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수군수군.
“빌어먹을... 언제 오는 거야?”
엑터스 스튜디오에 마련된 연습실.
불편한 긴 침묵이 어색하게 흐르고 있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대본을 읽으며 연습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누군가는 짜증 서린 목소리로 긴 기다림에 불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딴 저예산 영화에 2시간을 기다리게 하다니 제정신인가?”
“듣자 하니 동양인이 감독이라던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리아 그라테를 꼬신거지?”
“에이전트 말 들어보니까 인맥이래.”
“인맥?”
“어. 이번 영화 남주연 있지?”
“어 그 사람도 동양인이라고 하던데? 근데 왜?”
“그 주연이 이번에 리아 그라테와 스캔들 난 아시아인이래”
“아... 그런 거였나?”
긴 기다림 속 불만은 배우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하였는데 에이전트 조나단이 그들에게 일부러 흘린 정보들은 2시간동안 기다리는 조연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리아 그라테가 저예산 영화에 일부러 출연한다고 하길래 혹시나 하고 배역을 받아들인 건데... 그냥 인맥 놀음이었다고? 하, 허탈하네.”
“나도 실망이 크긴한데 그래도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으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는 해봐야지. 음악 영화인데 팝스타인 리아 그라테가 그래도 한몫하지 않겠어?”
“그래 봤자 흔한 음악 영화지. 게다가 노래는 그 남주인공이 함께 부르는 거잖아. 걔가 못 부르면 말짱 도루묵 아니야?”
“뭐... 그건 그렇긴 한데 야! 솔직히 뭘 기대하냐? 그냥 저예산 영화치고는 페이가 짭짤하니까 이 일을 받은 거지. 안 그래?”
“흥. 나는 아니거든? 그래도 리아 그라테가 출연하는 영화니까 망하든 흥하든 화제가 될 거라는 생각에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고른 거라고.”
“어이구. 그러셔요? 그거참 못 알아봐서 미안하네요.”
“야야. 다들 분위기가 뭐 이래? 이깟 영화로 서로 자존심 세워 날 세울 필요 없잖아.”
“크흠. 뭐 그렇긴 하죠.”
대기실에 있는 10명의 조연들.
그들 모두는 [Again]의 시나리오를 미리 읽어본 뒤였기에 자신들이 출연하게 된 영화가 어떤 영화이며 어느 정도의 것인지 미리 견적을 내었기에 그들의 태도에 알게 모르게 작품을 무시하는 거만함이 서려 있었다.
그저 그런 시나리오, 저예산 영화, 인맥으로 감독과 주연을 꿰찬 두 동양인 요소는 배우들 마음속에 거부감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무명에다가 조연이지만 그래도 나름 실력으로 인정받아 추천받은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배우로서 자존심은 [Again]을 용납하지 않았다.
“뭐, 우리야 양반이지. 저기 두 녀석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
“하긴 대본 리딩현장에 오디션이라니. 주제에 정말 경우가 없어도 없는 거지.”
“그래도 감독질은 해보고 싶은가 보지.”
“누가 붙을까나?”
조연 배우들의 불만을 토로하는 현장 속에 동떨어진 사내 둘.
리아 그라테가 맡은 [키이라]역의 옛 남자친구인 [지미]라는 비중 있는 주 조연을 오디션을 볼 두 남자를 향해 다른 조연 배우들이 곁눈질하며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재밌겠다는 눈길을 보내었다.
같잖은 동양인 감독 앞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굴욕적인 오디션을 보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었기에 꽤 나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다.
“흥!”
“......”
한 남자는 자신들을 유희 거리로 바라보는 향해 코웃음 치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고 한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였다.
그 행동만 봐도 지미란 배역을 두고 경쟁할 남자들의 성향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그렇기에 저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지미를 연기할지 흥미가 동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나 특색이 독특하였기 때문이다.
똑똑똑!
철컥.
“드디어 왔나!?”
끼이익...!
길고 길었던 기다림을 끝을 알리는 소리.
천천히 열리는 문틈 안으로 [Again]의 조연 배우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게 만든 건방진 동양인을 찾아 눈빛을 빛내었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뉴욕 첫날.
첫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한 [Again]의 제작 현장이었다.
---
조연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는 연습실에 당도한 도경 일행은 서둘러 짐을 풀고 자리에 앉아 자기소개하기 시작한다. 조나단의 말을 들어보니 공지 착오로 조연 배우들이 생각보다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안 까닭이었다.
“이상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힐끔.
“분위기가 별로 안 좋네. 늦어서 그런가?”
“글세, 그것보단...”
“응?”
첫 감독으로서 떨리는 심정으로 서툰 영어로 간략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난 최정훈은 조연 배우들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한 달이지만 앞으로 함께할 동료가 그것도 배우들이 첫출발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 영화 촬영에 있어 좋을 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별로 우리를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 어째서?”
“배우들의 자존심이라던가, 인종이라던가, 작품에 대한 무시라던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 뭐...”
“그런...”
“쟤들 표정하고 분위기를 봐봐. 어딜 봐서 저게 대본 첫 리딩 현장에 온 사람이라고 믿겠어?”
“그러고 보니!?”
도경의 말을 들은 최정훈은 아까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깨닫고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외국인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대본 리딩을 임하는 긴장감, 열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설렁설렁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는 시선에 최정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것 들이...!’
까득.
최정훈은 드물게 분노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참아내며 용기 내어 어렵게 성사시킨 첫 작품 [Again].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자신의 작품에 저런 성의 없는 태도라니 그는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형. 표정 관리해.”
“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삼류들이나 하는 거잖아? 웃어요.”
“그런... 넌 저게 화나지 않아?”
“별로. 굴러 들어오는 돌이 밉보이는 건 당연한 거지. 한국에서도 그런데 타지에선 어떻겠어? 이상할 거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고 받아들여요.”
“그럼 저대로 가자고?”
“하하. 그건 당연히 곤란하죠. 우선은...”
“우선은 뭐?”
“저들의 마음부터 얻어야겠죠? 그래도 조나단 말을 들어보니 실력은 입증된 자들이라고 했잖아요.”
씨익.
“도경이 너...!”
차별, 무시, 도발.
이세계에나 지구에서 다년간 여행으로 다져진 내공을 지닌 도경에게 있어 저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고 화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로 도경은 저들의 행동에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도경의 태도에 최정훈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면서 도경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같기만 해 보였던 도경이 실상 저렇게 속이 깊을 줄이야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 마음부터 얻자. 감독으로서 신용부터 얻어야지.’
최정훈은 도경의 말에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결의가 깃든 눈으로 외국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도경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태만한 배우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귀찮은 한숨을 내쉬었다.
‘꼴값들 떨고 앉아있네.’
번뜩.
최정훈이 깊다고 생각한 도경의 속마음.
그것은 최정훈이 생각하는 것처럼 관대하고 넓은 관용의 마음이 아닌, 오로지 그들에 같잖은 행동에 대한 귀찮은 감정으로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해가 뜨고 달이지는 자연현상에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지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하루에 할 일과를 떠올리며 사람들은 맹렬하게 솟구쳐 오는 귀찮음에 한숨을 내쉬고 인상을 찌푸린다.
도경의 현재 심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상 잘 부탁드려요.”
짝짝짝.
“리아 씨의 자기소개가 끝났고... 마지막으로 작품의 주인공 배역을 맡을 도경 씨만이 소개를 남겨두고 있군요. 그럼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 조연 배우들은 제가 소개하도록 하지요.”
피식.
“네. 그럼. 그러도록 할까요?”
앞서 최정훈과 달리 리아 그라테의 자기소개에 훈훈한 반응을 보이는 조연 배우들, 도경 자신의 소개 이후에 조연 배우들의 소개는 자신이 한다는 에이전트 조나단. 그들의 의도가 빤히 보이기에 도경은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카일의 역할을 맡은 박도경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부르시기 힘들면 그냥 카일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하하. 실제로 카일이란 예명으로 연예인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
조용.
“좋아. 자기소개는 이쯤 하죠.”
“!?”
“저기 당신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사람이 말하는데 언짢은 기색이나 팍팍 내고 말이야. 예의 밥 말아 먹었어?”
흥미를 보일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역시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조연 배우들의 행동에 도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기소개를 집어치우고는 그들에게 시비조로 말을 붙이며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만들을 그들에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뭐? 지금 우리를 보고 말하는 건가? 동양인?”
“그래 당신들 말고 그럼 내가 누구에게 이야기할까? 서양인?”
“서양인?”
“왜? 네가 동양인이라고 부르길래 나도 서양인이라 부른건데 뭐 잘못됐냐?”
꿈틀.
그 예상치 못한 도경의 반응에 조연 배우들은 당황함도 잠시 이내 한 명의 조연 배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도경을 향해 날을 세웠지만, 도경 또한 만만치 않게 날을 세우며 자신의 이름을 두고 동양인이라 지칭한 그의 행태를 꼬집으며 그와 눈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파직파직.
“도경이라 했나? 너희 나라 사람들은 너처럼 모두 뻔뻔한가?”
“뻔뻔하다고?”
“그래. 두 시간이나 지각하고 우리를 기다리게 했으면 이러한 결과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흥.”
두 사람의 신경전에 보다 못한 중년연배의 배우가 그 둘 사이를 난입해 도경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잘못을 집어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얼핏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모두가 중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경은 오히려 코웃음 치며 그를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었다.
“개소리(bullshit)하고 앉아있네.”
“뭐, 뭐?”
“진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너희들은 그냥 우리를 무시하고 작품을 무시하고 있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 같잖은 이유를 명분 삼아서 이딴 식으로 행동 못 하지. 어때 내 말이 틀려?”
도경의 노골적인 언사에 중년인 배우는 얼굴을 붉히다가 서둘러 신색을 회복하고 그를 향해 비웃음 지었다.
“허, 피해망상이 심하군. 아시아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가 보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내뱉고 말이야. 자네의 그 열등감에 우리에게 화풀이를...”
“지랄!”
쿵!
들썩!
중년인의 말에 도경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테이블을 강하게 찍어 내리며 그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테이블은 심하게 들썩거렸고 도경의 박력에 모두가 깜짝 놀라 숨죽이며 그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조연 배우 주제에 고작 2시간 기다렸다고 감독과 투자자가 있는 앞에서 불만 품은 기색을 보인다고?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해!?”
“그건...”
“배우가 그것도 무명의 조연 배우들이 오래 기다렸다고 볼멘소리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콘크리트 정글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그게 할 소리야? 그냥 우리가 싫다고 말해!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지 말고 말이야. 초딩도 아니고 쪽팔리지도 않냐?”
“이익.”
도경의 말에 조연 배우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도경의 말이 그대로 정곡이었기 때문이다. 오디션만 보는 대만 하루를 소비하는 게 그들의 일과 도경의 말처럼 2시간 따위는 그들에게 기다림의 축에도 못 드는 게 사실이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울컥.
“그래 그럼 솔직하게 얘기하지. 우리도 리아 그라테의 네임벨류와 출연료가 아니었으면 이런 작품 맡지도 않았을 거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인맥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드는 동양인인 네 녀석들을 그럼 존경하란 말이냐? 그거야말로 개소리다. 너희 같은 녀석들은 무시 받는 게 당연해!”
도경의 말이 틀림 바는 없었지만, 도경의 행동에 많은 조연 배우들이 심하게 감정이 상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영화 출연을 관둘 것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오픈하며 도경에게 쏟아부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자신들의 사정을 인정사정없이 생채기 내는 행태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다 까놓고 말하면 얼마나 좋아? 알아듣기 쉽잖아. 좋아. 그쪽 말은 다 알아들었어.”
씨익.
“뭐, 뭐라고?”
“잘 알아들었다고. 쉽게 말해 쥐뿔도 없는 놈들 작품에 출연하는 게 마땅치 않다는 거잖아. 틀려?”
“그, 그래! 어느 배우가 초짜 감독에 데뷔한 지 갓 1년 된 주연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에 참여하고 좋아한단 말이냐! 조연도 조연 나름의 자존심이 있는 법이다. 쥐뿔도 없는 너희들과 다르단 말이다.”
피식.
“누가 그래?”
“뭐?”
“누가 우리보고 쥐뿔도 없다고 그래?”
“...!?”
자신의 예상이라면 화를 내야 할 도경이 오히려 유쾌한 웃음을 띠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당황한 중년 배우가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도경은 진한 웃음을 피워올리며 그가 내뱉은 말에 무언가를 정정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오류를 집어내었다.
“못 미더우면 한 번 테스트해 보든지.”
휘리릭!
탁.
자신의 테이블 위에 있는 시나리오 대본을 중년인이 있는 테이블로 던진 도경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환히 웃음 짓는다.
“내가 쥐뿔도 없는 놈인지 말이야...!”
선전포고.
굳게 닫힌 조연 배우들의 마음을 얻는 도경의 첫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