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아파트 근처 새벽에도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온 두 남자.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게 보이는 창가 옆에 자리 잡은 둘은 각자 서로의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
꿀꺽.
스륵. 스륵.
한 사람은 무언가를 읽고 있었고 남은 한 사람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반응을 살피었다.
누가 봐도 갑을관계가 확실한 모습이었다.
힐끔힐끔
‘표정을 읽을 수가 없네... 것보다 너무 빨리 넘기는 거 아니야? 마음에 안 드나...’
최정훈은 자신의 각본을 빠른 속도로 넘기는 도경을 보면서 가슴이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후우...”
‘생각한 것보다 많이 떨리네.’
2년 전에 완성했던 자신의 각본을 보며 도경이 어떻게 느낄지, 무엇을 생각할지 생각만 하면 폭풍 앞에 서 있는 촛불처럼 최정훈의 마음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만큼 그가 느끼고 있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너무 서두른 걸까? 아니야 오히려...’
꾸욱.
‘내가 너무 늦은 거야.’
보통 각본을 읽으면 좋든 싫든 반응이 보이기 마련인데 도경은 그저 기계적으로 종이를 일정하게 넘기고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최정훈은 도경이 자신의 각본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워하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는 도경의 무반응 그 자체에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정훈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푸욱.
“......”
[Again]
K 스타를 출연하는 무명시절일 때의 도경을 보면서 최정훈이 영감을 받으며 썼던 작품의 이름 Again. 사실 최정훈은 도경에게 [Again]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보일 생각은 있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었다.
‘새삼스레 통감하게 돼. 도경이는 정말로 위치가 많이 달라졌어.’
사적으로 인간 박도경으로서 가까이 있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연예인 박도경은 최정훈에게 있어 너무나 먼 존재가 되어 있었다.
‘너는 너의 목표로 힘차게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대체...!’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브에서 알아주는 수십만의 구독자를 이끄는 채널로 성공도 하고 더 나아가 각종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며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는 [G.스튜디오] 설립까지 그럭저럭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최정훈은 지금 도경을 보며 후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던 걸까?’
최정훈은 뒤늦게 느껴지는 허탈함에 도경에게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창가에 고개를 돌려 하늘 위로 떨어지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인터넷 방송 콘텐츠를 운영하는 것도, 도경의 뮤직비디오 이후로 밀려오는 뮤직비디오 제작 의뢰 일도 나쁘지 않았지만, 최정훈은 자신의 마음 한편에는 불만족스러워 하는 자신의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가슴 한쪽에는 예전부터 지니고 있던 ‘꿈’이 쉴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영화감독]이란 꿈이 말이다.
(네 나이 올해 38이다.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뤄야 할 나이에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그래. 정훈아 지금 스튜디오도 잘 운영하면서 왜 굳이 그리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니.)
(형. 우선은 스튜디오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유지하는 게 우선이지 않아?)
(그렇게 하고 싶다면 영화감독을 하는 것 말리지 않겠어. 다만 나와 연락할 생각 말아. 너 믿고 스튜디오 따라온 우리는 뭐가 돼?)
(......)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낄 때마다 그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지만, 최정훈은 그 욕구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 생활 한번 거하게 말아먹었던 꿈을 시도하기에는 늦은 나이, 애써 이루었던 사업과 관계들이 자신의 그 욕구에 무너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최정훈. 백수였던 때에 비하면 정말 이건 감지덕지잖아? 이것도 감독이면 감독이라고...!)
최정훈은 자신을 다독였었다. 백수였던 자신을 떠올리면서까지 애써 자위하고 무시하며 자신의 욕구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욕구를 무시한 대가를 도경의 앞에서 스스로가 치르는 중이었다.
‘이런 내가 은하수 멤버라니 너무 쪽팔려...’
어중간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자신과 달리 다들 각자의 역경을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노력하는 은하수 멤버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최정훈은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스스로에 대한 창피함을 느꼈다.
흘깃.
도경의 수상소감에 쥐고 있는 붉은색의 각본.
‘저딴 것...!’
수 많은 작가와 감독들의 시나리오를 고사하는 도경에게 저런 케케묵은 시나리오를 건넸다는 것에 최정훈은 쥐구멍이 찾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경의 뜨거운 수상소감에 불끈 솟아오른 충동의 몸의 맡긴 결과. 최정훈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깊은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
“...!”
흘깃.
‘무슨 풍전등화도 아니고 감정 기복이 엄청 심하네...!’
도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는 최정훈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 지었다. 자신의 앞에서 롤러코스터처럼 큰 낙차를 보이며 변화하는 최정훈의 심리상태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그 사람의 사상, 가치관, 기량 모든 것이 묻어나오는 법. 그런 자신의 창작작품을 남에게 보인다는 기분이 발가벗은 것 같은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창작자인 도경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사락. 사락.
‘애매하다.’
최정훈이 자신에게 건넨 [Again]. 아쉽지만 도경에겐 너무 애매한 작품이었다.
가수로서 성공하고 싶은 청년이 서울에 상경해서 고생한 세월을 보내다 괴팍한 천재 프로듀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는 줄거리.
‘딱 평균이군.’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그렇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딱 평균. 그것이 도경이 내린 판단이었다.
[Again]은 도경이 원하는 특별함 같은 반짝임이 없었는데 도경은 최정훈에게 미안하지만, 이 이상은 읽어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미안하지만 형에게 희망 고문하기도 그렇고 이젠 그만 읽도록...’
사라락.
“응?”
예상되는 클라이맥스에 시나리오를 대충 넘기며 결말 부분만 읽던 도경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가의 이채를 빛내었다.
“스토리보드? 이거 다 형이 한 거예요?”
“아...! 응. 사실 나는 각본보다 먼저 스토리보드부터 끝내 놔. 이미지부터 끝내놔야 뭔가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거든.”
“형 그림 잘 그리네요. 꽤 힘들었을 텐데요?”
“뭐... 예전에 화가인 어머니 밑에서 그림을 배웠었거든 대학도 홍대를 목표로 미술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는 그때부터 애매했네...”
“흠...”
또다시 자괴감의 늪에 빠진 최정훈을 보며 도경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는 건가?’
글과 텍스트로만 끝나있던 각본이 끝나고 그 뒷장을 잇는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들로 영화의 장면 한 컷, 한 컷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스토리보드를 빠르게 읽어나가는 도경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 형의 재능은 스토리가 아니었어...!’
최정훈의 스토리보드의 컷들을 빠르게 살피는 도경은 그가 지닌 재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컷 한컷에 담긴 그림은 사진을 찍은 것 처럼 세밀하기 그지없었는데 영화 속 그가 원하는 화면구성, 연출, 타이밍 등 그만의 특유의 아트웍(Art work)으로 최정훈이라는 사람이 어떤 것을 필름에 담고 싶은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툭!
“형. 잘 봤어요.”
“아... 그래?”
‘다 보지도 않았는데... 역시...!’
대충 휘리릭 스토리보드를 넘기며 잘 봤다고 하는 도경의 모습에 최정훈은 참담한 심정을 느꼈지만, 표정에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상한 결과에 실망한 만큼 그는 뻔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을 생각해서 2시간가량 넘게 앉아서 형편없는 시나리오를 읽어준 도경의 노고가 고마울 따름인 최정훈 이었다.
“하... 하하. 미안 도경아. 내가 네 수상소감 듣고 너무 뜨거워졌나 봐. 이렇게 준비가 덜 된 시나리오를 너에게 주다니 내가 잠깐 미친...”
그는 자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심란한 속마음을 정리하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도경을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을 때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하죠.”
“응응?”
“이 작품 출연하고 싶다고요.”
“뭐, 뭐라고!!?”
화들짝.
“하하. 형 작품에 출연한다고요.”
“그, 그게...!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도경의 대답.
꿈도 꾸지 못했던 자신의 작품 [Again]의 출연제의 승낙에 최정훈은 비명과도 같은 경악성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최정훈으로선 당연히 그런 반응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일류 감독과 작가들의 시나리오를 고사한 도경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한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형 대신 이 작품의 설정을 좀 바꿔도 될까요? 아니, 바꾸도록 하죠.”
“어... 어?”
그의 머릿속엔 도경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한 이유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도경은 최정훈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쾌도난마처럼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가는 도경의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선 이 설정부터”
“자, 잠깐... 도경아 잠깐만...!”
갑자기 자신의 시나리오를 펼쳐 들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도경의 행동에 최정훈은 항시 자신의 품속에 가지고 다니는 펜과 메모장을 꺼내 들어 도경이 요구하는 것들을 적기 시작한다.
---
2주 후.
[JY] 엔터테인먼트 기획실.
꿀꺽!
“후우...”
새해 눈이 내리던 거짓말 같은 그 날로부터 2주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났다.
현재 최정훈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들고 JY 엔터테인먼트로 찾아와 있었는데 그는 기획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는 중이었다.
“정말로 미팅 약속을 잡다니 도경아 너무 행동이 빠르 잖아...”
중얼.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최정훈은 자신의 위가 욱신거리는 감각에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이 문을 열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JY 기획팀들의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바로 그들의 유망한 소속 연예인인 카일 박도경을 자신의 작품에 출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게 분명 하였다.
(우선은 제 요구한 것만 수정해준다면 나머지는 제가 해결하도록 할게요.)
‘그게 쉽게 되겠니?’
도경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리 말하였지만, 현재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사업을 하고 있는 최정훈은 자신들이 벌이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JY] 기획팀에서 도경이 자신의 영화를 출연하지 못하게 노력할 것이 빤히 보였다.
“후우 후우!”
두근두근.
진정을 해보려고 해도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에 최정훈은 과호흡으로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서둘러 도경이 자신에게 새겨준 마법의 단어를 되새김질하였다.
“못 먹어도 고... 못 먹어도 고... 못 먹어도 고...!”
덥석.
벌컥~!!
‘히이익!’
눈을 질끈 감고 차가운 금속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 힘을 주어 문을 연 최정훈은 문 너머에 자신을 노려보는 [JY] 기획팀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을 내지를 뻔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도경의 시선을 발견하고 꾹 참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형이라고 동생 앞에서 멋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내요 형.)
끄덕.
‘그래 못 먹어도 고다!’
그런 최정훈을 바라보며 도경은 웃음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 번 두드리며 파이팅 자세를 취하며 그를 응원했고 그 응원을 바라본 최정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속으로 조금 전에 외웠던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Go...!”
중얼.
“...?”
저벅저벅.
우뚝!
“안녕하십니까!”
마음을 가다듬은 최정훈은 걸음을 옮겨 테이블 가운데로 서서 모두를 향해 인사를 올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후. 목소리에 힘주어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Again]의 감독...! 최정훈이라고 합니다.”
“...!”
최정훈의 자기소개에 그를 책상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도경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눈빛을 반짝였다.
‘형 마침내...!’
씨이익.
‘자기를 감독이라고 말했구나!’
어수룩하면서 소심하고 겁 많던 최정훈이,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을 ‘감독’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했던 최정훈이, 현재 많은 사람이 있는 이곳에서 자신을 감독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감독 최정훈.]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사소한 변화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최정훈에게 있어선 달에 찍힌 최초 인류의 발자국처럼 용기 있는 한걸음이자 위대한 변화나 다름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