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깜짝 뮤지컬이 끝나고 도경을 귀찮게 했던 아이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했다.
“비밀은 뭐라고?”
“죽기 전까지 엄수 언약입니다. 썰(Sir)!”
“그래그래. 그럼 제군들 좀 이따 보도록 하지. 재미있는 공연이 될 테니까 많은 기대를 하고 오도록.”
“썰. 옛썰-!”
아이들은 도경의 말에 사명감에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도경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조금 전 도경이 선보인 뮤지컬 노래에 매료된 아이들은 어느새 도경을 충실히 따르는 선원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가보도록.”
“썰!”
타다닥.
도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교회 밖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하엘 신부의 곁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모습을 보며 유이열과 정현동이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들의 미소엔 아이들의 밝고 순수한 모습에 대해 흐뭇함이 서려 있었다.
“어느새 저렇게 친해졌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내가 말 걸면 아는 척도 안 하던데. 쯧!”
“하하하. 뭐, 도경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나한테도 잘 안 오긴 하더라. 그나저나 애들 참 귀엽지 않아? 다들 씩씩하고 밝아서 보기가 좋아.”
“그러게요. 저도 애들이 생각보다 씩씩해서 좀 놀랐어요. 호스피스라길래 많이 기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 않더라고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거겠지. 게다가 여기 병원 분위기가 우리가 아는 칙칙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병원이랑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 그러니까 저렇게 웃을 여유가 있는 거겠지. 좋은 곳이야. 우리나라도 이런 곳이 많아져야 할텐데...!”
“음... 좋긴 한데 그래도 이곳에 안 오는 게 가장 좋겠죠.”
“그건 그렇지... 그래도 결국 사람은 언젠가는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하긴. 아프다면 이런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긴 하네요.”
“응...”
두 중년남성은 현실적인 고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쓸쓸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형 갑자기 우리 너무 우울해진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러게. 우리도 이젠 나이가 찼나 보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나눠도 이렇게 분위기가 처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에이. 형 힘냅시다. 100세 시대에 우리는 아직 반밖에 안 왔어요. 저 어린아이들도 웃으면서 힘내는데 다 큰 어른 둘이 청승 떨면 욕먹어요.”
“후후후. 현동이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어린 애들도 힘내는데 우리가 그래선 안 되겠지. 그나저나 우리야 생각할 시간이 있지만 저 아이들은...”
“하... 진짜 어쩔 땐 보면 하늘이 참 무심한 거 같아요. 저 어린 애들이 뭘 잘못했다고 벌써 데려가려는지. 저 나이 때는 한창 걱정 없이 마음껏 뛰놀아야 할 때인데 말인데... 너무 안됐어요.”
“맞아.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정말......”
창백하고 푸석한 피부. 그리고 앙상한 팔다리에 비해 붓기 있는 얼굴을 지닌 아이들의 상태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씩씩하게 웃고 떠들지만, 알록달록 밝은색 털모자를 쓰고 있지만, 그 모자 아래에는 독한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려 부끄러움에 민둥머리를 감추려는 아이들의 슬픈 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후...”
아픈 현실 속에서도 해맑게 웃었던 아이들의 미소가 머릿속에 자꾸만 아른거려서 두 사람은 결국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꾸 처지려는 기분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무거운 둘이었다.
[죽음]
애써 떠올리기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두 단어가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밝았던 미소는 고통으로 일그러질 것이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었던 몸은 움직이기 힘들어지며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가 힘들어질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음이란 마지막의 손님을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들이었다.
털썩.
“그러니까. 우리가 잘 해야죠.”
“응?”
“선배님. 악보 노트 좀 빌릴게요.”
“어, 어. 상관없다만 그런데 악보 노트는 왜?”
찌이익!
“선물하려고요.”
“응?”
아이들을 떠나보낸 도경은 유이열의 건반에 꽂혀있는 악보 노트를 들어 올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종이를 몇 장 뜯어내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볼펜 하나를 들고 노트에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분명 좋은 곳이지만...”
스슥.
사각사각.
영국 매기스 센터.
한국과 달리 아름다운 건축물로 환자들에게 안락함을 제공하고 모자라지도 않는 많은 병상 덕에 사람들이 양계장처럼 좁게 모이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많은 간병인과 의료진들이 있어 환자들은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모자라.’
좋은 곳. 하지만 도경은 그래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편안한 장소 안락한 장소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좋은 것은 분명했지만, 도경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너희들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물 하마...”
죽음이란 손님을 맞이해도 죽음이 아닌 머릿속에 생에 최고의 순간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순간. 도경은 그런 순간을 도경은 모두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사가각!
도경의 마음이 담겨있는 음(音).
듣는 이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울릴 멜로디.
그것이 현재 도경의 손을 통해 새하얀 오선지 위에 한땀 한땀 음표로 새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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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재밌겠다. 도경이 형 무슨 노래를 부르려나?”
“그 형 노래 엄청 잘 부른다.”
“응. 재밌는 오빠였어...”
“응응. 그리고 조금 잘 생겼을지도?”
“허허허.”
‘신기한 일이야.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녀석들이 마음을 열다니 말이야.’
신나서 자신의 손을 잡고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을 보며 노신부 미하엘은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속으로는 꽤 놀라는 중이었다.
유이열과 정현동은 아이들이 밝고 씩씩해서 도경하고 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팠던 이 아이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남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은 몸도 정신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망가트리고 마니까 말이야.’
병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기피 하게 된다.
사람의 온기를 바라면서도 사람들과 만나면 자신이 그들에게 부담이 되고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동등한 대상에서 한순간에 동정받고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속상하고 건강한 그들을 질투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멀쩡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그렇기에 병은 무서운 것이었다.
힐끔.
‘불쌍한 녀석들...’
진심으로 신나서 들떠있는 녀석들을 보며 미하엘 신부는 흡족한 만큼 서글픈 감정이 자신의 가슴 속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 나이 또래의 아픈 아이들은 정말 안타깝다.
어린 몸으로 병마를 견디는 것도, 자기 주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어린 나이 때부터 보고 자라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무리한다.
씩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그 조그마한 몸으로 아픈 고통을 참아내고 걱정을 끼치기 싫어 웃기 싫음에도 어른들 앞에 웃는다.
“차라리 떼를 쓰고 신경질을 부린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 신부님 무슨 말 하셨어요?”
“허허허. 아니란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고 착하다고 의젓하다고 대견해 하지만 미하엘 신부가 보기엔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후회를 남긴 채.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미하엘 신부의 머릿속에 한 소녀가 떠올랐다.
(신부님! 신부님! 언젠가 그때처럼 같이 공연 만들어서 모두 함께 노래해요.)
(허허. 그러자꾸나. 이 신부님이 한 번 힘 써볼 테니 기대하거라.)
(헤헤헤. 고마워요. 하암~. 이젠 슬슬 잠이 오려나 봐요. 신부님 고마워요. 얼른 주무시러 가세요.)
(그래 그래야겠다. 그럼 내일 또 보자꾸나. 릴리야.)
(네. 신부님 내일 봐요!)
“릴리...”
누군가에는 당연한 내일. 하지만 그 둘에게는 당연한 내일이 오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이별은 언제나 슬펐고, 소녀와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 마음에 남은 미하엘 신부는 자신의 무기력과 자책으로 기도를 올리고 답을 묻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고 미하엘 신부는 빛을 보았다.
“잘 부탁하네. 도경.”
도경과 원스 팀은 미하엘 신부가 생각하기에 릴리가 하늘에서 보내준 인연이었다. 그러한 미하엘 신부의 마음은 좀 전에 도경이 아이들에게 뮤지컬을 부르는 것을 보며 더욱더 확신을 굳힌 상태였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릴리와 약속했던 모두가 함께하는 노래.
그런 노래를 도경이 불러주기를 미하엘 신부는 굽게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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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 사명으로 공연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 만큼은 지독히도 평범하게 차가운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곡은 무엇으로 할까?’
띠링. 띵. 띵.
‘신나는 분위기의 노래는 한 곡 두 곡이면 충분해. 문제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데...! 뭐가 좋을까? 이곳 사람들을 이용한 최대한의 가성비를 끌어올릴 수 있는 노래가 뭐가 있을까?’
띠리링.
앞으로 있을 공연에 기타를 치기 위해 기타 줄을 쉬지 않고 튕기며 손을 열심히 풀며 공연에 부를 노래의 리스트를 선곡하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김강운의 모습은 한 치의 흠 잡을 데 없는 프로페셔널한 모습 그 자체였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귀를 끄는 멜로디.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김강운이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에는 노래를 들어주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결여 되어 있었다. 그가 고려하고 따지는 것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 자신을 가치를 위한 성공적인 공연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적인 공연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듯 사람들의 호응이 좋아야 성립하기에 결과적으로는 가수나 청중이나 서로가 좋은 결과를 거둬들이는 것이기도 했지만 김강운의 속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그를 응원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교회...!”
멈칫.
띵.
노래를 떠올리는 와중 장소를 둘러보다 떠오른 한 곡에 김강운은 기타를 쳐올리던 손을 멈추었다.
“장소에도 상황에도 분명 어울리지 않아. 거르는 게 맞아 맞는데...”
김강운이 떠올린 노래는 누구나 들어도 유명하고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소절이 존재하는 노래였다.
만약 부른다면 강렬한 한방이 될 것은 저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노래가 지닌 난해한 가사와 품고있는 뜻이 청중과 이곳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떠올린 본인 자체도 왜 이 노래를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그 노래가 신경이 가는 김강운은 손 푸는 연습을 잠시 멈추고 골똘히 그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
‘서정적인 기타선율을 이용해 호소력 높은 목소리를 강조하며 난해한 가사들을 뭉개고 강조할 가사 부분에만 완급 조절한다면 가사 따위는 곡의 분위기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띵!
“뭐, 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요즘 사람들은 노래 가사는 킬링파트 이외에는 잘 듣지 않으니까 말이야...!”
노래를 듣는 사람을 무시해야 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린 김강운.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의 코드를 떠올려가며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띠리링. 띠리리링.
오랜만에 기타를 치는 것이었지만. 좀 전의 손가락을 풀어둔 덕분인지 예전과 별로 위화감이 없이 움직이는 자신의 손을 보며 그는 자신의 목을 풀고 호흡을 들이켰다.
[비밀코드가 있다고 난 들었지.
다윗이 연주하여 주를 기쁘게 했던 비밀코드.
하지만 넌 그런 음악 따위 신경 쓰지 않아.]
서정적인 노래임에도 어딘지 냉소적으로 들리는 김강운의 노랫소리가 허공을 수놓는다.
[Hallelujah].
주를 찬송하고 감사, 기쁨의 신앙을 나타내는 단어 할렐루야.
그것이 김강운이 고른 마지막 선곡의 제목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