기를 지닌 보온병을 통해서 바라본 옛 기억 속 추억들이 가슴속을 헤집으며 복잡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개념없는 연예인에 그 매니저네 둘 다 건방져. 너한테 저런 뻣뻣한 태도라니 제정신들인가? 괜찮아 용환아? 그거 버릴 거지? 나한테 줘. 내가 몰래 어디다가 버리고 올게.”
“...시끄러워.”
“응?”
“시끄러우니까 제발 닥치라고요. 형은 제발 멋도 모르면서 지껄이지 말란 말이에요.”
쾅!
“요, 용환아...!”
“젠장!”
바닥에 보온병을 강하게 던진 정용환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며 머리를 식힐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곳에 있다가는 오늘 준비한 오디션에 지장이 올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다 짜증나...!’
---
“크크크!”
“..뭐가 그렇게 웃기십니까?”
“꼴통이라도... 너보다 낫다.‘”
계속해서 자신의 뒤에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도경에게 연유를 묻자 도경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좀 전에 차도한을 흉내 내었다.
“참내... 그게 그리 웃깁니까?”
“완전 웃기죠. 그럼 안 웃겨요? 무뚝뚝하게 한 마디도 안 하다가 갑자기 한 방 먹이다니 볼만했다니까요.”
“꼴통이라는 것은 인정하시나 보군요.”
“아! 맞다. 내가 왜 꼴통이에요?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쁘네...!”
“저도 다시 생각해보니 잘못 말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가 막 나가는 경우는 있어도 그 정도는 아니죠?”
도경의 말에 차도한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해준다.
“대책 없는 꼴통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뭐라고요?”
“연예계 선배한테 어이라니? 깡패도 아니고 진짜 제정신 인지 의심이 가더군요. 제 매니저 생활에 그런 경우 없는 연예인은 처음 봅니다. 그것도 설마 제가 맡은 연예인 일 줄이야...”
“헐.. 진짜 정 없다. 자기 매니저 지키고 싶은 연예인 마음도 몰라주나?”
차도한의 말에 도경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잔소리를 해올 줄이야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제 나이가 몇인데 보호를 받습니까?”
“쳇. 나이 많으셔서 좋겠네요.”
“그만 투덜거리고 오디션이나 잘 보실 생각만 하십시오.”
“네네. 걱정하지 마소서.”
“후...”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옆을 걷는 도경을 보며 차도한은 고개를 절레 젓는 한편 자신의 태도에 반성했다.
‘조금 흥분했어.’
생각해 보면 좀 더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이게 되었던 거 같았기 떄문이다. 자기가 저지른 사태를 제대로 파악 못 하는 도경도 문제였지만,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가져온 자신이 더욱 문제였다.
‘설마 용환이 녀석을 이곳에 만났을 줄이야... 그리고 조금 야위었던데? 제대로 몸 관리를 하고...!?’
흠칫.
2년 만에 본 정용환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한숨을 내뱉다 예전처럼 생각하는 자신의 행동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차도한은 미련스러운 자신을 향해 쓴 욕을 내뱉고 있을 때 도경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 아주 애틋하다 애틋해? 의외로 순정파라 이거야?’
자신에겐 항상 잔소리와 냉정함을 유지했던 차도한이 물렁물렁해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도경은 자기도 모르게 뭔가 짜증이 났다.
‘그 녀석이 말로만 듣던 정용환인가?’
그를 모르는 척 대했지만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차도한 매니저가 담당하고 키웠던 배우이자 [JY] 엔터테인먼트 배우와 연기지망생들을 떠나게 만든 장본인을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중얼.
차도한과 정용환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집을 수는 없었지만, 도경은 그 둘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원망하고 증오해 마지않을 관계여야 할 두 사람이 지금 보니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애틋함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마치 삼각관계 같잖아? 참나...’
자신의 매니저가 다른 연예인을 신경 쓰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도경은 지금 자신이 묘한 곳에 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로맨스 삼각관계라니 징그럽다. 징그러워...!”
중얼.
“그나저나 기타는 정말로 가져가실 겁니까?”
“네?”
“장기를 보여주는 것보다 그냥 연기로 승부를 보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임완식 감독님도 그런 부분에선 완고하신 분이시고...”
“쯧.”
차도한과 정용환의 관계 그리고 그 가운데에 껴있는 자신을 떠올리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차도한이 말을 걸어왔지만, 도경은 이제 서야 자신을 신경 쓰는 그의 태도가 묘하게 괘씸한 느낌에 그에게 까칠한 반응을 보였다.
“참나. 인제 와서 걱정하기는...! 늦었네요.”
“네? 그게 무슨...”
갑자기 새침데기처럼 구는 영문 모를 도경의 행동에 차도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경은 그 반응을 무시하고 정용환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분명 나랑 임꺽정의 배역을 가지고 오디션을 겨루겠지.’
흘깃.
“두고 봐요. 내가 다 뒤집을 테니까.”
“네!?”
자기의 옛 연예인에 미련 철철 넘치는 차도한 매니저를 보며 도경은 선전포고 하였고 도경의 선언을 들은 차도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도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연기로 뒤집어야지. 기타를 가져가서 뭐한다는 겁니까?”
쯧.
“거참...! 아까부터 계속 초 치시기는... 누가 연기 안 한데요? 이리도 자기 연예인을 몰라서야...!”
“네?”
차도한을 본 도경은 자신이 메고 있던 기타를 들어 올리며 으쓱거렸다.
“비즈니스입니다. 비즈니스!”
“예? 비즈니스요?”
“그래요. 비즈니스. 진짜 회사는 알라나 몰라?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지.”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비즈니스라니?”
오디션을 보러 와서 비즈니스라니?
도경의 너무나도 뜬금없는 소리에 차도한이 되묻지만 그는 더욱 알 수 없는 말로 대답한다.
“슬슬 제 노래도 들려줘야죠.”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요.”
‘대체 이 애는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도경의 말에 차도한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다만 도경이 오디션에서 사고만 안 쳤으면 하는 바람 하나만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도경 나름대로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휴. 자기가 관리하는 연예인한테 이렇게 관심이 없으니 한눈을 팔지.”
“.......”
‘애는 진짜 모르겠다...’
뒤끝이 긴 도경의 말에 더욱더 영문을 모를 차도한 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