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후우우웅!
[LAX]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하하하하.”
어이가 없다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저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정용환은 자신이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연예인이긴 했나 보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된 기분이야.”
항상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다가 각종수속들을 마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입국심사까지 혼자서 해낸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지경인 정용환. 아직 갈 길은 구만리인데 입국을 하는 데에만 하루 치의 피로도를 전부 쏟은 느낌이었다.
쿵.
“그나저나...! 택시를 어디에서 타는 거야?”
공항 출입구를 나와 주변을 살피면서 그는 불안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뱉는다.
낯선 곳에 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런 계약 없이 무작정 이곳을 찾은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도경이 그 녀석 말을 믿어도 되나 몰라...!”
꾸깆.
정용환의 손에 쥐어진 새하얀 종이 위로 영어로 적힌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 있었는데 그 출처는 다름 아닌 도경의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이 대책 없는 미국행을 온 이유는 믿을 수 없게도 도경이 건네준 조그마한 종이에 있었다.
“젠장! 진짜 그 녀석만큼 사람 휘두르는데 익숙한 놈은 그놈밖에 없을 거야.”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자신이 머무르는 숙소로 와서 염장을 질렀던 도경을 떠올리며 정용환은 이를 갈았다.
(하하하! 선배님. 미국 얼른 가셔야죠!)
(웃냐? 웃음이 나와? 누구 때문인데 생판 계획에도 없던 미국에 가게 생겼는데?)
(그러게 말했잖아요. 후회하실 거라고요. 흐흐. 그래도 상상해 봐요 나중에 해외 스타가 돼서 국위 선양하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에요. 나쁘지 않지 않아요?)
(미친 놈. 남의 일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네. 그게 쉬운 일이냐? 더군다나 말도 안 통하는 곳에 가서 연기자 활동을 내가 할 수나 있을 것 같아?)
(어라? 그 말은 연기는 하고 싶다는 거죠?)
(윽...!)
(하하하! 진짜 솔직하지 못하긴. 됐고 이거나 받아요.)
(이건?)
(출국 선물입니다.)
쪽지를 건네면서 뿌듯한 미소를 짓는 도경을 보면서 정용환은 확신했다.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던 게 확실해!’
술을 먹고 즉흥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이 정해져 있는 도경의 계획이었던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술을 먹이고, 동양인 배우가 나오는 미국드라마를 일부러 가져와 보여주면서 해외 진출을 꼬시더니 그것이 안 되니까 기자회견 끝날 시간에 난입해서 없던 미국행을 만들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터트렸다.
“능구렁이 같은 놈에게 제대로 당한 거지...!”
도경의 행동에 본래라면 화를 내야 했지만, 정용환은 도경의 화를 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게 도경이 떠밀어서 만들어준 상황에 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리고 그놈은 그것을 알았던 거고...!’
피식.
정용환이 도경에게 화를 내지 못한 이유.
[연기를 하고 싶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 마음 한 가지.
도경은 정용환의 그 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여기로 가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힐끔.
“기회라...”
쪽지 하나 달랑 주고 서프라이즈라면서 무슨 기회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던 도경을 떠올리며 정용환은 한숨지으며 손을 들어 올려 외쳤다.
“TA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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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벌리 힐스(Beverly Hills)]
“후~. 아직도 내가 베벌리힐스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는군.”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 넓게 펼쳐진 정원과 하늘을 둘러보며 입에서 연신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3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기에 이렇게 저택 밖을 나와 자신을 진정시키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아무리 매니저로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왔다고 하지만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담배피고 있었군요. 잘 잤나요?”
“아...”
벌떡.
흰 연기를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에게 누군가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켄드릭 씨.”
“좋은 아침입니다. MR 차.”
“하하하. 편하게 앉아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불편하게 한국어 안 하셔도 됩니다. 영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래도 도경의 친구들인데 그럴 수 없죠. 그나저나 제 한국어 어때요? 열심히 배웠는데 나중에 한국 가면 그 친구를 놀라게 해줄 생각이거든요.”
“지금도 훌륭하신 수준입니다. 발음이 조금 어색하지만 자주 사용하다 보면 금방 교정 될 겁니다.”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요.”
“......”
‘도경이 때문에 저 정도로 외국어를 공부하다니...’
자신의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켄드릭을 보는 차도한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한 사람을 위해서 생전 모르는 외국어를 저 정도로 수준급까지 익힌 것을 보면 웬만한 호감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응?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신기해서 말입니다. 켄드릭 우 씨가 제 눈앞에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하는 것도 말이죠.”
“아하하하. 알 것 같군요. 저도 이곳에 왔을 때 할리우드 배우들을 직접 눈으로 봤을 때 그런 느낌을 겪었었죠. 근데 결국 다 똑같은 사람이더군요.”
“그렇습니까...”
‘신기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닌데 말이지...’
켄드릭 우(37)
2년 전부터 급부상한 동양인 대만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으로 멀쩡하고 얌전하게 생긴 얼굴로 온갖 약 빠는 듯한 코미디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일약 인지도를 얻은 배우로 켄드릭 우.
조연으로 시작했던 코미디 영화 [The Wasted Time]에서 존재감을 알리면서 이름을 떨치더니 미국 드라마 [Community College]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이번에 150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으며 [Hot Fuzz]란 영화의 주연으로 계약을 맺는 등. 할리우드에서 이례적으로 동양 출신의 코미디 배우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 이었다.
아직 해외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이 도경을 위해서 한국어를 배웠다는 사실은 지금 봐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빚쟁이라더니... 도대체 둘이 무슨 관계일까?’
LA에 자신에게 빚진 게 있는 친구라며 미국에 머무를 때 많은 도움을 줄 거란 도경의 말에 찾은 이곳은 놀랍게도 부자들이 사는 [베벌리 힐스]였고 자신을 맞이한 도경의 친구란 작자는 미국에서 유명한 코미디 배우인 것에 놀랐던 차도한의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반가워요. 도경이 지인이라고? 그렇다면 내 지인이기도 하지. 편한 대로 머무르도록 해요.)
잘못 찾아왔나 싶어 한껏 움츠렸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도경’이란 이름에 화색을 지으며 따스하게 맞이해 준 켄드릭의 환대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도경과 켄드릭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켄드릭이 도경에게 가지고 있는 호의를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나저나 오늘이군요.”
“네?”
잠깐의 회상 속에 빠져있던 자신을 일깨우는 목소리에 차도한은 켄드릭을 바라보았다.
“그 정용환이란 불리는 배우 지망생 말입니다. 슬슬 올 시간 아닙니까?”
“아... 그렇겠지요. 아마 아침에 입국했을 테니까. 헤매지만 않는다면 점심시간 때쯤 오겠지요.”
“기대 되는군요. 집이 넓어 쓸쓸했는데 심심하지 않겠어요.”
“하하. 그렇게 재밌는 인물은 아닌데... 그나저나 정말 이런 곳을 무상으로 머물러도 됩니까?”
“그럼요. 남는 게 방인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어요.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쓰도록 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켄드릭 씨. 솔직히 막막했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신세 좀 지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켄드릭 말에 진심이 담긴 것을 느낀 차도한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솔직히 예의상 한 말이었지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차도한 이었다. 오히려 월세를 쥐여주면서도 어떻게든 이곳에 머물면 안 되냐며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 애원했어야 할 판이었다.
‘이곳만큼 좋은 여건이 없다.’
외국에 낯선 타지에서 치안 좋고 숙식까지 해결 가능 한 켄드릭의 집은 그야말로 차도한과 정용환이 일을 구하기에 완성 맞춤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지에서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켄드릭이란 같은 업계 관계자의 인연은 어떻게든 유지해야 했다.
‘이건 기회다.’
안정적인 거주지와 실시간으로 업계에 대한 정보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인맥.
대형기획사에서도 제공하기 힘든 것을 도경이 물어다 준 것이다.
‘이거라면 용환이 녀석도 계약하겠지.’
차도한은 도경에게서 이번에 겪은 정용환의 사건 전말을 들었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도경을 도왔는지, 은퇴를 선언할 때 얼마나 억울했을지 모두 알게 된 것이다.
덕분에 정용환을 용서할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그에게 다가갈 생각을 못 했다. 과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워할 것이 눈에 빤히 보인 까닭이다.
차도한은 그저 정용환의 미국행을 속으로나마 응원해야만 했다.
(사장님. 정용환 선배님 영어 하나도 못 하던데 이상한 곳에서 계약 맺다가 탈탈 털리는 거 아니에요?)
움찔.
(그러게 말이다. 미국진출이 쉬운 게 아닌데 말이다. 돈은 돈대로 잡아먹고 인종차별에 각종 사기꾼들 바글거리는 곳이 그쪽 업계라니까? 다들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다름없다니까.)
흠칫.
(아! 맞다. 사장님 미국에서 거하게 망한! 경험 있으셨죠? 역시 타지에서 성공하기는 험.난.한.가 보네요.)
(그럼 험.난.하.고말고!)
그런 차도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소악마가 그의 가슴속을 맹렬하게 분탕질 치기 시작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말 하나하나에 신경을 긁히는 기분에 차도한의 기분이 저조해져만 갔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정용환 선배님이 미국에서 연기 활동 할 수도 있지 않아요?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말대로 만에 하나 캐스팅되어서 일을 구하더라도 계약 맺을 때. 십중팔구! 통수 맞는 다에 손모가지 건다. 게네들 계약할 때 정말 독한 녀석들이거든. 영어 못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계약해줄 리 없지.)
(이런 너무 아깝네요. 그래도 정용환 선배님 연기는 진짜배기였는데 말이에요. 차라리 얌전히 있다가 타이밍 봐서 복귀하지 대체 왜 그런 미련한 미국행을 선택했는지...!)
(그러게 말이다. 네 말대로 아까워...!)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차도한의 마음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연기 말고는 무쓸모인 정용환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의 암담한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색이 굳은 상념에 빠진 차도한을 바라보며 박진용이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아깝지? 도한아?)
(...!)
드르륵!
스윽. 툭!
(사장님 이건...?)
(세상에 별은 많지만, 마음을 줄 수 있는 별은 딱 하나지.)
서랍장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차도한에게 내민 박진용은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라. 도한아. 가서 네 별(Star) 다시 찾아와라.)
(사장님...)
(Ha, Gay!!!)
(......)
(......)
박진용과 차도한이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무언가 깊은 감정의 교류를 주고받고 있을 때. 그들의 곁에 있던 도경으로부터 경박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표정을 굳히고는 도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는 자기들끼리 서로의 대화를 쾌속하게 나누기 시작했다.
(사장님 오늘 당장 도경 씨 매니저 관두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비자신청하고 여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도한아.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휙!
(그리고 도경이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에...!?)
여담이지만 도경은 박진용에게 끌려가 인성교육실에 갇혀 2시간 동안 성에 대한 고찰과 예절 교육으로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후부터는 게이라는 단어를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는다는 도경의 유명한 일화 하나가 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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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지금쯤 슬슬 서로들 만났겠지?”
떠들썩했던 가을이 지나가고 슬슬 싸늘해지는 계절.
도경은 골방 아니, 작업실이란 푯말이 붙어 있는 방안에서 창가를 열어 공기를 환기시키며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쯤 서로 만났을 두 사람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키득.
“진짜 두 갑갑이들 데리고 하드 캐리했다.”
LA에서 차도한과 재회할 정용환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 이가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만났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 할 것은 아닌 것을 알기에 더욱더 실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지금쯤 재미없는 성장 드라마 한편 찍고 있을 테지.”
분명 서로들 비운의 주인공 마냥 거리 두면서 갈팡질팡하겠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지에서 지들이 붙어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는가?
그 둘의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될 게 분명하다에 도경은 자신할 수 있었다.
똑똑똑!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작업실 문밖에 부쩍 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방문하는 손님이 누군지 아는 도경은 웃음 지으며 잠겨있던 문을 열며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다들 어서 와!”
벌컥!
우르르르.
“도경아 나 왔어. 근데 손님이 많네.”-[러블리] 하린
“아! 하린 씨. 안녕하세요. 노래 잘 들었어요. 오빠. 뭔데 불렀어요? 이상한 거 시키려고 부른 건 아니죠? 저 바쁜 사람이에요.”-[I] 이지원
“왜 부르셨는지 말입니까?”-[드림걸즈] 다연
“도경 오빠 여자만 부르다니 혹시...”-[드림걸즈] 채연
“오랜만이에요 오빠. 갑자기 소속사에서 연락 와서 놀랐는데 무슨 일이에요?”-[플라워즈] 김주희
5인 5색의 각각의 매력을 지닌 소녀들이 도경의 작업실을 방문하였고 도경은 웃으면서 그들을 반기며 군말 없이 자신의 용건을 꺼내 들었다.
“왜 불렀겠어. 곡 주려고 불렀지?”
“곡이요....!?”
“그래 너희들 싱글앨범하나씩 내자.”
도경의 발언에 소녀들이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모두를 놀래 킨 당사자인 도경은 한 남자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어떤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지금 나한테 남아도는 곡이 많거든. 어때 생각 있어?”
씨익.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