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One step. 별다를 거 없는 걸음.
똑같이 반복된 걸음.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지평선.
왜 이리 별다른 이유 없이 울적한 건지.]
‘저게 내가 아는 사람이 맞습니까?’
백아현이 보는 도경은 자신이 아는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여기 문제가 생겼는데...!)
(헤헤. 저기 부탁할 게 있는데...!)
(음. 알아봐 줘야 할 게 있는데...!)
(하하하! 또 사고 쳐버렸습니다...!)
머릿속에 자신이 아는 도경이 떠오른다.
해외에 나가 3년 동안 쉬지 않고 온갖 사건 사고를 쳤던 도경의 뒷바라지 했던 백아현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도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성보다 감정을 따르며 즉흥적으로 움직이며 사건사고를 치는 대책 없는 인물.
그것도 항상 대형 사고에 준하는 일들만 자신에게 물어 와서 그야말로 재해나 다름없는 존재가 도경이었다.
‘정말로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군요.’
그녀의 놀란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이미 자신의 세상 속에서 홀로 노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The truth is in your mind.
마침내 아니란 걸 알아.
이건 내 걸음이 아니란 걸 말이야.
누구와도 같은 걸음. 쳇바퀴 같은 걸음.
헤어 나올 수 없게 해.]
나른한 담배 연기처럼 흩날리는 몽롱함에 취한 도경의 목소리는 노래를 듣는 대상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잣말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노래로 듣는 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려 들었던 도경의 평소와 다른 노래나 다름없었다.
평상시와 에너지 넘치는 도경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마이너스한 감정을 담아 노래를 부르니 그 갭 차이는 이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바뀌는 거 아닙니까?’
‘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 걸까?’
그렇다고 도경의 노랫소리는 힘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도경의 부르는 노래가 만든 분위기에 모두들 빠르게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도경의 곁 가까이서 자신들의 파트들을 준비하고 있던 다연과 채연이 가장 먼저 노래에 취해버렸다.
까닥까닥.
둘은 어느새 도경이 자아내고 있는 분위기와 리듬에 몸을 맡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피식.
‘간만에 이런 노래도 좋은걸?’
듣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간만에 자신 개인의 감정에 푹 빠져 편하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곡에 도경은 만족스러웠다.
자신 안에 꾹 눌러 두고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오랜만에 꺼내는 것에 묘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쉬울지 알았지.
Every thing 세상 모든 것들이
TV 속에 주인공처럼 쉽게 해낼 줄 알았지.
그렇지만 이제는 한걸음 도 못 옮기지.]
사람들은 타인의 성공과 결과만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지금 도경이 부르고 있는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노래가사가 승승장구하며 성공하고 있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의 과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날의 일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Forgive me. Don’t Push me.
Don’t Judge me yeah 넌 모르지.
겁에 질려 한 걸음을 못 떼는 내 심정을 모르네.
But Hey, Hey. Hey.
I'm not going to let you know.]
하지만 도경은 자신의 무기력한 나날들을 설명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중얼거리는 혼자만의 넋두리로 남겨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게 이건 그런 노래니까 말이야.’
도경은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마 남지 않는 자신의 소절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도경의 감성이 담긴 노래는 더욱더 진해져만 간다.
[Yeah~.]
우우웅.
“!!?”
‘어이 어이! 선배님. 이거 리허설이지 말입니다...!’
‘음원으로 연습했는데도 너무 달라...!’
도경의 노랫소리에 흠뻑 빠져있던 다연과 채연은 곧 있으면 자신들의 순서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는 한탄하는 가운데 마음의 각오를 다져야 했다. 도경이 자아낸 헤어 나오기 힘든 이 무기력한 분위기를 자신들의 랩으로 타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힐끔.
‘할 수 있지?’
‘응.’
끄덕.
이미 드림걸즈에서 도경에게 혹독한 프로듀싱 받은 만큼 서로를 의지할 줄 아는 둘. 그녀들은 이런 상황일수록 수많은 연습을 함께한 서로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것을 알았다.
홀로는 도경이 만든 이 분위기를 이겨내기 힘들다고 생각했겠지만, 둘이 함께라면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까닥까닥.
‘셋 둘 하나! 먼저 들어갈게.’
휙!
[Yes. 현실이 어려운 걸 나도 알아.
부드러웠던 세상이 점점 딱딱해져만 가는 것을 느껴.
무덤덤히 내게 파고들어 오는 불안감. 소리소문없이 쌓이는 마일리지 Point.
But I kow. 그럴 때일수록 배짱 있는 한 걸음이 필요해]
먼저 타이밍을 치고 나오는 다연의 랩핑. 맹해 보였던 인상은 온데 군데 없이 그녀가 본연이 지니고 있는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랩이었다.
스윽.
발랄하고 깜찍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녀의 다연의 랩에 이어 채연이 마이크를 들어 올리며 두 번째 타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럽게 바로 연결되는 모습에 둘의 호흡이 얼마나 좋은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One Step. One Step. one step at a time.
나의 한 걸음이 내 세상을 바꿔.
한 걸음. 할 걸음. 세상이 한걸음에 흔들려가.
신경 쓰지 말고 내 길을 걸어가.]
드림걸즈 막내로 낯을 가리며 조용하기만 했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카메라를 주시하며 새침데기 숙녀처럼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도경의 노래에 박자를 타면서 깔끔한 랩을 구사하고 있는 채연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들 노력했구나.’
명색이 드림걸즈를 프로듀싱한 도경인데 그룹의 멤버인 두 소녀들의 성장을 눈치 못 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노래에도 기죽지 않고 자기들만의 끼와 매력을 발하는 도연과 채연 두 소녀를 바라보는 도경의 얼굴에 어느새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서로를 의지하며 힘을 모아 한 걸음을 내딛는 소녀들의 랩.
그것을 들은 도경은 자신의 앨범트랙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꺼울 따름이었다.
[Woo. One Step.
한걸음에 세상이 흔들려가~.]
두 소녀들의 랩에 호응하며 후렴을 부르는 도경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는데 각자의 매력을 지닌 두 소녀 가운데 은은한 미소를 짓는 도경의 모습은 묘하게 성숙해 보여 희한한 케미를 생성해 나갔다.
“......!”
처음으로 맞춰보는 합에도 불구하고 노래, 표정, 몸짓 모든 게 노래에 맞게 자연스럽게 어울려 나오는 세 사람의 느낌에 최정훈은 감탄하였다.
‘이거 리허설이고 뭐고 단박에 끝나겠는데?’
그리고 그런 최정훈의 예상대로 도경과 다연과 채연은 훌륭하게 완곡을 마침으로써 촬영은 단박에 원 테이크로 끝나고 말았다.
[CUT! 완벽하다 도경아. 그냥 이거 쓰도록 할게.]
“헉, 정말로요?”
“진짜로요?”
“하하!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괜찮았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정말 좋았어. 진짜 Live를 찍어 버렸어.”
도경의 웃음기 묻는 물음에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세 명의 라이브를 극찬하였고 그들을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언제 봐도 사람을 놀래키는 녀석이야.’
도경과 어린 소녀들의 조합이 내심 어울릴까? 걱정했었던 최정훈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음을 인정하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백아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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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소고기]
치이이-.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하며 미각을 만족시키는 장소인 고깃집에서 맹수들 마냥 고기를 집어먹 는 소녀들이 보였다.
우걱우걱!!
달그락! 달그락!
“이모 여기 꽃등심 3인분 추가요!”
치이이-!
“누가 보면 소속사에서 굶긴 줄 알겠다...”
촬영이 일찍 끝난 기념으로 스튜디오 근처의 소고깃집에 일행과 촬영 스태프를 데려간 도경은 자신의 앞에서 게걸스럽게 고기를 흡입하고 있는 소녀들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조그마한 몸으로 한 사람당 5인분을 넘게 고기를 먹은 소녀들의 존재가 믿기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걸 그룹이면 몸무게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먹어도 돼?”
“선배님. 맛있게 먹는 건 0칼로리라고 그랬습니다.”
“하... 누가 그런 개떡 같은 소리를 하니. 말도 안 되는...”
“소희 언니랑 정현 언니랑 하나 언니가 그랬어요.”
“맞아요! 그 언니들이 제일 많이 먹는데 살 하나도 안찌지 말입니다? 그래서 맛있게 먹는다는 말이 의외로 신빙성 있는 말인 것 같지 말입니다.”
“그래...? 그 녀석들이 말이지...!”
“저기... 오빠 그 고기 먹을 거예요?”
초롱초롱.
“...너 먹어.”
“네! 헤헤헤.”
‘채연이가 이렇게 식탐 많은 애가 아니었을 텐데...? 고것(?)들이 물을 다 흐려 놓았구나.’
뿌득.
도경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자신 쪽에 있는 고기로 숨 가삐 손가락을 놀리는 채연을 물끄러미 바라본 도경은 어쩌면 이 걸그룹의 위기는 근시일 내에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아하니 현실 도피하기 딱 좋은 개 논리 사상에 물들어있는 드림걸즈 애들이 한 둘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정신없이 행사와 각종 무대 활동 등 활동량이 괴랄 해서 살이 안 찌는 것이지 조금이라고 휴식기를 취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나중에 사장님에게 애들 몸무게랑 회사카드 내역 좀 체크해보라고 언질 해야겠군.’
자신이 프로듀싱한 걸 그룹이 체중조절 실패로 비웃음당할 것을 생각한 도경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경 써주는 것이었지만, 그의 이런 보살핌은 드림걸즈 애들에겐 난데없는 날벼락이 될게 분명했다.
와구와구!
그것을 모르는 다연과 채연은 최후의 만찬을 즐기느는 데 정신없지만 말이다.
복스럽게 먹는 두 소녀들을 뒤로하며 도경은 자신의 앞에 있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지글지글.
“그나저나 형 오늘로 라이브 영상은 다 촬영한 거죠.”
“응. 오늘 너희들 촬영한 영상 편집만 하면 다 끝난 거지. 이젠 네 거만 남았어.”
“후! 정말 생각 이상으로 정신없었네요.”
“그러네. 진짜 요 2주간 정신없었어.”
“미안해요. 형. 갑자기 일 맡겨서 많이 힘드셨죠?”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엔 나도 조금 힘들었어. 일하는 건 상관없는데 소속사 쪽에서 들들 볶아야지 말이야. 자신의 아티스트가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 못 하는 건 그래도 질릴 정도로 신경 쓰더라.”
“하하! 한잔 드실래요?”
“그래 한잔 주라. 오늘은 좀 한숨 돌려야겠어. 생색내도 돼?”
“하하하. 물론이죠. 형. 고생하셨어요.”
도경은 앞에 있는 맥주를 들이마시며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일상을 떠올렸다. 도경 자신이 벌린 일이었지만 정말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일이라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진짜 노래하나 부르게 하는 게 이렇게 힘들을 줄이야...!’
도경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형태로 싱글앨범의 발매를 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기획과 동시에 일정을 짜야 했고 그녀들의 소속사에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며 협의를 본 후 자신의 데뷔까지 2주일 안에 어떻게든 뮤직 영상을 만들었다.
“그래도 느낌이 좋아.”
“네? 뭐가요?”
도경이 힘들었던 여정을 회상하고 있을 때. 앞에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던 최정훈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느낌이 좋다고 말이야. 네 앨범들...!”
움찔.
“아...! 눈치 챘어요?”
“그래. 수 시간을 반복해서 듣고 편집하는데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네가 애들한테 준 곡들 원래 한 앨범 속에 있던 곡들이지?”
“네. 맞아요.”
“진짜 너도 대단하다. 네 데뷔까지 꼭 요란하게 해야겠냐?”
“하하하...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말이죠.”
순순히 수긍하는 도경을 보며 최정훈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획을 짠 도경을 보며 혀를 내두르며 도경을 못 말린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 있어?”
“네?”
최정훈 나름 신경 썼지만 세로 라이브 영상만 만들었다는 게 죄책감이 들을 만큼 하나같이 훌륭한 노래들이었다.
‘분명 히트 칠거야.’
하나같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티스트와 도경의 천재적인 작곡 능력과 프로듀싱 능력이 합쳐진 싱글 앨범들을 들으며 최정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기에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의 불안요소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경아. 네가 만든 노래와 경쟁하는 거잖아. 다른 노래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위험한 거잖아.”
“......”
말 그대로 도경 자기 자신 스스로가 강력한 적을 만든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 뛰어난 재능이 본인을 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최정훈은 도경에게 우려 섞인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피식.
도경은 최정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미소만을 지을 뿐이다.
“형.”
“응?”
“저 박도경이에요.”
“......”
짤막한 한마디.
그 짧은 한 마디 속에 신념과도 같은 굳건한 도경의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