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당신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 나와 계약하자고?]
[친구 뭐가 이상하지? 음반 레이블 회사에서 좋은 음악과 아티스트와 계약을 한다는 건 당연한 얘기인데 말이야.]
[키이라는? 키이라가 퍽이나 좋아하겠군.]
[아~. 키이라. 그녀와 내 관계는... 조금 복잡하긴 하지.]
피식.
[조금?]
[...이봐 카일 씨. 답 없는 나와 키이라의 남녀문제를 논하는 것보다 너의 앨범의 부가가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이번 계약에 절대적인 갑은 친구 자네한테 있다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게 분명해.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을 듣고도 거부한다면 굳이 잡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물론 이 계약 건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도 상관없어.]
[.....]
씨익.
[좋아. 들어보겠다는 의사로 알아듣겠네. 친구~.]
카일과 키이라가 우여곡절 끝에 만들었던 하나의 앨범.
유통할 레이블 회사를 찾고 있는 와중 [몬스터] 레이블을 운영하는 키이라의 전 남자친구 지미가 도경에게 은밀한 계약을 제안한다.
그 계약을 맞닥트린 카일은 표정을 굳히며 자신의 앞에 있는 지미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그가 제시하는 조건들을 들으며 인상을 구기며 짤막한 말을 남긴다.
[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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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gain]의 중요한 갈등 씬의 연기를 마친 도경은 테일러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처럼 대본 없이 바로 대사를 내뱉으며 연기를 이끌어갔던 테일러. 도경만큼이나 능숙하게 대본 없이 연기를 이어 나가는 그가 얼마나 지미란 역할을 공부해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대본을 받은 지 1주일 남짓한 시간.
자기 배역 캐릭터 이외 상대방의 대사까지 암기해서 숙지해온 것은 여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것도 돈이 되는 작품이 아닌 저예산 영화에 처음부터 이만한 노력을 해왔다는 건 도경으로선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마움을 떠나 도경은 무엇보다 테일러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했어.’
다른 조연 배역들은 빠르게 구했지만 ‘지미’란 역할은 바로 구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Again]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지미란 캐릭터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Again]의 지미라는 캐릭터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여자친구를 속이는 이기적인 인물로 이익과 성공을 향해만 움직이는 전형적인 뉴욕커. 하지만 그의 이면에는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미련도 지닌 이율배반적인 성격도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 미련은 너무나도 무의식적인 부분에 서려 있는 것이었기에 지미는 그저 단순한 악역으로 오해를 하기 쉬운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을 캐치한 테일러가 카일이 키이라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잠깐 머뭇거림을 표현함으로써 단순하게 보일 수 있는 지미라는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였다.
‘이거, 운이 좋은걸?’
씨익.
캐릭터의 내면까지 공부하고 생각해오고 그것을 연기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연기자를 한 번에 찾을지 몰랐던 도경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조연 배우들은 모두 제대로 된 자존심을 지닌 연기자들이었고 작품에 완성도를 높여 줄 지미란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을 연기로 풀어낼 줄 아는 예상외의 복병인 테일러까지 뉴욕에 상경한 첫날에도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삐걱거렸던 첫 출발은 어느새 거짓말답게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일사천리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테일러 씨 합격!”
벌떡!
“자, 잠깐 웃기지 말라고!”
“응?”
테일러를 보면서 기쁘게 외치는 도경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려 퍼지고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금발의 영국인이 손을 들며 빠르게 이의를 제기해 왔다.
“아직 나는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가운데 아까 전부터 남들의 연기를 보며 코웃음 쳤던 금발의 영국인. 그를 바라보는 도경의 눈에 짜게 식기 시작했다.
새것과도 같은 시나리오 대본 책자, 척 봐도 부티나는 복색, 그 누구보다 오만한 태도. 도경은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난 맛에 사는 도련님인가?’
“쯧!”
빠직.
‘역시 재수 없어.’
들리지 않게 홀로 혀를 찬다고 했지만 민감한 청각을 지니고 있던 도경은 그 소리를 듣고 말았다.
테일러로 인해 활력이 돋았던 기분이 어느새 아래로 고꾸라치는 것을 느낀 도경은 이마에 굵직한 혈관을 내보이며 앞에 있는 미청년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름이... 분명 알랜이라고 했나?’
절박함이라던가 간절함이 없는 도경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
“그럼 오디션 시작해 볼까요?”
앨런이란 도련님이 어떤 연기를 펼칠지 도경은 눈에 힘주며 그의 연기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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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인정할 수 없어!!! 지금 나보고 이딴 우스꽝스러운 조연 따위를 하라고?”
“아니, 이게 너한텐 딱 맞다니까?”
“뭐라고!?”
덥석.
도경이 재수 없다고 한 사내 알랜. 그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결국 도경의 멱살을 붙잡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를 폄하하는 도경의 말에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연기가 너무 평범한데? 게다가 네가 지미를 연기하면 너무 재수 없어 보여. 차라리 이 배역을 한 번 맡아보는 게 어때?)
발끈.
‘연기가 심심하다고? 그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할까 보냐...!’
나르 시스트에 이상한 괴짜 성격을 지닌 영상 아티스트 [폴].
키이라의 절친으로 나오는 폴은 그녀를 도와 카일의 앨범 MV의 제작을 돕는 영상 아티스트로 [Again] 작품의 감초 역할을 맡은 우스꽝스럽고 괴짜 캐릭터였는데 알랜은 그런 역할을 준 도경의 의도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필 게이 캐릭터를 나에게 주다니. 이건 일부러 나를 놀리는 거다.’
폴이라는 캐릭터는 감초캐릭터로서 그만큼 해괴망측한 괴짜 성격을 가진 캐릭터였는데 문제는 그 캐릭터가 게이라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깔끔하고 선이 얇은 곱상한 외모 덕분에 아이들에게 게이라 놀림 받았던 앨런은 도경의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찌릿.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뭐? 네가 누군데?”
“그, 그건... 젠장 몰라도 돼!”
“?”
앨런이 말을 잇지 못하고 도경을 노려보는 가운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조난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앨런을 향해 눈빛을 반짝였다.
‘그, 유명한 진 에버트의 손자지.’
씨익.
‘저 테일러란 녀석 때문에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펼쳐지는군.’
미국에서 평론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인물로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기며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진 에버트.
각종 영화제의 초청되어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영화계에 권위적인 인물이기도 하였고 영화 평론사이트에서 그가 올리는 글은 많은 구독과 좋아요를 기록하며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는데 그의 영화 평론 하나로 흥하고 망하는 영화가 생길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놀랍게도 도경과 실랑이 하는 앨런이 바로 그의 손자라는 것이다.
(앨런 에버트를 쓰는 순간 진 에버트의 손길이 닿는다.)
(저명한 평론가도 손자 앞에선 바보가 된다.)
(앨런에게 소홀하게 대하는 순간 진 에버트의 채찍이 날아온다.)
(썩은 토마토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의 손자를 피하라.)
[위험한 지뢰] 앨런 에버트
유명한 평론가의 손자인 앨런은 드라마나 영화업계에서 지뢰로서 공공연히 비밀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손자 사랑이 극진한 팔불출 진 에버트의 존재 때문이었다.
예전에 앨런이 한 드라마를 출연하고 부당하게 잘린 적이 있었는데 그에 진노한 진 에버트가 펜을 뽑아 들고 그 드라마 작품을 조목조목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의 펜은 여론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덕분에 다음에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려던 멀쩡한 드라마는 제작이 중단되는 청천벽력 같은 사태를 맞이하며 종영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실제로 종영된 이유야 작품의 애매한 인기라던가 주연 배우들의 사생활 문제들 같은 여러 가지 골칫거리들이 있었던 게 큰 이유였지만 업계에선 진 에버트의 일화만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었고 앨런은 모두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할아버지 때문이야! 다들 나를 뽑지 않잖아요.)
(허허허. 앨런 미안하구나! 설마 일이 이렇게 됐을 줄이야.)
(앨런 버릇없게 할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소리니!)
(그래도...!)
(아버님 탓하지 마라 앨런. 애초에 네 연기가 뛰어났다면 감독들은 할아버지의 이름에 부담을 느끼더라도 진작에 너를 쓰지 않았겠니? 철부지처럼 굴지 말렴.)
(이익!)
앨런은 요즘들어 자신의 일상은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업계에 소문이 단단히 퍼진 것인지 사전 오디션에조차 붙지 못하고 떨어지는 가운데 할아버지에게 원성을 내뱉은 이후로 가족 관계도 냉랭한 한전 상태. 어떻게든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고했던 자존심을 접고 저예산 독립영화인 [Again]에 오디션을 봤는데 설마하니 이곳에서까지 떨어지는 굴욕까지 겪을 줄이야.
‘제길... 이런 영화에 까이다 못해 조롱까지 당하다니 진짜 내가 갈 데까지 갔구나.’
으득.
상상도 못 했던 결과에 그로서는 절로 이가 갈리는 상황이었다.
“젠장! 이딴 영화에 오디션을 본 내가 멍청했지.”
툭.
이를 갈며 도경의 멱살에 손을 뗀 앨런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도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굴욕과 자존심에 상처를 준 동양인.
도경의 얼굴을 평생 기억하겠다는 원통한 얼굴로 앨런은 악담을 그에게 내뱉었다.
“흥! 이깟 뻔하고 뻔한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리 유세냐...? 사람을 모욕하고 얼마나 잘 될지 두고 보자.”
“뭐?”
자신에게 악담을 내뱉으면서 뒤돌아서는 앨런의 모습을 바라본 도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의 의도를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앨런의 태도. 그리고 무언가 그에게도 사정이 있는 거 같은 분한 표정에 단순히 철부지 도련님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야! 너 뭔가 지금 오해하고 있지 않아? 그리고 건방지게 제 할 말만 하고 가냐?”
“뭐, 뭐야!? 너 이거 안 놔? 지금 뭐하자는 거야?”
“하하하. 이야기 좀 나누자는 거지. 뭐겠어.”
“이게 어딜 봐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건데? 이거 놔!”
“시끄러 임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형이 하는 말은 순순히 들어.”
“혀, 형?”
“그럼 내가 18살짜리 동생 하리?”
꽈악!
“아아아! 아파! 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질질질.
선도부 선생이 불량학생을 붙잡듯 앨런의 옷 소매를 움켜쥔 도경은 웃으면서 문을 열고 그를 연습실 밖으로 끌고 갔다.
애처로울 정도로 비명을 지르면서 도경에게 끌려가는 앨런의 모습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한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조나단은 입을 멍하니 벌리며 도경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경악하고 있었다.
진 에버트의 손자를 저런 식으로 다루다니. 상대방의 지위와 배경에 민감한 비즈니스맨인 그로서는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도경의 행동에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저게 도대체...?”
“하하하... 도경이 조금 성격이 막무가내죠?”
“그게 도경의 매력이지!?”
자신의 경악에도 태연한 최정훈과 그리고 자신의 클라이언트 리아 그라테의 반응에 조나단은 더욱 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멋대로 구는 행동을 매력적이라고 표현하는 리아나 익숙하게 재밌겠다는 눈빛을 띠는 최정훈의 태도들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곤란합니다. 정훈 씨. 한국은 어떨지 몰라도 여기는 사소한 것 하나가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나라니까요. 파트너의 우발적인 행동은 주의를 주시는게...”
“음... 괜찮을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도경이니까요.”
“맞아! 도경이잖아.”
“.......”
‘대체 저 사람에게 뭐가 있다고...!’
우발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도경에게 조건 없는 신뢰와 강한 믿음을 보내는 최정훈과 리아의 태도에 조나단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도경에게 호기심이 동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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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
“자! 마시자!!!”
와아!
“칫! 나는 콜라냐...?”
“꼬맹이한테 아직 술은 백만 년은 이르지!”
“꼬맹이라고 하지 말랬지?”
“네네.”
하하하!
[Again]의 주 조연이 모여있는 첫 회식자리.
원래는 예정에 없는 자리였지만, 도경의 강력한 주장으로 만들어진 술자리는 의외로 시끌벅적한 소음을 내며 좋은 분위기를 지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간다 간다.”
쫘르르륵!
와아-!
일렬로 세운 술잔이 맥주잔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모두가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성소리를 내었다. 처음에 그를 무시하고 차별했던 조연 배우들은 어느새 도경이란 색에 물들어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중이었다.
“쯧.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한국인들은 모두 다 저런가?”
“하하하. 그래도 재밌는 사람이잖아.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좋은 분위기가 될 것 같아.”
“흥! 그쪽은 원하는 배역 따서 상관없다는 거지?”
“뭐, 그렇지.”
“생각보다 뻔뻔한 성격이었네.”
“하하하... 그러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저 사람하고는 연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지미의 배역을 딴 테일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희망찬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말을 더듬지 않고 연기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그 원인을 도경이라는 동양인에게서 찾았다. 오디션 때 도경에서 느껴지던 기이한 감각이 그를 연기할 수 있게끔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함께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자신의 트라우마를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한 사람이야...”
“뭐가 신기해? 그저 망나니 같은 사람이더만.”
“하하하. 그런데 앨런 너는 이 작품에 참여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왜 그 배역을 받아들였어?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테일러의 말에 앨런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없는 캐스팅 제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하게도 앨런은 도경의 캐스팅 제의를 거부하지 못했다.
“노래...”
소근.
“응?”
“젠장! 노래가 좋았다고...!”
자신의 귓가에 꽂혔던 이어폰에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
그 노랫소리를 들은 후로부터 자신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노래 멜로디에 앨런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자신의 앞에 있는 콜라를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