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많이 놀랐나 보네.”
피식.
티를 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명백하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며 대기실 밖으로 나가는 카터를 떠올리며 도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도경의 경호원을 자처하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놀랄 수밖에.”
“왜? 그래도 저쪽은 세계랭커인데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가?”
갸웃
“명색이 트레이너다. 네 근육을 본데다가 만져보기까지 했는데 진작에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 게다가 상대 선수는 얼마 안 있으면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치러야 하는 몸인데 혹시나 부상을 얻으면 매우 곤란하니까 말이야.”
“아, 그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아쉽다. 링에서 놀래켜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
물끄러미
“응?”
도경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바라본 경호원은 그를 무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을 느낀 도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저 신기해서 말이다.”
“뭐가?”
“어떻게 해외만 나갔다 오면 이렇게 사고를 치는지 신기해서 말이야. 영화 촬영하러 간다고 해놓고 여기서 차세대 챔피언과 복싱을 하는 게 정말 말이 안 된다 생각해서 말이야. 아니, 그나저나 나와 연락을 끊는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야 한국에서 그렇다는 거지. 굳이 외국에서까지 그럴 필요 없잖아. 그리고 그거 알아? 나보다 그쪽이 더 막장인 거? 편히 살 수 있으면서도 사이비 종교와 맞서 싸우는것을 자처하는 당신도 참 말이 안 되거든? 무슨 다크 히어로냐?”
“정말 입담은 못 당하겠군. 그나저나 막장이라...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
피식.
“어, 지금 웃었어?”
“?”
사내의 예상치 못한 웃음에 도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몇 년을 봐 왔지만, 그가 진심으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 봤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없는 농담에도 무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관하던 사내가 작지만 웃음을 짓는 것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뭐지?”
“아니. 지금 천하의 김강인씨가 지금 미소를 지은 걸 봐서 말이야.”
“실례군. 나도 웃을 줄 안다만.”
“아니, 아니! 진짜로 미소 짓는 모습은 처음이잖아. 나는 고독하다. 고로 존재한다 하는 사람이 당신이잖아. 이거 아주 놀라운걸?”
“실없는 소릴 하는군.”
피식.
“봐봐 또, 웃잖아. 어이! 어떻게 된 거야?”
“음...”
이제는 자신의 추궁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가를 쓸어올리는 김강인을 보던 도경은 그가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근래의 그의 주변에 심경에 변화를 줄 만큼 무언가 큰 변화가 있나 생각하던 도경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혹시나 해서 자신이 추측한 것을 찔러 보았다.
“혹시... 강운이 때문이야?”
움찔.
“걔가 거기서 왜 나오나.”
“맞네. 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지 알았더니 팔불출 형 기질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
정곡.
복수만을 생각하며 냉혹한 킬러들과 용병을 다루는 조직의 수장이 배다른 형제가 등장에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김강인 그 자신조차도 자기의 저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가?’
피식.
김강인과 김강운.
두 무뚝뚝한 배다른 형제를 떠올린 도경은 능글맞은 웃음을 터트리며 김강인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내 매니저도 빼앗아서 강운이 옆에다 붙이고 이거, 이거 강운이가 부러운데? 팔불출 형”
“으면... 좋겠군.”
“어? 뭐라고?”
“링 위에서 그 주둥이 좀 처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라라. 그거 경호원 실격 발언 아니야?”
“아니꼬우면 잘라라. 아니, 부디 그래 줬으면 하는군.”
“에이~. 이렇게 실력 확실한 사람을 어떻게 잘라?”
“흥.”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격식 없이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두 남자.
처음에는 좋지 못했던 첫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서로가 서로들을 인정하는 사이로 발전한 그 둘 사이엔 유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살아왔던 환경도 걸어가는 길이 달랐음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둘의 묘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조나단은 마치 그 둘의 사이가 전우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도경의 몸을 보며 조나단은 도경이 왜 이번 내기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했길래...!’
꿀꺽.
“정말로 10라운드 버틸지도 몰라.”
가운을 걸친 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도경의 근육을 보며 조나단은 남자로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다면 가드만 단단히 한다면 로이드에게서 버티는 것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조나단은 조심스럽게 예측해 보았다.
똑똑똑!
도경이 김강인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고 그런 도경을 보며 조나단이 승리를 점치고 있는 가운데 대기실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경님. 링 위로 올라올 시간 되셨습니다.]
“시간이 되었다는군.”
“그러네...”
스윽.
김강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경은 김강운과 조나단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세계랭커인 복서를 지금 상대하러 가야 하는데 도경의 얼굴에선 미소만 가득할 뿐, 긴장이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 그럼 가볼까?”
팡팡.
“아...!”
붉은 글러브를 힘차게 치며 걸음을 옮기는 도경의 뒷모습을 바라본 조나단은 자신도 모르게 이번 복싱의 승자가 누구인지 점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예상에 조나단은 그저 신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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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짝쿵짝!
[주의 사항은 이쯤 알려 드렸고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이벤트를 장식해줄 선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삐이익!
짝짝짝짝!
거대한 저택 옆에 마련된 스티븐의 전용 체육관.
평소에는 스티븐이 농구를 하거나 몸을 만들기 위한 헬스운동을 하는 곳인데 이번 이벤트를 위해 특별히 개조한 덕에 현재 이곳은 훌륭히 복싱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말로 TV에서나 보던 복싱장 링이 체육관 가운데 완성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스티븐이 직접 초대한 셀럽이 관객석에 메꾸며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가운데로 웨이터로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나르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청코너~! 그야말로 초호화 게스트입니다. 23전 23승 23KO의 무패의 기록을 기록하며 얼마 안 있어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있는 떠오르는 신성 로이드 와일더~!!!]
와아아아!
쿵쿵!
사회자의 말과 동시에 자신의 주제곡에 맞춰 등장하는 로이드 와일더. 그를 알아본 셀럽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권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로이드 와일더가 누구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복서 출신으로 요즘 화젯거리인 셀럽이 바로 로이드 와일더였기 때문이다.
짝짝짝!
“이거 죽이는걸! 설마 로이드가 이 자리에 나올 줄이야!”
“스티븐 준비 제대로 했구나”
“하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적은 숫자였지만 이미 좀전의 파티에서 비싼 술들을 한 잔씩 다들 걸친 상태였기에 그들의 열기는 많은 사람 못지않게 뜨거웠다. 링 위에 올라와 몸을 풀고 있는 로이드를 향해 모두가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자, 그럼 로이드를 상대하는 홍코너 대전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런...! 조금 손색이 있는 대전자로군요. 그래도 그래도 나름 재밌는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소개를 하자면 요즘 리아 그라테의 남자로 주가를 올리는 동양인으로 스티븐에게 한 방 먹이고 이번에 악연을 맺은 사람입니다. 이런 건드릴 사람이 없어 스티븐을 건드리다니 애도를 표합니다.]
하하하.
사회자의 넉살에 관중석에 앉은 셀럽들이 웃음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스티븐에게 한 방 먹인 리아의 남자가 누구인지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바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해 마련된 자리인지 사회자의 설명을 듣자마자 깨달은 상태였다.
보통은 이에 눈살을 찌푸릴 상황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셀럽들은 모두 스티븐이 손수 초대한 사람으로 그와 어울리고 다닌 만큼 정상적인 성정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상황을 파악한 셀럽들은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링 안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대는 해봅니다. 합의금 350만 달러를 몸으로 때운다며 당당하게 이번 경기를 제의한 장본인이니 말입니다. 덕분에 이런 재미난 경기가 열리게 되었으니 모두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세요.]
하하하!
[홍코너 배짱 좋은 동양인 도경을 소개합니다!!!]
쿵쿵!
타다다닥. 휙!
사회자의 안내와 동시에 강렬한 사운드를 지닌 노래가 터져 나오고 가운을 벗어 던진 도경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링 위에 단숨에 올라섰다.
붕붕붕붕! 휙!
척!
와아!
그러면선 어디서 본 게 있는지 오른손 왼손 쇼트어퍼를 좌우로 번갈아 휘두르며 우스꽝스럽게 훅으로 마무리하며 말없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리는 쇼맨십을 선보였는데 예상치 못한 그의 쇼맨십에 셀럽들이 흥미로운 반응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저 동양인 꽤나 유쾌하잖아?”
“하하하! 생각보다 재밌는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휘유~. 몸 죽이는데?”
“섹시하다!”
소문만 무성했던 도경을 실물로 직접 보는 셀럽들은 그를 향해 하나둘 품평을 내뱉기 시작했고 그런 도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로이드는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빠득.
“배짱 하나는 좋구나...”
자신을 앞에 두고 복싱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경박한 퍼포먼스를 펼친 도경을 향해 로이드가 처음으로 적의를 보이며 낯빛을 굳히고 만 것이다.
‘강단이 있는 녀석이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놈이었어.’
비즈니스라고 해도 자신을 원숭이 구경하듯 둘러쌓고 있는 관객들과 그들의 위에서 으스대는 스티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가운데 자신과 주먹을 섞을 상대방마저 깐족거리니 복서로서 지니고 있던 자존심이 상해 버리고 만 것이다.
꾸욱.
“어차피 잘 됐어.”
도경을 보는 로이드는 글러브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자신도 사람인데 권투의 생초짜인 도경을 두들기기는 미안했었는데 도경의 행동 덕분에 마음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10라운드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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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 1. Fight!!!]
땡!
와아아!
격투 게임도 아니고 사회자의 경박한 1라운드를 알리는 소리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 질만 했지만, 로이드의 시선은 먹이를 낚아채기 전의 맹수처럼 도경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무수한 반복 학습을 통해 링에서 울려 퍼지는 벨 소리를 들으면 사냥개처럼 상대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로이드였다.
스으윽!
“.....”
힐끔.
‘그나저나... 정말로 몸 하나는 제대로 미쳤군.’
로이드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도경의 몸을 살피었다.
자신의 트레이너이자 코치인 카터가 동양인이 심상치 않다고 경기를 취소하자고 말을 했을 땐 그가 자신 몰래 술을 마시고 취해서 내뱉은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가 걱정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복서가 아니다.’
탄력과 윤기를 머금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오밀조밀하게 엮어있는 도경의 근육들을 보며 로이드는 감탄했지만 딱 거기까지라 생각했다.
도경의 발달 된 근육들을 살펴본바 그는 복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자신에게 주먹을 닿는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자신에게 그저 단단한 샌드백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Hey!”
“음?”
자신의 몸을 살피는 로이드의 눈짓을 보며 도경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내 몸 죽이지?”
씨익.
“진짜 제정신이 아니군?”
“그런 말 자주 들어.”
피식.
도경의 글러브 터치의 제안.
로이드는 도경의 객기인지 만용인지 모르는 그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도경이 내민 글러브에 자신의 글러브를 가져다 대었다.
투욱!
앞으로 자신에게 흠씬 맞을 상대방의 마지막 배려인 로이드의 글러브 터치. 그리고 그가 글러브를 도경의 글러브의 때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휙!
팡.
“!?”
저릿저릿!
눈 깜짝할 새에 무언가 자신의 코끝을 강타하는 미미한 타격에 로이드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뒤늦게 도경이 자신을 향해 잽을 뻗었다는 사실에 그는 본능적으로 가드를 올리며 자세를 취하려 들었다.
팡팡!
“뭐?”
무수한 연습과 실전을 통해 만든 로이드의 방어 기제가 적신호를 알려 왔다.
그도 그럴 게 가드를 완전히 올리기도 전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도경의 잽과 스트레이트에 그의 뜻대로 가드가 취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휙휙!
팡팡팡! 퍽! 퍽!
투두두둑!
“으윽!”
아니, 자세를 못 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경의 공격에 그의 가드가 해체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날아오지만, 상하좌우 뱀처럼 교묘하게 휘어 들어와 퍼붓는 그의 연타에 로이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이드! 백스텝!!! 뭘, 멍하니 처맞고 있어! 발 쓰란 말이야!!!”
쾅쾅쾅!
“익!!!?”
정신없이 뻗어오는 도경의 주먹세례에 뒤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코치 거친 목소리에 로이드는 백스텝을 밟음과 동시에 몸을 재빨리 틀었다.
‘젠장! 내 불찰이다...! 순간 방심했어. 녀석은...!’
“!?”
자신의 어이없는 실책을 자책한 로이드는 가드를 취하는 와중 도경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없어!!?’
“로이드 아래다!!!”
‘아래!?”
끼긱!
“!!?”
카터의 목소리. 그리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마찰음에 로이드는 경악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리를 벌렸음에도 바로 자신의 코앞의 거리에서 기척도 없이 자리 잡고 있는 도경은 그야말로 유령 그 자체였다.
휘이이익!
로이드가 도경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거대한 붉은색의 글러브가 그의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똑바로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뻐어억!
“로이드!!!!”
자신의 턱을 강타하는 도경의 어퍼.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로이드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무릎은 어느새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
[Down!!!]
[1, 2, 3, 4...!]
5초.
글러브 터치 후. 5초였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모두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무릎을 꿇은 로이드와 유유히 자신의 코너로 걸음을 옮기는 도경을 바라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