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TOP.10 Project:신고식]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서는 나의 용기.
그리고 너의 귓가에 속삭여]
숨소리까지 들리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목소리가 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조명과 스모그뿐인 단출한 무대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여성 연습생 참가자의 미모와 노래는 존재감을 발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모습을 바라본 게스트로 초대된 연습생은 연신 감탄하는 중이었다.
“우와~!”
“쟤가 노래를 저렇게 잘 불렀었나?”
“어떻게 저렇게 바뀌지? 대박...!”
“허...”
이번 [TOP.10 Project] 신고식에 관객 객석으로 초대된 사람들은 참가자의 소속사 관계자들과 연습생.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다른 기획사 관계자들과 연습생들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앞의 무대에 서 있는 참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 발그레해진 볼, 입가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채희진이라는 연습생 참가자의 눈부신 변화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습 1년 차.
소심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우수를 지닌 모습을 보였던 17살 소녀.
[TOP.10 Project] 방송 2회차에 오디션 당시에도 약간은 심오하고 어두운 노래를 불렀던 독특한 캐릭터로 남았던 소녀가 미운 오리 새끼에서 아름다운 백조로 탈바꿈하듯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밝은 빛 아래 서 있었다.
“분명 음침한 애였는데...”
“희진이가 저런 면이 있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의 눈부신 변화와 성장에 놀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본 소속사 식구들이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저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아이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소녀를 알고 있는 소속사 사장도, 트레이너도, 같이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연습생들도 그 소녀의 예상치 못한 모습에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리며 감탄할 뿐이었다.
“진짜 지금 봐도 새삼스럽다. 어떻게 저렇게 바뀌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네.”
“그저 조금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죠.”
끄덕.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채희진이라는 소녀를 보며 도경은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이며 소심하고 어두웠던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였다. 편부모 가정에 소심하지만 이쁜 얼굴 덕에 아이들에게 왕따 당한 경험으로 어두워진 성격으로 구성된 17살짜리의 소녀는 항상 위안받거나 조금은 어딘가 울적하고 심오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래서 도경은 울적한 소녀에게 한마디 했다.
(왜 너만 우울하고 피해자야? 아무도 안 알아준다니까? 그런 건 조금 억울하지 않아?)
(네?)
(차라리 네가 우울하게 만들란 말이야. 행복하게 노래해.)
(네?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우울하게 만들라고요?)
(그래. 사람이 가장 우울해할 때는...!)
“남이 행복해 보이는 거지.”
중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보다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자신이 괴롭힌 상대방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은 몹시 배 아파할 것이라는 도경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지닌 지론은 17살 어두운 어린 소녀의 인식을 비틀었다.
[웃을게.
너를 보며 환하게 웃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그 누구보다 즐겁게]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기분 좋아...!’
그것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창법에 변화를 주었고,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로 숨기려 했던 이목구비를 환히 드러내었고, 풍부한 표정과 제스쳐를 배웠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맞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입어보지 않은 옷이라는 것을 말이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변화한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는 활짝 웃는다.
‘못된 X들아 보고 있냐? 이번에도 실컷 쿵쾅쿵쾅 거릴거니?’
씨익.
자신의 활약에 배 아플 그들을 생각하며 차오르는 행복감에 소녀는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다. 분명 행복해하는 과정은 무언가 이상했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둠을 떨쳐내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노래를 부른 소녀를 향해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하암~ 피곤해...”
모두가 소녀의 놀라운 변화와 성장에 기쁨과 축하의 박수를 치는 훈훈한 상황. 믿을 수 없게도 도경은 하품 지었다. 다행히 카메라를 의식하기에 입을 꾹 다물고 하품하였기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도경의 반응은 조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의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낸 당사자치고는 덤덤하다 못해 성의없는 리액션 이었기 때문이다.
“빡시다...!”
아무리 무신경한 성격이라고 하지만 조금은 성의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도경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빡시다고 말하는 도경을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퀭한 눈, 하품에 눈가에 맺힌 눈물, 미묘하게 홀쭉해진 볼. 그것은 명백히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아암~.”
쩌억.
매일 공연을 열어도 지치지 않던 도경. 그는 현재 놀랍게도 피곤한 상태에 찌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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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시간 전]
아이들의 트레이닝을 다 끝내고 무대를 앞둔 도경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겪었었다.
참가자들의 원활한 트레이닝과 멘탈케어를 위해 연습생 참가자들과 함께 합숙소에 머물러 지내는 멘토 도경.
보건 선생님처럼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고 만날 수 있는 멘토의 존재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시스템이었고 [TOP.10 Project]의 ‘연습생과 땀 흘리는 멘토’라는 슬로건처럼 멘토와 같이 합숙하는 참가자들은 평소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무대를 앞둔 전날이었다.
(인대가 늘어났답니다 당분간은 춤을 추기 힘들답니다. 어쩌죠...!?)
(무대 위에 올라가기 무서워요. 사실 저 무대 공포증이에요...!)
(저, 중도하차해야 할 듯싶습니다.)
(제가 내일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도경 씨. XX 소속사에서 계속 전화 옵니다.)
평상시처럼 트레이닝과 마지막 점검을 거치고 무대를 앞둔 전날. 무대를 앞둔 그 날 온갖 병맛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라고 했는데도 꼭 청개구리처럼 연습한다고 무리해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간 녀석부터, 심상치 않은 과거 때문에 중도하차를 선언하는 연습생, 비장의 무기라고 생각했던 연습생이 알고 보니 무대 공포증을 지닌 것까지 정말 셀 수 없는 사건 사고가 무대를 앞둔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복합 다발적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걔는 왜 연습하라고 할 때 잘하지 갑자기 무리하고 난리야? 일단...!)
(무대 공포증? 그럼 눈 감고 노래만 불러. 그건 할 수 있지?)
(뭔 일인데? 중도에 하차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유는 말해주고 가야 하지 않을까?)
(너는 복권이야. 복권 당첨될 걸 알고서 긁어? 일단 그냥 긁으라고!)
(전화 바꿔 주세요. 그냥 들이박아야지. 굽신거려주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트레이너와 제작진들 모두들 모아주세요!)
수많은 돌발상황.
그 모든 일을 수습하며 선두에 서서 제작진과 함께 진두지휘하는 도경은 그야말로 역전의 장군이 무색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연습생들과 제작진들은 모두는 그날의 도경을 보면서 도경이 [TOP.10 Project]이란 프로그램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도경이야말로 진정한 멘토이다!’
온갖 일 처리를 하느라 밤을 새우고 다음 날 리허설하느라 한숨도 못 잔 덕분에 촬영 중 연신 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도경이었지만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지금 모두를 감탄케 하는 무대. 이 무대를 하나부터 열까지 이끈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그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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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모니터링 대기실.]
“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어? 믿기지가 않네.”
“그러게요. 리허설에도 봤지만, 저 언니도 그렇고 모두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처음 연습 때 기량과 전혀 다르게 향상되었잖아요. 저 조금은 자신감 잃었을지도...!”
“뭐래? 네 개인 무대도 창작 안무로 극찬받으면서 활약했잖아?”
“헤헤헤. 그렇죠? 솔직히 끝내줬죠? 이게 다! 도경 선배님 덕분이라니까요? 그래도 같은 소속사 후배라고 꼼꼼히 디테일 잡아주시던데 감격이었다니까요.”
“에휴...! 태클 걸 힘도 없다. 그나저나 후반 무대라고 좋아했는데 이러다가 나 망하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세요! 수미 언니 잘할 거예요! 명색이 [JY]에이스인데 파이팅!”
“유진이... 너, 일부러 부담 주는 거지?”
“어? 눈치챘어요?”
“이게-!”
“꺅!”
“”
‘그래! 나 전수미야! JY연습생들 사이에서 에이스! 내가 다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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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박도경...!”
중얼.
무대 대기실 자신들의 경쟁자지만 함께 같은 연습실을 공유한 동료이기도 한 다른 연습생 참가자들의 무대를 보며 많이 술렁이고 있는 대기실 속. 전날 밤 중도하차를 알리기 위해 멘토인 도경의 방을 찾아갔던 강백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참가자들의 무대를 보며 도경을 향해 복잡함 심정이 담겨있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경이 연습생들과 함께 땀 흘려 만든 무대는 정말로 훌륭해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비참해지네...”
사실 강백현은 도경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일부러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수많은 방황 생활. 자신의 소속사를 만나고 나서 그 자신의 꿈은 먼 나라의 이웃 나라의 것처럼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만큼 도경이란 존재는 그에게 말 못 할 씁쓸함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잡을지, 포기할지 무대 위에 올라서서 결정하세요.)
“......”
긴 대화 속. 마지막에 나누었던 그 말이 강백현의 귓가에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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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 저 형이 저렇게 춤을 출지도 알았나?”
우드득
“그거, 참 재밌어지네...”
각자가 예상치 못한 무대에 술렁이며 서로들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한 사람. 한 참가자 만큼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파이팅이 넘치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는 [TG] 출신 지현진.
우승 못 하면 [TG] 에서 퇴출당한다는 조건으로 뒤로 돌아갈 곳 없이 직진만을 밟고 있는 지현진은 자신의 경쟁자들의 놀라운 기량으로 무대를 펼치는 것에 초조해야 할 상황에 속에서도 놀랍게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1위는 내가 한다...!’
빠득.
오기인지 천성인지 모르지만, 필사적으로 데뷔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웃으면서 태연하게 1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봐서는 지현진은 정상적인 신경의 보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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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누군가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비 맞은 것처럼 덜덜 떨면서 타 참가자 무대를 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니, 초조하다 못해 핏기가 가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얼굴이 하얘질 대로 하얘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비틀.
이미 절반이 넘는 참가자가 [신고식]을 거쳐 갔지만 믿기 힘들게도 그 누구도 실수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다 못해 감탄할만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심사평은 모두 다 칭찬 일색이어서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그녀는 더욱더 부담감이 가중되고 있었다.
벌떡.
타다다닥.
“웁...!”
급기야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기실을 벗어나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웩. 쿨럭쿨럭.”
부르르.
“눈 딱감고 부르라고?”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하는 그녀. 어딘가 몸이 안 좋나 싶어 보였지만 사실 그녀의 몸은 매우 건강하다. 다만 그녀에게는 아이돌 지망생으로서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바로 [무대 공포증]이란 치명적인 비밀이 말이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이름은 박수현.
LSM 연습생이었던 전적과 얼굴만으로 5분도 안 돼서 합격을 받아 화제가 된 그녀는 울상지으며 변기 손잡이를 내리며 물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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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곤해...! 언제 끝나냐?”
중얼.
대형기획사 출신이던, 출신 불명의 연습생이던 각자의 고민과 갈등을 지니며 어린 참가자들이 무대를 마주하며 비장하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도경은 그저 피곤함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끝나라...”
스스로가 열흘간 온갖 고생하고 만든 신고식 무대에서 노력해왔던 자신들의 끼와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박수를 받는 연습생들의 모습은 멘토로서 보람차고 흡족할 만도 하련만 도경의 얼굴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한 점 없이 그저 투덜거리며 무대의 끝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야 내가 무대에 오르지. 않겠냐 애들아.”
지금 열리는 무대의 타이틀은 [신고식].
도경이 연습생 참가자들을 위해 손수 마련한 신고식 무대.
그 무대의 주인공은 연습생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신고식은 식을 치르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식을 자행하는 자들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하아암~.”
입을 쩍 벌리 하품을 하며 자신의 무대를 기다리는 도경.
누군가 도경을 진정한 멘토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잠시 보류하는 게 좋을 듯싶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