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헤이 말콤. 나 왔어. 으하하하. 기분 좋은 아침!”
“윌리... 오후 1시가 너한테 아침이냐? 그리고 늦었잖아. 클라이언트에 한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하하하. 원래 약속 시각에 늦어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말콤 너처럼 너무 빠릿빠릿한 것도 정이 없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도대체 그딴 예의는 어디서 가져온 거냐?”
“하하. 말콤 우리 같은 초일류들의 세상에선 이 정도는 오히려 미덕이라고. 실력에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지.”
약속 시간에 한 시간을 늦게 왔음에도 뻔뻔하게 웃으면서 들어오는 윌리를 향해 말콤은 자신의 흰 뿔테 안경테를 치켜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성격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실력을 갖춘 파트너였을 텐데 여러 번 일하지만, 저 잘난 척하고 능글맞은 성정은 그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진짜 너 그러다가 언젠가 큰코다칠 거다.”
“큰 코? 하하하! 한번 다쳐봤으면 좋겠다. 인성은 까도 실력은 못 까는 게 이 몸의 실력이란 말씀이지.”
“쯧...!”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며 이죽거리는 윌리는 그야말로 재수 없는 모습의 극치였지만 말콤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짜증은 나지만 윌리의 실력은 그만큼 확실했기 때문이다. 깐깐한 자신이 그와 만나는 유일무이한 이유였다.
자신이 지시하지 않아도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주고 조율해주는 엔지니어의 존재는 음악 프로듀서로서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 그것이 윌리와 말콤의 관계였다.
“됐고 저번에 말한 대로 사운드는 제대로 만들어 왔어? 도대체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아아. 오랜만에 삘이 딱 꽂혀서 말이야. 그리고 내가 누구야 걱정할 걸 해라. 이미 믹싱까지 끝낸 지 오래 란 말씀. 두둑한 페이 만큼 좀 신경까지 썼지. 그나저나 재미있는 멜로디 라인이던데? 클라이언트가 리아 그라테라면서 그녀의 원래 앨범 스타일하고 많이 다른 노래라 솔직히 많이 놀랐다고?”
윌리는 자신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띠며 눈빛을 반짝였다.
톡톡 튀고 개성적이고 발랄한 노래 혹은 달콤한 R&B 노래를 불러왔던 리아 그라테의 평소 스타일과 달리 담백하고 어딘가 성숙한 멜로디 라인.
좋게 말하면 서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올드하고 처지는 스타일의 노래 멜로디는 윌리의 개인적인 흥미를 돋우는 데 충분했다.
리아의 음색 엔지니어로서 한 사람의 팬으로서 좋아하는 윌리는 그녀가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어떻게 부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그거 말이지?”
호기심과 기대로 물들어 있던 윌리. 하지만 그는 말콤의 이어지는 말에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피식.
“사실 그거 리아 그라테의 앨범 아니다.”
“뭐, 뭐라고? 그녀의 앨범이 아니라고? 말콤 그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클라이언트는 리아 그라테라고 했잖아!?”
“진정하라고 윌리. 나는 클라이언트가 리아라고만 말했지 그녀의 앨범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어.”
으쓱.
“뭐...?”
예상치도 못한 사실에 윌리는 말콤을 향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다른 아티스트 앨범의 작업 때문에 리아의 앨범 작업을 참여 못 했던 윌리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은 아쉬운 감정을 남기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리아 그라테의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열의를 가지고 불태우며 작업했던 결과물이 사실은 그녀의 앨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야? 멜로디를 맡긴 당사자가 리아 그라테인데 그녀의 노래가 아니라고? 아니, 진작에 그걸 얘기해줬어야지. 너 일부러 나 엿 먹였구나.”
으쓱.
“하하. 엿까지야. 그저 내 파트너인 엔지니어가 의욕을 불태우고 작업하는데 초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자신이 만들어 온 소리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윌리는 발끈하고 말콤에게 따지기 시작했지만 말콤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자신의 흰색 뿔테의 안경테를 중지로 치켜 올리며 고소를 지어 보이자 윌리는 말콤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악마 같은 새끼. 말콤 너 이럴 때마다 정떨어지는 거 알아? 그러니까 엔지니어들이 너랑 정 떼고 같이 작업을 피하는 거라고.”
“그런가? 나는 프로듀서로 최고의 결과물을 뽑기 위해 한 행동밖에 하질 않았는데 말이야. 뭐,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 판은 결과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니까.”
“너도 정말 빌어먹게 꼬였다니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신의 파트너를 보면서 윌리는 혀를 내두르며 혀를 차며 이를 갈았다.
“젠장! 오늘 어떤 녀석이 노래 부를지 모르겠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 지옥이 뭔지 보여주도록 하겠어. 작정하고 개같이 굴 테니까 말콤 너는 나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나 상당히 열 받은 거 알지? 날 속인 만큼 각오 하라고...!”
으득.
“하하하! 그런다면 나야 좋지. 아니, 오히려 부탁하고 싶었는데 잘 됐어.”
“응?”
대놓고 음반을 녹음의 분위기를 깽판 칠 거라고 벼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오히려 반갑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말콤을 보며 의아한 시선으로 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로서 클라이언트를 신중하게 다루는 말콤의 성정을 아는 그로서는 개같이 굴겠다는 자신의 행동을 반기는 그의 태도는 명백히 이상했기 까닭이다.
힐끔.
“뭐야? 너 기분 별론가 보다? 이번 고객이 누구길래 그러는데?”
뒤늦게 말콤을 살핀 윌리는 그의 기분이 저조한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렇게까지 저조한 상태의 말콤은 몇 번 본적 없는 윌리는 눈치를 보면서 그를 향해 조심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화나면 무서운 건 자신이 아닌 말콤 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짜증 나면 개같이 굴지만, 말콤은 상대방을 조곤조곤 숨통을 조여가며 멘탈 자체를 박살 낸다.
거칠기로 유명한 헤비메탈 보컬이 그에게 멘탈이 와장창 깨져 긴 시간 동안 슬럼프에 시달렸던 일화도 있을 만큼 짜증 나 있을 때의 프로듀서 말콤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낙하산.”
“아아... 낙하산 말이지. 그것 때문에 그래? 야,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이 일을 받은 거야? 안 하면 장땡이잖아.”
“돈(Money)이지. 아주 많은 돈을 준다는데 어쩌겠어? 해야지.”
“돈은 좋고 자존심은 상한다 이거냐? 너도 정말 피곤한 성격이라니까? 너, 얼마나 쥐어짤 생각이냐?”
“내 이름에 먹칠이 안될 정도로.”
“아이고야... 그 낙하산 곡소리 나겠구먼”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했다.
항상 일류들의 아티스트만을 상대하며 계약 전에는 직접 그 아티스트의 노래를 듣고 계약을 맺는 자존심 드높은 프로듀서 말콤. 하지만 이번엔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리아가 비밀리에 계약을 맺고 싶다고 내민 거액의 의뢰비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끄덕.
“부끄러운 결과물은 안 만드는 게 내 철칙이니 말이야.”
말콤 그는 자신의 프라이드의 어긋나는 결과물은 내지 않는다.
한 마디 한 마디 콜라주처럼 목소리를 일일이 잘라 이어 붙이는 한이 있더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음반작업물을 만든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기 때문이다.
‘낙하산아. 애도를 빈다...’
녹음실 온종일 고문과도 같은 녹음을 당할 이번 클라이언트를 향해 윌리는 속으로 애도를 빌었다.
그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
그것이 콘크리트 정글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초일류의 제작자로 살아남는 비법의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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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그라데이션]
우뚝.
“잠깐 리아 설마 서프라이즈라는게?”
“후후. 어때 마음에 들었어? 오늘 도경과 하루종일 있을 장소야.”
‘오늘 들떠 보였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두 음반 제작자가 도경을 향해 칼을 벼르며 기다리고 있을 때. 도경은 황당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추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 걸려있는 유명한 뮤지션 아티스트들의 수많은 사진과 음반들이 걸려있는 장소에 리아가 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모를 정도로 도경은 둔감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뭐가?”
“이런 장소의 녹음실을 온종일 빌리다니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니었을 텐데...”
“헤에. 도경이 그런 것도 신경 써?”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래 봬도 빚지고는 사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뭐어...?”
꿈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 서운하려고 하네 도경.”
“리아?”
웃던 리아가 도경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정말로 화난 기색을 내비치며 볼을 부풀어 올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경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화를 내는 리아의 찌푸려진 인상은 펴질 줄을 몰랐다.
“빚이라니. 내 보답이 어째서 빚이 되는 거야?”
“보답?”
끄덕 끄덕.
“그래 보답!”
“보답이라니 대체... 뭐에 대한?”
긁적.
“하? 지금 그거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보답이라니 뜬금없는 리아의 말에 도경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리아는 그런 도경을 보면서 정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천천히 또박또박 한 자 한 자에 악센트를 넣어가며 입을 열었다.
“Walk ~ Away!”
“아, 난 또 뭐라고”
피식.
리아의 말에 도경은 그녀가 말하는 보답이라는 말을 확실히 알아들으며 싱겁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짓고 말았다.
“그거, 그냥 그때 너 위로 삼아서 장난으로 만든 곡이잖아. 고작 그런 거 가지고 보답이라니 너무 오버한다.”
“고작 그런 거라니? 빌보드 핫 100 차트에 그 노래가 어떤 성적이었는지 몰라?”
“아니, 그런 거 하고는 상관없다니까? 보답을 바라고 만든 것도 아니고 진짜 5분도 안 돼서 만든 노래가고 유세 떠는 거 좀 그렇지 않아? 그런 거는 없어 보인다고 리아.”
“유세 떨어도 돼! 도경 그럴 자격 있어. 아니면 저작권료로 모아둔 작곡료라도 받던가.”
“하하하. 됐네요.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라니까? 하룻밤 장난으로 그칠 뻔한 그 곡을 그렇게 성공시킨 건 결국 네 실력과 목소리니까 말이야.”
“이익. 이 고집불통! 그러면 오늘 내 것도 그냥 장난으로 한 행동으로 쳐.”
“하하하! 그럴까?”
“진짜. 못 말려. 뻔뻔한 주제에 이상한데 고집부린다니까.”
“남자의 가오를 네가 어찌 알리.”
“가오?”
“그런 게 있어.”
‘정말 괴짜로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건가?’
녹음실을 앞에 두고 갑론을박을 버리는 리아와 도경을 보면서 뒤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조나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도경 본인은 저리 가볍게 이야기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 정말로 경악스러운 사실이 담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Walk Away]
리아 그라테의 첫 데뷔곡 [Walk Away].
실연당한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떠난 남자에 대한 직설적이지만 위트를 잃지 않은 비난이 담긴 가사를 톡톡 튀는 리듬에 실어 말하며 마지막에는 후련하게 옛 애인의 존재를 떨쳐내는 노래로 10대 20대 여성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며 리아를 스타로서의 화려한 출발을 하게 해준 노래. 그리고 그 노래의 정체불명 작곡가 [Do.G].
3년이 지난 지금에도 10대 20대들 여성들의 손에 꼽는 애청곡일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노래를 만든 작곡가가 바로 도경이란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인.’
조나단은 도경이 까면 깔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라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인 히트곡을 만들고도 별거 아니라는 태도도 그렇고 돈에 대한 욕심도 보이지 않는 그의 행동은 미국에서 금전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그로서는 불가사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진짜 모르겠군.”
그런 불가사의 존재가 이번에 이곳에서 어떤 일을 만들어갈지 조나단은 이젠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도경의 진가는 작곡이 아니라 노래에요.)
(네?)
(그의 노래는 음... 맞아!)
도경의 노래를 한 단어로 수식하려는 리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손가락을 퉁기며 외쳤다.
“Magnificent!”
최고의 극찬을 담은 수식어.
그런 수식어를 받은 도경의 노래 실력에 조나단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두근두근.
녹음실을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나단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