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215화 (215/357)

215화

“후우...”

도경의 짤막한 한숨. 그와 동시에 내려앉는 적막. 노래가 끝났음에도 누구 하나 그 적막을 깨지 못한다. 스튜디오 녹음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도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봐 말콤. 네가 말하지 않았어? 낙하산이라고?”

“음...”

“Shit! 저게 어딜 봐서 낙하산인데? 내 꼴 만 우스워졌잖아?”

“......”

스튜디오 녹음실을 가득 채웠던 도경의 존재감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윌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말콤을 바라보며 힐책했다. 저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 앞에서 이죽거렸던 자신의 꼴이 우습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단순한 낙하산이 아니었어...’

꿀꺽.

윌리의 거센 힐난에 말콤은 아무런 반박도 말을 잊지 못했다. 그는 윌리와 달리 아직 도경의 노래를 듣고 충격에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자기 비하적이고 우울한 노래 [Pain].

모던한 컨트리풍의 색을 띠는 밝고 경쾌한 멜로디 라인 위에 설마 저런 꿈도 없는 희망도 없는 가사를 얹을지도, 상반되는 멜로디 정서에 자신의 감정을 덧씌우는 도경의 노랫소리는 그야말로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낙하산은커녕 말도 안 되는 뮤지션이잖아...”

프로듀서로서 수많은 아티스트를 만나며 발견하고 맡았던 말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유리벽 너머에서 노래를 부른 동양인은 엄청난 뮤지션이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땐 도경이 객기를 부리는지 알았었다.

믹싱이 갓 완성된 트랙이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해 보라고 일단 틀어준 것이었는데 인트로가 끝나자 마자 노래를 불러 젖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경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리고 그가 완곡을 해내는 순간 그것은 객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말콤. 이거 우리가 필요 없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목소리에 손댈 곳이 없는데?”

“쉬. 일단 조용히 해봐. 생각 좀 해보게.”

“빨리하라고 지금 나 엄청 뻘쭘하다고”

소리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완성된 CD 음반 같은 깔끔한 음색, 또렷한 전달력, 그리고 노래에 불어넣은 그만의 짙은 정서.

‘윌리의 말이 맞다. 손댈 구석이 없는 노래였어. 다만...’

끄덕.

윌리의 말처럼 도경의 노랫소리에는 정말로 손댈 곳은 없었다.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말콤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옆에 있는 윌리를 바라보았는데 그를 바라보는 말콤의 시선엔 미안함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 음반에 손댈 구석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

“윌리.”

“응?”

“네가 믹싱해 온 사운드 트랙 말이야...”

“야... 설마?”

“엎자.”

“젠장!”

부정하고 싶은 말콤의 말에 윌리는 짤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말콤의 무례할 수도, 무리일 수도 있는 주문을 윌리가 반박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는 거였다.

그것이 시사한 바는 도경의 노래에 자신의 준비해온 사운드 트랙이 손색이 있다는 것을 윌리 그 스스로가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슬슬 정신 차렸으려나?’

피식.

단 한 번만 부른 노래.

3분 30초의 짧은 시간 안에 도경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다. 의심은 경악으로, 괄시는 존중으로 바꾼 것이다.

자신을 옥죄이는 모든 제약을 부수고 판을 단숨에 뒤집는 것. 그것이 도경의 노래가 지닌 힘이었다.

---

[요구사항이 있습니까? 도경 씨?]

[우선은 쓸데없는 소리들이 많은 거 같은데요? 아마도 제가 아닌 리아를 염두 하고 만든 노래인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욕심이 많이 들어간 거 같은데요?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조금 거슬리네요. 삐까번쩍한 화려한 음반이 아닌 영화 속에서 편하게 듣는 음악이니까요.]

[안 그래도 도경 씨 노랫소리를 듣고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 이미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도경 씨의 목소리에 맞는 트랙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이름을 걸고 약속 드리죠.]

[그럼 감사하죠. 잘 부탁드릴게요.]

[네. 그런 다음 노래의 녹음을 시작하도록 할까요?]

[아, 이번 건 기타가 필요한데 저기에 있는 것들 쓰면 되나요?]

[네. 그쪽에 있는 것들 전부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천천히 준비해 주세요.]

“저게...”

이쪽 업계에서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말콤과 윌리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도경과 그의 의견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열의를 띠는 광경을 보며 조나단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현실인가 싶어 입을 멍하니 벌렸다.

무엇보다 상상도 못 했던 도경의 노래 실력에 이미 그의 가슴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설마 저만한 실력이 있을 줄이야...!’

가슴을 움켜쥐는 아니, 자기의 심장을 그의 색으로 물들이는 노래였다.

무기력한 한편 시니컬 한 우울한 감정이 서려 있는 도경의 노랫소리가 자신의 가슴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Pain].

제목 그대로 고통스러운 노래였다.

“미치겠군.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

에이전트로서 사람을 보는 눈을 자부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도경이 한국에서 활약했던 영상들을 대충 훑어본 자신을 책망하는 한편 조나단은 저 유리벽 너머에서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기타를 건드리고 있는 도경이 정말 자신이 아는 도경인가 싶었다.

숫사자처럼 리아의 저택에서 운동하거나 빈둥거리기만 했던 도경의 면모만을 기억하던 조나단으로선 도경이 자신을 드러낸 3분 30초란 시간은 너무나 짧아 마치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벌컥

“아~. 역시 늦었어!”

“오셨습니까 리아양.”

“조나단!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혹시나 해서 부탁드렸잖아요. 도경이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말리고 저에게 먼저 연락을 하라고 말이에요...!”

“그게, 저도 설마 한 번에 끝날 거라고는...”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여기서 목 푸는 연습을 할 걸...”

뒤늦게 도경이 노래를 불렀다는 소식을 받은 리아는 헐레벌떡 스튜디오 녹음실을 향해 달려왔지만 이미 끝나있는 상황에 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도경의 첫 라이브 노래를 듣지 못하다니 그야말로 속상한 상황의 극치였기 때문이다. 미안함에 난색을 보이던 조나단은 리아의 중얼거림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오늘 리아 씨도 노래를 부릅니까?”

“헤헤헤. 그게... 비밀인데요...!”

녹음실 옆방에서 한창 목소리를 푸는 연습을 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다듬던 리아. 사실 오늘 그녀 또한 도경과 마찬가지로 녹음실에서 노래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도경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래는 [Again] 영화작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도경이 맡은 카일이란 캐릭터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정훈과 리아가 합심해서 캐릭터 설정과 각본을 수정한 덕분에 그녀가 맡은 캐릭터 키이라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 가능해졌다.

‘후후후. 기대해 도경. 이번에는 빼지 못할걸?’

[Walk Away]

리아가 이번에 노린 진정한 깜짝 이벤트.

영화 속에서 두 남녀가 노래로서 서로 교감을 나누는 아름다운 장면 속에 부를 듀엣곡은 리아의 첫 히트곡이자 도경이 그녀에게 만들어주었던 [Walk Awa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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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아저씨 적당히 하고 가랬잖아요. 시간 안에 도착 못 하면 각오하세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손님.”

“아~ 진짜...”

‘영상 찍으려면 늦으면 안 되는데...’

리아가 자신의 깜짝 이벤트에 기대감에 신나 하고 있을 때 그녀와 이번 일을 꾸민 최정훈은 노란 택시 안에서 희희낙락한 택시기사와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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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빛을 붙잡고 싶어!

너의 살 내음 영원히 붙잡고 싶어.

달뜬 신음으로 내 이름을 입에 담아 불러줘.]

“미친...!”

“Fuck! 말콤 진짜 저 동양인 뭐 하는 놈이야? 저게 말이 돼?”

“몰라... 말 걸지 마라. 머리 아프다. 진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눈 감고 들어보라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고...!”

윌리는 이제는 입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도경의 노래를 듣고 있었고 말콤은 윌리의 말을 듣더니 자신의 안경테를 테이블에 집어 던지며 눈을 감고 도경의 노래를 감상하였다.

[너의 울음소리에 독한 위스키 한잔.

OH~ 이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야.]

오싹.

‘그렇군. 정말로 소름이 돋는군. 정말 완전 다른 사람의 노래잖아.’

눈을 질끈 감고 도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말콤은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 톤, 습관, 음색, 감정 모든 게 달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렇지? 아니, 흉내 내기나 모창이라기엔 너무 진짜 같잖아. 저건 너무 미친 거라고!”

영화주제곡 [Pain], [Say something], [Again].

최소 4시간을 잡았던 영화에 나올 주제곡들의 녹음시간은 1시간 채 걸리지 않고 이미 예전에 마친 지 오래였다. 2, 3번씩 다양한 버전으로 도경의 노랫소리를 땄음에도 모든 것을 한 큐에 끝내버리는 도경의 미친 노래 실력에 가능한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서 경악할 일은 없다고 믿었는데 영화 속에 자신의 노래를 빼앗은 뮤지션 조연들의 노래를 도경이 대신 부른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혼이 달아나는 줄 알았다.

도경의 입에서 완전 다른 사람의 목소리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허스키한 쉰 소리가 특색인 걸걸한 30대 후반의 것으로 시작해 앳된 10대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도경의 목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윌리. 더욱 미친 것을 가르쳐 줄까...?”

“뭔데? 저거보다 더 미친 게 있다고? 질 나쁜 농담은 그만둬 말콤. 오늘만큼 이렇게 놀라본 적은 처음이란 말이야. 심장에 안 좋아.”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 전부 저자가 만들었다고 하는군.”

“뭐!?”

“모두 다 저 도경이란 자가 작곡한 거라고”

“미친! 그게 확실해?”

너무나 놀란 나머지 녹음 장비에 손을 떼고 말콤을 바라보는 윌리. 말콤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들이 전부 좋아서 잠깐 쉬는 시간에 작곡가가 누구냐고 물어봤지. 그런데 어이없게도 본인이 모두 작곡 작사 한 거라 하더군.”

“진짜냐... 도대체 저런 녀석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이제는 놀랄 기력도 없는 윌리는 두 손 들어 자신의 뒷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감고 집중하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도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비범하다 못해 이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외계인도 아니고 말이야. 진짜 미쳐버리겠군. 저런 것을 보면...’

윌리는 도경을 보면서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는 한편 앞으로 자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나를 자랑할 수 없잖아...!”

끄덕.

“이번만큼은 너를 동정하게 되는군. 윌리.”

“...”

천재라던가 일류라고 지칭하는 것을 즐겼던 윌리는 앞으로 자신의 큰 즐거움이 사라질 것을 깨달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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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당!

“미안 리아 많이 늦었지?”

“늦었어! 정훈! 도경이 녹음 다 끝마치고 가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알아?”

모두가 도경의 노래에 홀려서 시간을 빠르게 보내고 있을 때. 리아는 초조함 속에서 최정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을 한참을 넘어서 나타난 최정훈을 향해 그녀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굴리며 질책하였다.

“아니 택시 기사가...!”

“됐고 어서 준비해야 해. 도경의 노래가 끝이 얼마 안 남았어!”

“그, 그래? 서둘러야겠네! 장비는?”

“저쪽에 모아뒀어!”

“알았어! 바로 준비할 테니까 리아 너도 바로 튀어 나갈 수 있게 스탠바이 해줘.”

“알았어 부탁할 게.”

타다닥.

무언가를 구석에서 서둘러 꾸미는 둘.

그 둘의 소란스러운 모습에 모두가 의아한 시선으로 던지고 있었지만, 유리 벽 너머에 집중하며 녹음을 하고 있던 도경은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그런 도경을 보며 리아와 최정훈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씨익.

매번 자신들을 놀래 줬던 도경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놀래켜 줄 차례였기 때문이다.

“준비됐어 리아! 지금이야 들어가!”

“라져!”

타다닥!

특수부대가 진압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녹음실로 문으로 달려간 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호쾌하게 녹음실 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열어 재꼈다.

쿵!

거칠게 열어 재끼는 문과 동시에 도경을 향한 리아와 최정훈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가 벌어졌다.

리아 & 도(Do).

[Again]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행보는 바로 이 이벤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모두가 두말없이 입을 모아 말하며 [Again]은 음악영화 역사상 모범적인 바이럴마케팅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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