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낮았던 기온은 풀려 날은 따스해지고 이제는 봄이 지나 화창한 5월의 날씨로 진입한 시점.
날이 화창한 만큼 사람이 활동적으로 변할 것 같지만 생각외로 그리되지 않는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두 남자처럼 말이다.
“아아...! 날이 좋아 무작정 나왔는데 이거 너무 잉여 같지 않냐?”
“그러게. 할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왜 불렀냐?”
“응? 그냥 할 거 없어서.”
“미친. 내가 쉬운 놈으로 보이냐? 할 거 없이 부르고 지랄이야.”
“풋. 백수 주제에 웃기시네.”
“백수 아니거든? 구직 활동 열심히 하는 취준생은 백수가...”
“그래서 얼마 버는데?”
“......개자식. 너는 철밥통 찼다 이거지?”
“푸헤헤헤. 고졸에서 상황역전인데 이 정도 생색내야지. 꼬우면 너도 공시생 준비하던가”
“하, 인생...”
“하하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친구들의 대화
할 거는 없지만 집에 박혀있기는 싫어 밖에 나온 두 남자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하. 그나저나 날씨 엄청 좋네. 뭐 하고 놀지?”
“피방 가던가.”
“야! 햇빛 쬐로 나왔는데 어두컴컴한 곳으로 가면 의미 없잖아!”
“아, 그럼 뭐 어쩌라고? 고추들끼리 손잡고 한강이라도 가?”
“새끼 얻어먹을 거 다 얻어먹었다 이거냐?”
“뭐래? 누가 보면 엄청 비싼 거 사준지 알겠네. 만 원짜리 고기 뷔페 데려간 주제에 생색까지 내기냐? 철밥통 수준 보소.”
“야. 말이 철밥통이지 의외로 박봉이라고. 생각보다 돈이 안 모여.”
“지랄. 썸녀한테 호구 짓 하다가 돈 없는 거 내가 모를까 봐?”
“윽...! 그걸 어떻게?”
“SNS는 인생의 낭비랬지. 네가 레스토랑 같은 곳을 가는 사진 올리면 뻔할 뻔자 아니냐?”
“젠장!”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둘은 상처뿐인 대화를 나누며 이내 다시 늘어져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가자니 뭔가 아쉽고 평소대로 피시방이나 코인 노래방에 가기엔 너무나 영양가가 없었다.
“영화나 볼까...”
“영화? 요즘 뭐, 볼 영화 있냐?”
“몰라. 요즘 영화관을 안 가본지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데? 잠깐 기다려봐 검색해볼게.”
친구들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두 사람 다 여자가 있는 것도,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기에 자연스레 시간을 보낼 소재로 영화 이야기를 꺼내더니 이내 요즘 개봉하는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그나마 영양가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영화관람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어디 보자. 음...! 볼게 생각보다 없네?”
“그러네. 재밌어 보이는 영화들은 이미 간판 다 내렸네.”
“아, 짜증나...”
“그나마 볼만한 게 8번 방의 기적? 상영관도 많고 평이 좋은데?”
“그래 봤자. 국산 영화지. 딱 봐도 웃음 주다가 마지막에 신파극으로 눈물질질 짜게 만들 영화네. 이젠 지겹다.”
“하긴. 돈 주고 보긴 아깝다. 그럼 이대로 파해?”
“잠깐만 일단은 마저 보고...”
개봉한 영화마저도 영양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는 두 남자. 그 둘은 과감하게 상영관에서 밀어주고 있는 영화를 걸렀다.
30대를 바라보는 20대 후반. 어느 새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밀어주는 한국 영화는 자연스레 거스르게 되는 두 남자였다.
범죄물, 조폭물, 국뽕, 신파극. 또는 저예산인 한국 영화 스타일에 물려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이 영화가 개봉했어? 대체 언제 개봉한 거야? 개봉한다는 홍보 못 본 거 같은데 희한하네...”
“뭔데? 음...? Again? 나는 처음 들어보는데? 아는 영화야? 포스터로는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음악영화인가?”
“어. 음악영화야.”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 빈 무대가 풍경인 사진 위로 굵은 자막으로 심플하게 [Again]이라고 찍혀있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음악영화일 것 같다고 추측하는 친구의 말에 어게인을 알아보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있잖아. 박도경이 이번에 찍었다는 영화”
“아아! 그 영화? 들어는 봤지. 헐... 근데 그게 벌써 개봉했어? 아직 찍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어. 그제 개봉했네.”
“어디 봐봐.”
도경과 리아 그라테의 썸 타는 사건 때문에 한국에 처음 알려지게 된 영화 [Again]. 이후에도 음악과 영상 스틸로 꾸준히 화제가 되며 주목을 모았던 영화였기에 두 남자의 기억 속에 [Again]에 대한 정보는 아직 남아 있었다.
“어때? 재밌으려나? 독립영화라 조금 걸리긴 하는데 말이야.”
“음... 리뷰 보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일반적인 독립영화처럼 지루하진 않은 것 같고 평점도 높네.”
“리뷰말고 영화 예고편 봐봐. 영화 때깔 보면 견적 나오겠지.”
“그러는 게 낫겠다. 어디 보자 여기 있네!”
도경이 출연한 영화 [Again]이 볼만한 가치가 있나 없나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이내 영화의 메인 예고편을 보기로 했다. 예고편 하나로 영화가 어떤 영화일지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툭!
띠리링!
와아아아!
“......!”
손가락으로 건드린 재생 버튼.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과 노랫소리.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도경과 리아 그라테의 모습이 화면에 흘러나온다.
쿵쿵!
“오! 끝났다.”
[Again]의 짧은 예고편이 끝이 나고 조금 전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사내의 표정은 전과 후가 확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뭐야 이거 꿀잼 각인데?”
“각이다! 보러 가자. 리아 그라테 진짜 이쁘네.”
“크흠. 그래. 맨날 상업영화만 보는 것보다 독립영화에도 봐주는 게 문화인으로서 소양...”
“개소리하고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 보니까 시간 없다. 빨리 일어나.”
“흥! 지가 돈 낼 것도 아니면서 난리야.”
“니가 불렀지 내가 불렀냐? 취직하면 더러워서라도 갚는다.”
“갚는다고 너가 분명히 말했다. 안 갚기만 해봐라.”
“어휴! 이 철밥통 새끼. 민원 넣어버릴까 보다.”
1분 30초의 남짓의 짧은 시간이 가져온 변화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대단한 게 맞았다.
할 게 없어 카페에서 빈둥거리며 투덜거리기만 했던 두 사내를 자리에서 순순히 일으켜 영화관으로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별다른 마케팅이나 홍보전략도 없이 영화 본연의 순수한 힘으로 이루어낸 현상이었다.
지금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Again]
도경과 최정훈이 직접 제목을 만든 이 영화는 제목이 담고 있는 뜻 그대로 다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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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영화관]
“하, 도경이 녀석 시사회 좀 해달라니까...! 진짜 평범하게 하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털썩!
어두운 영화 상영관 속에서도 선글라스를 쓴 한 남성이 도경을 향해 내뱉으며 자신이 예매한 좌석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스케줄 빼랴, 사람들 마주치는 걸 피하랴. 영화 하나 보려고 이게 무슨 수고인지 몰라.”
스윽.
선글라스를 벗으며 피곤한 표정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남자는 놀랍게도 박진용 사장이었다. 한창 일하느라 바쁜 그가 영화관을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그것도 일반 사람들로 가득한 영화관을 홀몸으로 찾아오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박진용 사장의 사정을 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때 영화를 봤어야 했어. 하필 그때 스케줄이 겹쳐가지고...’
[TOP.10 Project]에서 도경이 깜짝 시사회를 열었을 때. 그날 박진용은 도경의 영화를 보지 못했었다.
그때 어쩔 수 없는 스케줄이 겹쳐서 양해를 구하고 현장에서 벗어났었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지금 그는 일반 영화관 상영관에서 도경의 영화를 보러 왔다.
“어디보자...”
힐끔.
한숨을 쉬며 후회하는 것도 잠시. 박진용은 영화관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화관 객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꽤 사람들이 있잖아?”
박진용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극장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극장 안의 좌석 절반 이상을 채우고 앉은 사람들의 수가 예상한 것보다 꽤 되었기 까닭이다.
‘[TOP.10 Project]에서 버프를 있을 때 빠르게 영화를 개봉한 덕분인가 보군.’
끄덕.
“그나마 다행인 건가...?”
남몰래 쉬는 안도의 한숨. 사실 박진용은 도경의 영화 관해서 조금 걱정을 지니고 있었다.
“광고나 홍보 없이 바로 영화를 상영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
마케팅 홍보나 광고도 없이 포스터 하나 달랑 내고 상영관을 잡고 영화를 개봉하는 도경과 최정훈 선택이 무모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도경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TOP.10 Project]를 이용한 깜짝 시사회 그리고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간접적으로 영화를 홍보하기는 했었다.
“그거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라는데 말이야.”
도경과 최정훈이 나름 했다던 영화 홍보.
사실 그건 박진용이 봤을 때는 소꿉장난 거리 수준밖에 안 되는 규모의 홍보 마케팅이었다.
영화산업은 거대한 자본 싸움. 그리고 일생일대를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한번 실패하면 다음은 기약하기 어려운 판이 바로 이쪽 영화계 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제작하는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철저한 준비와 전략을 짜고 마케팅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인다.
그 시간이 최소 몇 달, 많게는 년 단위인데 그것을 고려하면 도경의 영화 마케팅은 너무나 조악한 것이었다.
“목표라도 적게 잡던가 말이야...”
뭐, 사실 영화는 아무래도 좋았다. 평론가들 사이에선 [Again]은 후한 평가를 받고 있았으니 그래도 최소한의 창피는 당하지 않을 거니 말이다. 박진용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도경이 바라보고 있는 목표였다.
“천만이라니...!”
천만(Ten million).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의 영화계에 성공의 기준점이자 궁극적인 목표가 된 천만이라는 관객 동원 숫자.
도경이 목표를 두고 노려 보고 있는 곳은 바로 이 터무니없는 숫자였고 이에 박진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말이 안 되는 숫자지.”
사실 박진용 사장도 한창 연기에 꽂혀 영화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믿기지 않게 주연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반전은 없다고 할까? 말아 먹어도 제대로 말아먹었다.
쓴 경험이지만 그래도 경험은 경험. 그래서일까? 박진용은 천만이란 관객 숫자가 정말 뜬구름같은 숫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론과 매스컴에서는 천만이라는 숫자를 쉽게 다루고 언급하지만, 천만이란 숫자는 정말로 호락호락한 단위의 숫자가 아니었다.
영화를 개봉할 타이밍, 극장과 배급사의 전략, 대중들의 반응. 이 모든 것들이 천운처럼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성공신화이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띠리링!
도경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리 도경이라도 이번 만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하며 박진용은 긴 광고를 끝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도경의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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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의 소극장]
“역시 잠실 경기장으로 해야겠어.”
벌떡!
어떻게 보면 동상이몽도 또 이런 동상이몽이 없었다. 박진용 사장이 영화관에서 도경의 영화를 감상하고 있을 때. 소극장 대기실에 마련된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도경은 갑자기 일어나 남다른 행동력을 발휘해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척 돔을 대여하기로 했던 계획을 뒤집고 잠실 경기장으로 대여하려고 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천만을 찍는데 1만 7천 명은 아무래도 적지. 안 그래? 분명 사장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1천만이라는 관객 숫자보다는 자신의 콘서트장에 찾아올 사람들을 수용할 좌석 숫자가 몇 개인지를 신경 쓰는 도경.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하더니 도경이 딱 그 짝일 것이었다.
물론 누가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밝혀지겠지만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