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210화 (210/357)

210화

대본 리딩 현장.

스튜디오 연습실에서 느닷없이 도경의 뜨거운 테스트 현장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연 배우들과 도경은 현재 대본 리딩으로 서로의 연기를 겨루는 중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대본 리딩이라는 말은 올바르지 않은 게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사를 읊고 있는 도경의 손안에는 대본이 쥐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대 10.

도경의 자신만만한 제안으로 시작된 테스트.

조연 배우들은 시나리오 대본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곧장 도경에게 대사를 치며 그를 시험했고 도경은 그들의 대사에 반응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연기를 펼쳐 보았다.

[S#1]

[카일! 거기서 감히 네가 내 조카를 건드려?]

[하하하. 아니 데이비드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남녀가 술을 먹다가 보면...]

[썩 안 꺼져!]

쿵쿵쿵!

[데이비드! 옷은 주고 쫓아내야지...! 저기 듣고 있어? 지금 엄동설한이라고!? 젠장!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쪼르르륵-!

[빌어먹을 놈아 이 소리가 들리냐? 내 뜨끈뜨끈한 오줌이나 처먹어라! 네 조카가 환장한...]

콰당!

[카일 이 개자식이! 죽여버리겠어!]

[하하하! 엿이나 먹어]

[S#8]

[꺼져 개자식들아. 다른 건 몰라도 기타만은 못 줘.]

[이 독종 새끼가...!]

[야 그만둬! 그런 냄새나는 기타가 뭐가 필요하다고 챙길 건만 챙겨]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알았으니까 꺼지라고.]

[이게!]

퍼억!

윽!

[퉷... 오늘 일진 제대로 엿 같네.]

“...!”

카일을 연기하는 와중에 도경은 몸짓까지 섞으며 캐릭터의 성격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어떨 때는 인생 막장의 수치심이 모자란 양아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어떨 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독종의 모습을 그리며 그 가운데에서도 씁쓸한 느낌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였다.

한 씬(Scene)에서 캐릭터의 속 안에 머물러있는 감정의 디테일 까지 표현하는 도경의 연기에 모두 놀라는 한편.

씨익.

자신들을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도경을 보면서 그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끈

‘거, 건방져!’

‘성격이 나쁘군.’

‘저 잘난 척하는 콧대를 꺾어주고 싶어!’

도경의 실력이라면

연기한 씬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거만하게 앉아 도경은 턱을 치켜세워 보이며 무언의 눈빛을 그들에게 보내었다.

[이게 전부냐?]

“....!”

사소한 제스쳐에도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배우 출신인 그들은 도경이 보내는 도발을 바로 알아차렸고 분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들고 있는 시나리오 대본의 종이를 움켜쥐더니 힘주어 거칠게 넘기기 시작했다.

이미 도경의 실력은 인정한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그에게 한 방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에 끝을 볼 요령인 듯싶었다.

펄럭펄럭!

“대단해.”

거칠게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현장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리아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도경과 조연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감정싸움으로 번졌던 일이 어느새 순수하게 서로 간의 실력과 기량을 겨루는 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한 번 참여해볼까?”

타닥.

도경과 조연 배우들의 연기대결을 재밌게만 바라보고 있었던 리아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있는 시나리오 대본을 펼쳐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 서로를 향한 열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가만히 앉아있기가 고역이었다.

[당신은 진정성 있는 아티스트가 될 수 있어요!]

[진정성이라 A&R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는데 그쪽이 왜 망했는지 알 것 같네.]

피식.

[그렇게 노래를 불러놓고 말에 가시가 돋쳐 있네요? 의외네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보죠?]

[알게 뭐야? 그냥 노래만 좋으면 되는 거지. 솔직히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고집 있네...]

“...!”

기습이나 마찬가지인 리아의 참여.

그럼 에도 도경은 망설임 없이 물 흐르듯 그녀가 던진 대사의 상황을 곧바로 떠올리며 다음 대사를 치며 눈꺼풀을 늘어트리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댄 자세, 한 쪽 눈이 다른 쪽의 눈보다 감겨있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오싹.

‘연기대상을 받았다고 하길래 질 나쁜 농담처럼 들렸는데... 진짜였구나!’

찰나의 시간. 술집에서 만취했다는 상황에 이미 몰입해 있는 도경을 보며 리아는 소름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경이 연기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그녀는 도경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노래와 작곡을 하는 도경이었지 저렇게 소름 끼치는 연기를 펼치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롤모델인 아티스트가 있을 거잖아요. 한번 말해봐요!]

[롤모델?]

[그래요. 롤모델!]

당황도 잠시 리아는 도경에게 다음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저렇게 상황에 몰입해 있는 상대방을 두고 딴 데 정신을 팔기에는 그녀에게 여유가 없었다.

단순히 대본 리딩이었지만 카메라가 돌고 있는 것처럼 팽팽한 현장감이 느껴지고 있는 까닭이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데 굳이 있다면 돈 많이 버는 뮤지션 아닐까?]

[당신...! 의외로 꼬여 있네요.]

[뭐, 그래서 보태준 거 있어? 그나저나 술 한잔 더 시켜도 될까?]

[...]

현실에 찌든 뮤지션과 음악에 대한 고집과 낭만을 버리지 못한 여성 프로듀서.

극명히 다른 두 남녀 캐릭터를 구현하는 도경과 리아의 연기는 대본 리딩 현장에 뜨거운 열기를 더하기 시작한다.

---

“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거지?”

중얼.

그것을 바라보는 조나단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냉소와 무시가 팽배했던 분위기의 연습실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벌어지는 도경과 조연 배우들의 싸움에 남몰래 미소를 짓기까지 했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틀어지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자신의 가져온 작품을 리아에게 들이밀기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조나단은 자신의 가져온 계약 건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리아를 설득해 저 동양인들의 작품을 저 버리게 하고 자신이 가져온 작품과 계약을 맞게 할 그의 진짜 의도였기 때문이다.

‘젠장. 이러면 난처한데.’

그런데 지금 그가 원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동양인의 연기에 모두가 아까 전과 냉소적인 태도와 달리 열정적인 태도로 연기를 펼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연기를 펼치는데에 집중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조나단은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조연 배우들에게서 도경을 동양인이라 무시하고 괄시했던 기색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말 아티스트들은 변덕스러운 족속들이라니까...’

동양인이란 선입견은 사라지고 도경을 어느새 자신들과 동등한 아티스트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조연배우들의 행태에 조나단은 혀를 찼다

법과 회계와 비즈니스에만 맨인 조나단은 아티스트들의 저런 점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온갖 고집과 자존심 덩어리로 이루어진 복잡한 자들이 어떨 때는 3살 먹은 어린아이처럼 상대방에 순순히 마음을 허락하는 모습은 정말로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믿을 건 저 두 명뿐인가?”

힐끔.

작품으로, 연기로 하나가 되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조나단은 초조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준비한 수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조나단이 보내는 시선의 끝에는 [지미]의 역할을 두고 오디션을 봐야 하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조나단의 태도를 보건데 아마도 그 두 남자에게 무언가 있는 듯싶었다.

--

“대단하다...”

“저게 뭐 대단한 거라고? 자기 작품이니 미리 받아서 외웠겠지.”

지미의 역할을 겨룰 금발의 자존심 세 보이는 남자와 검은 곱슬머리를 지닌 소심해 보이는 남자는 도경의 연기에 대해 상반되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대단하죠.”

“뭐라고?”

“아, 아니... 그게 씬을 순서대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뒤죽박죽 씬에 대사를 저리 매끄럽게 떠올리며 연기하는 건 대단하지 않아요? 진짜 이골이 나도록 외우지 않으면 저렇게 못 하는 거 그쪽도 아시잖아요.”

“흥...! 대본 리딩 잘해도 실전은 어떤지 모르지. 그나저나 대체 언제 오디션을 볼 생각이지?”

‘되게 까칠한 사람이네.’

삐죽.

쿼터로 보이는 옅은 갈색의 피부를 지닌 소심한 사내는 자신의 옆에서 언짢은 기색을 내보이는 남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달리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 보이기까지 영국인을 보면서 마음이 들지 않는 한편 그의 자신감이 부럽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잘 할 수 있을까?’

소심한 사내의 이름은 테일러.

그는 떨리는 심정으로 자신에 손에 쥔 시나리오를 꾹 움켜쥐었다.

얼마나 여러 번 읽었는지 그가 지닌 시나리오 대본 책자는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부풀어 올라와 있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자신감이 없어 불안에 떨었다.

(한심하긴 그따위를 연기라고 펼치나? 그렇게 연기하려면 때려치우는 게 좋을 걸세.)

자신이 존경하던 영화감독의 작품의 오디션에 참가해 그에게 혹평을 듣고 난 이후부터 쭉 시달려온 트라우마와 슬럼프. 예전엔 가장 자신 있던 것을 연기로 뽑던 전도유망한 청년은 존경하던 감독의 독설로 인해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혼자 있을 때 완벽하게 펼쳤던 연기를 펼치는 당일에는 사람들 앞에선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저예산 영화라면 부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떨어져 저예산 영화라면 부담 없이 연기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에 테일러는 [Again]에 지원했던 거였는데 그는 도경과 조연 배우들이 열의를 피워올리며 대본 리딩을 하는 모습에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표현력이 미묘하게 풍부해진다. 실시간으로 대사를 치면서 자신들의 캐릭터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서 개선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불만투성이였던 조연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고 변화해 나간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조연 캐릭터라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표현해 나가려는 모습에 테일러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한심함 느꼈다.

‘나랑 다르게 말이야...’

자신들의 대사들이 이미 다 동난 조연 배우들은 다른 조연 배우들과 도경이 펼치는 연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태도가 트라우마에 절뚝이고 있는 자신과 비교되어 테일러는 서글픈 마음을 느끼었다.

자신은 연기를 펼치는 데 급급해서 연기가 끝나면 마음속 깊이 안도하는데 반면 저들의 얼굴엔 연기를 더 펼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큰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뭐하자는 거지?]

깜짝!

테일러가 연기력 이전에 무언가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자신의 문제를 느끼었던 찰나. 갑자기 어디서 날 선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아...!”

웅성웅성.

모두들 당황한 채 꿀 먹은 벙어리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조연 배우들이 대사를 치렀던 한 씬이 끝이 나고 이번에 처음으로 갑작스럽게 도경이 대사를 먼저 쳐 왔는데 도경이 내뱉은 한 마디의 짤막한 대사로는 지금 도경이 연기하고 있는 장면을 그 누구도 유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딱 한 번이었지만 그 한 번으로 모두들 도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상대로 태연하게 대사를 받아쳤던 도경의 행동이 사실은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씬 67번 이다! 저건, 지미가 카일을 회유하려는 장면이다.’

[#67 몬스터즈 레이블 / 낮]

모두가 도경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테일러 만은 눈빛을 반짝이며 도경이 내뱉은 대사의 장면을 떠올리며 흥분한 기색을 지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영국인 경쟁자는 긴가민가하며 도경이 내뱉은 대사가 뭔 줄 모르는 듯싶었는데 순간 테일러는 이것은 기회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입을 열었다.

“하하하! 친구 뉴욕 생활을 그렇게 했으면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생각보다 융통성이 없는 친군데?”

“...!?”

테일러의 옆에 있던 영국인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대답이 들려올지 예상 못 했던 도경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테일러. 그런 테일러를 향해 도경은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번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