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힐끔.
“쟤들은 또 왜 저럴까나?”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쓴 미소를 짓고 있던 도경은 녹음실 구경하는 와중에 말콤과 윌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직된 분위기. 아니, 칼날이 벼려진 느낌이랄까? 녹음실에 들어온 자신을 향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짜게 식은 눈빛을 던지는 둘의 상태에 도경은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뭐,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계에서도 한국에서도 낙하산 취급을 받은 도경은 저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둘이 왜 자신을 벼르고 있는지도 예상이 갔다. 하지만...
“열받네...!”
중얼.
리아가 화장실을 가는 사이 그녀의 에이전트인 조나단에게 물어보길. 스튜디오 녹음실 하루 빌리는데 1억가량, 저 두 사람의 시간을 빌리는데 2억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나누어도 한 사람당 1억 원이라는 비용이 소모된 셈.
그만한 금액을 사용할 만큼 저 둘이 실력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저런 태도라면 얼마나 그 대단한 실력을 발휘해줄지 의구심이 들었다.
“비싼 돈 쳐 받은 주제에 태도들이 왜 저러는데?”
아티스트로서 자존심 프라이드. 예술혼 다 좋았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용납 안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돈을 받은 만큼, 계약을 맺은 만큼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고한 아티스트이던 무소불위를 휘두르는 왕이든 간에 그것은 변치 않는 약속이다.
돈을 주는 쪽이 갑이지. 받는 쪽이 을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인데 돈을 받은 주제에 자신을 향해 간을 보는 둘의 태도에 도경의 기분은 저조해져 간다.
툭.
“도경이라고 했나?”
“그런데?”
“생각보다 능력이 좋나 봐?”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간 리아를 기다리며 스튜디오 녹음실 안을 살피던 도경에게 유리 벽 너머에 있던 윌리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경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유리 벽 너머에 앉아있는 윌리를 바라보며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한 능력 좀 하지.”
“하하하. 그래? 그거 부러운 걸. 언제 시간이 되면 나에게도 그 테크닉 좀 가르쳐 달라고”
“......”
비웃으며 묘한 어감을 풍기는 윌리의 말에 도경의 표정이 굳었다. 장난기 서린 목소리에 음흉한 시선을 띠고 있는 윌리의 태도에서 자신에 대한 조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쪽 윌리라고 했나?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음? 뭐지?”
“내가 네 친구냐?”
“친구?”
“그래. 친구도 아니면서 왜 그딴 저질스러운 농이나 던지는 거지?”
“하하하. 릴랙스, 릴랙스~. 단순히 조크였다고?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야? 긴장 풀어주려고 내 나름 배려 한 거야.”
도경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윌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손사래를 치며 도경을 애를 다루듯 다독이었는데 그 태도에는 도경의 반응에 대한 당황이라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고찰은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그것에 도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짜증 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너희들은 동양인이 화를 내지 못 할 거로 생각하고 만만히 보는 거냐?”
3년간 여행하면서 느꼈던 서양인들의 우월주의.
안 그런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그런 사람들도 많았다는 게 사실이었다. 동양인에게 호감인 감정을 가지어도 귀여운 애완동물 보듯, 재미있는 물건을 보듯, 동등한 시선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태반이었다.
유리 벽 너머로 자신에게 물어보는 도경을 향해 윌리는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도경을 어리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니야? 미국에 얼마나 다양한 인종이 사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래? 그랬었지. 미안해 윌리. 내가 다양한 나라를 여행을 다니면서 차별받은 경험이 있어 민감하게 굴었나 봐. 사과하도록 하지.”
“하하하.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미국에서 머무를 거면 이 정도의 조크에 익숙해지도록 추천할게.”
“그래. 그렇군. 좋은 조언을 해준 의미로 너의 파트너에게 네가 기분 좋을 수 있도록 내 테크닉을 전수해 주도록 하지. 아마 뿅 갈 거야.”
힐끔.
“그게 무슨, 이...!”
순순히 사과하다 자신의 옆에 있는 말콤을 보면서 피식 웃으며 내뱉은 도경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 뜻을 단박에 파악한 윌리는 인상을 구기며 도경을 노려보았고 도경은 그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응 왜 그러지? 아메리카식 조크잖아? 아, 이게 아닌 거야?”
“하하... 아니야. 아니...! 적응이 빠르군.”
“말했잖아 내가 능력이 좋다고 말이야.”
“하하하. 노래 실력도 그 정도 됐으면 좋겠군.”
도경에게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은 윌리는 얼굴을 붉혔지만, 자신이 한 말들이 있었기에 애써 쿨한 척하며 도경을 향해 비수를 품은 말을 내뱉어 보지만 도경은 가소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피식.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나지막이 내뱉으며 자신감에 가득 찬 도경의 말에 윌리는 눈빛을 빛내며 반응을 보여왔다.
“오? 좋은 자신감이잖아. 말콤 뭘 기다려 사기가 저렇게 충족되어 있는데 워밍업이라도 좋으니 도경의 노래를 들어 보자고?”
“그러네... 리아양이 생각보다 늦네요. 마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아까우니까 가볍게 손발을 맞춰 볼까요?”
“얼마든지요.”
피식.
“좋은 자신감입니다...”
도경의 말에 말콤은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그를 마주하던 도경도 그에게 맞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씨익.
말콤, 윌리, 도경. 서로의 실력에 프라이드를 가진 세 명의 아티스트는 각자 서로들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벼운 탐색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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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land]
낡고 허름한 펍 한 동양인과 서양인이 실랑이하고 있었다.
“조금만 돈을 깎아주면...”
“안돼. 3500달러 하지. 이것도 많이 깎아 준거다.”
“아니. 처음에는 1000달러면 대관할 수 있다면서요? 새벽에 사람 없을 때 운영도 안 하면서 뭘 그렇게 많이 받아요? 2500달러로 해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돌아가던가. 아쉬운 건 그쪽이지. 내가 아닌 듯 싶던데?”
‘젠장.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다름없네. 괜히 영화 촬영한다고 말해서...’
[Holy land]
영화의 첫 촬영을 시작할 로케 장소를 뉴욕 시내에 찾던 와중 마음에 들어 발견한 낡은 술집. 그곳에서 최정훈은 후회막심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배불뚝이 중년 백인 남성을 보면서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도경의 이미지와 딱 알맞은 술집을 찾아 기쁜 마음에 곧이곧대로 영화 촬영에 장소를 대관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들은 점주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세상에 둘도 없는 강도로 변신하였다.
원래의 대관비였던 1000달러를 5000달러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더니 선심 써주는 척 깎고 깎아 3500달러로 최후의 통첩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내 전화번호네. 생각 있으면 연락하도록 하게. 아, 그리고 대관비는 물론 현금으로 가져다줘야 하네. 2시간 안에 연락을 주면 서비스로 영화에 촬영에 쓰일 술값은 10% 할인해줄 테니 잘 생각해보게. 내 말은 끝났으니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게. 장사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말이야.”
“으...”
가게 주인의 명백한 축객령에 최정훈은 인상을 한껏 찡그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테이블에 있는 종이를 순순히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장을 이용한 점주의 바가지 횡포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게 안을 들어섰을 때 단박에 꽂혔던 삘을 무시하기엔 이 가게는 너무나 탐이 난 장소였기에 최정훈은 이미 자신의 마음은 기울인 것을 깨닫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젠장! 정말 눈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인상 좋았던 중년남성이 한순간에 낯빛을 싹 바꾸고 수전노 모습에 최정훈은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가게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술집의 내부를 사진과 영상을 찍어 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점주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 것은 당연하였고 말이다. 그 미소를 발견한 최정훈은 품속에 폰을 집어넣고 표정을 찌푸려 보이며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도경이랑 상의를 나눠봐야겠네. 도경이가 녹음하는 스튜디오실이 어디더라...”
도경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의 주소를 검색하며 가게 밖을 빠져나와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은 최정훈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택시 안에 들어와 시트에 몸을 실었다.
“피곤해 보이시군요. 어디 가시나요?”
“아, 이 주소로 가주세요.”
“후후. 알겠습니다. 참, 관광객이신가 봐요?”
“네... 아니, 제길! 지금 유학생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거죠?”
“후후후. 그렇다고 해두죠.”
“어휴...”
음흉하게 미소짓는 택시기사를 보며 최정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골머리 아픈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뉴욕이란 도시는 홀로 다니기엔 기회를 놓치지 않는 하이에나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 최정훈이었다.
“적당히 하고 가주세요.”
“하하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2시 안에만 가주세요.”
“모시겠습니다~.”
부우웅.
툭.
“진짜... 사람이 살 동네가 아니다.”
출발하는 택시 창가에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기댄 최정훈은 문득 스튜디오 실에서 영화에 쓰일 노래들을 녹음하고 있을 도경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도경이 작업 잘 되고 있으려나?’
얼마 지내지 않았지만, 뉴욕 인심은 그야말로 사납고 야박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권리와 이득에 대해선 철저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스럼없는 그들의 정서를 떠올려보면 도경과 작업할 사람들도 왠지 다르지 않을 거 같아 걱정되었다.
“뭐, 리아도 있으니까 별문제 없겠지... 하긴, 걔가 사고를 치면 쳤지 당할 녀석은 아니니까.”
피식.
“부럽네... 나도 한 번 사고 쳐봐?”
콘크리트 정글.
순했던 최정훈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안에서 숨겨진 야생이 천천히 발동되고 있었다. 나중에 악바리 근성으로 유명해질 최정훈 감독의 탄생은 야박한 인심이 도사리고 있는 뉴욕에서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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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지하철을 기다리네.
발밑에 있는 기타 케이스의 인생을 담았지.
후회 없다고 잘한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깨달아.
그게 무엇이든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말이야.]
공허하고 쓸쓸한 목소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톤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이어나가는 도경의 노래. 특색 없는 평범한 창법인데 희한하게도 음반 CD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가 선명하게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철길을 따라 들어오는 지하철이 보여
어둠 속에 보이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고통들이 보여.
되돌릴 수 없는 여행에 몸을 실을 준비가 되어 있니?]
한 뮤지션의 이야기가 담긴 노랫소리.
뮤지션으로서 희망찰 것 같던 미래는 어느새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현실 속에 사는 것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여행길이라는 것을 말하는 노래의 주인은 도경이 아닌 [Again]란 영화 속의 주인공 카일 이었다.
뉴욕에 상경해 뮤지션으로 살았던 카일의 경험담과 심정이 담긴 노래 [Pain].
그 노래가 도경의 입에서 잔잔하고 덤덤하게 울적함을 담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고통들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받아들일 거야.
많이 아플 거야.
다시, 또 다시 어찌 되었든 간에 너는 고통으로 가득한 어둠 속을 걸어가게 될 거야.
그도 그럴 게 너는...
되돌릴 수 없는 바보인걸!]
아플 것을 알면서도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걸어 나갈 수밖에 없는 멍청한 뮤지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뮤지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뮤지션 이외에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널 사랑했니?
누가 널 좌절 시켰니?
너에게 있는 게 뭔지 말해 봐.
하하.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을걸?]
지독한 자기비하.
우울하기 짝이 없는 가사는 절로 주변 사람의 기분을 축 처지게 만들었지만 도경은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Pain]이란 이 노래는 괄괄한 성격 속에 숨겨져 있는 씁쓸한 카일의 순수한 진심이 담긴 노래였기 때문이다.
[홀로 넌 지하철을 기다리네.
발아래 놓여있는 발밑에 있는 기타 케이스의 인생을 담으면서 말이야.
멍청이...! 넌 되돌릴 수 없는 멍청이야.]
진심을 말할 때는 주변의 분위기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담담히 내뱉고, 내뱉을 뿐이다.
그것이 지독한 자기비하 일 지라도 말이다.
그런 도경의 노래에 스튜디오에 녹음실에 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도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웅.
카일의 무기력함에 도경의 우울함에 모두가 빠지기 시작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