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미국 LA.
[SMI 에이전시].
“슈거! 이 비열하고 음흉한 작자!!!”
쾅!
“또 내가 키운 배우를 훔쳐 가다니 이번에는 용서 못 해!”
크리스틴 정(26)
한국인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쿼터인 이 여성은 매력적인 검은 머릿결을 매섭게 흩날리며 자신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백인을 향해 분노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하하하! 크리스틴 진정하지? 우리 깜찍한 팅커벨이 얼굴을 찌그러트려야 쓰나?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해야지? 가로채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는군. 클라이언트가 직접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로 제 발로 내게 온 걸 가로챈다고 말하다니 에이전트로 자각이 부족한 발언 아닌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당신의 더러운 뒷거래를 말이에요. 그런 방법으로는 여태껏 내 고객을 빼앗아 놓고 잘도 웃음이 나오는군요. 무엇보다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제시를 넘길 수 없어요!”
슈가 베인더(39)
척 보기에도 능력 있어 보이고 두꺼운 턱수염으로 중후한 멋을 겸비하고 있는 이 중년인은 [SMI] 에이전시에서 에이전트 중에 에이스로 뽑히는 인물로 크리스틴에게 있어 그는 그야말로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눈여겨보고 키워왔던 고객들을 그가 중간에 가로챘기 때문이다.
“제시에게 손 떼도록 해요! 제시는 당신 같은 더러운 사람 밑에서 버티지 못할 거예요!”
슈가 베인더란 이 중년인은 확실히 능력과 수완 하나는 일류였지만 그의 일 처리 방식이 더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크리스틴은 자신의 애지중지 고객을 빼앗길 수 없었다.
‘여린 성격을 지닌 제시라면 이자한테 이용만 당하다 망가지고 말 거야.’
슈가란 이름처럼 달콤한 제안으로 고객들의 욕심을 부추기고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그의 방식은 최악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거액의 돈을 벌어드리고 몸값을 높이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고객 중 태반이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일하다 보면 고객들이 일에 대한 의욕을 잃거나 정공법보다 편한 길로만 가려는 습관을 배우기 때문. 찬란했던 재능과 열정은 돈과 허영심으로 채워지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욕망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제시가 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크리스틴은
“손 떼라고?”
“그래! 또다시 한 아이의 재능을 망치기 전에 당장 손 떼요! 제대로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제시를 넘겨줄 수 없어!”
“재능을 망쳐? 키워? 하아~. 팅커벨이라 불린다고 현실 물정 모르고 동화 속에서만 사는 거는 조금 아니지 않나?”
“당신...!”
으득.
‘멍청하기는...!’
피식.
입술을 깨물며 크리스틴은 슈가 베인더를 살벌하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에 비웃음 지을 뿐이었다. 명문대에서 법학까지 전공한 엘리트가 저렇게 순진하고 멍청할 소리를 하다니 그로서는 실소밖에 나올 게 없는 것이었다.
업계에서 에이전트로 6년이나 굴렀으면서도 재능이니 뭐니 저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다니 말이 안 통했다.
“우리가 보모인가? 우린 에이전트야. 고객의 몸값을 올리고 원하는 일을 하게 해주면 돼. 얼마나 심플해? 그 이외의 것들은 그쪽 부모님이나 매니저보고 신경 쓰라고 해.”
“당신 그게 지금 클라이언트로 할 소리라고 생각...”
“결과를 보라고 결과를! 네가 그리 생각해준 재능있는 녀석들이 너보다 나를 택하는 이유를 말이야.”
“그건! 당신이 감언이설로 꾄 거잖아?”
“감언이설? 나는 돈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해준 거뿐이다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아니지. 오히려 당연한 거지. 팅커벨 정신 차리라고 고객이 에이전트에게 원하는 건 자신들의 재능을 키워 주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돈과 명성을 많이 벌어다 주길 원하는 것뿐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자꾸 보모 짓을 자처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당신이 하는 건 전부 반쪽짜리뿐이니까!”
“반쪽?”
사람들이 클라이언트를 찾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말했다시피 성공해서 돈을 벌기 위함이다. 그것은 크리스틴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슈가 베인더의 행동을 크리스틴은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슈가 베인더가 고객에게 이루어주는 부와 명성들은 모두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거짓된 방식으로 성공해서는 고객들은 ‘프라이드’를 가질 수 없어요.”
성공을 위해서라면 거짓 기사와 스캔들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키는 건 기본이고 몸을 상납해 로비까지 하면서 얻는 돈과 명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재능이 있는 작가, 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등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평범한 사람에게는 없는 재능을 지닌 자들로 그 능력으로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요령이나 술수를 통해서 성공하려 하다니 그거야말로 본말전도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성공을 해서 즐기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기업가나 정치가를 지향하는 것이 나았다.
“프라이드? 잘도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구나.”
“흥!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의 재능에 대한 프라이드는 억만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작자는 전혀 몰라!’
사람에게는 재능과 센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광고(CF)감독인 아버지와 유명 소설가인 어머니를 옆에서 본 크리스틴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소한 농담부터 심오한 예술까지 같은 것을 해도 전혀 다른 결과를 탄생시키는 재능이란 감각 속의 절대 영역을 말이다. 그런 재능의 영역에 크리스틴은 반해 있었다.
‘떳떳한 프라이드가 없이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없어.’
세상에 여러 가지 재능이 있지만, 그녀가 반한 재능은 바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에게 있었다.
영화광인 아버지와 소설가 출신으로 시나리오 각본도 맡는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레 배우란 생명체를 알게 되었고 영화현장에서 연기를 펼친 배우를 직접 목격하는 순간 그녀는 그쪽 세계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거다. 하는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배우를 지망하였다. 전문학교에 들어가 6년간 연기공부 생활 속에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배우가 될만한 끼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크리스틴은 빠르게 진로를 전환하여 자신의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며 시나리오 각본을 써봤지만, 그 또한 재능이 없었다.
부모님과 달리 그녀 자신은 얄궂게도 자기가 반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못한다면 나 대신의 사람을 찾으면 돼.』
자신이 하지 못하면 대신할 사람을 찾는다. 그것이 크리스틴이 내렸던 답이었다.
언젠가 진짜배기의 재능을 지닌 인물을 만나 그의 전속 에이전트가 되어 동등한 파트너로서 보물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꿈이자 에이전트를 하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제시는 저 놈팡이한테 못 넘겨줘.’
제시는 그런 크리스틴이 인정한 재능의 소유자이자 그녀가 찾는 인재상이었다.
매사에 성실하고 때를 타지 않아 순수했으며 무엇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많은 성장 가능성과 지닌 흰 도화지나 다름없었다.
인생에서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그려낼 자신의 흰 도화지를 저런 저런 근시안적이고 속물적인 인간에게 빼앗긴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제시는 당신한테 너무 아까운 인재야. 그녀는 나와 함께여야 해!”
“흥. 웃기는 소리! 너와 있으면 시간을 아깝게 버릴 뿐이야. 너는 다시 촌놈들 발굴해서 동화책이나 읽어주라고. 뭐, 그러다 나중에 그 녀석들이 머리가 굵어진다 싶으면 내가 이번처럼 직접 책임져 주지. 그래도 팅커벨 네가 ‘물건’ 보는 눈은 확실하니 말이야. 큭큭큭!”
“이익! 더는 못 참아! 야 이 더러운 양키놈아!”
덥석!
“아악! 이거 놔! 진짜 야만인도 아니고 뜻대로 안 되면 머리끄덩이부터 잡아당기다니 도대체가 누구에게 배운 거야?”
“마! 우리 할머니한테 배웠다! 말귀를 못 알 듣는 인간은 머리털을 다 뜯으라고 말이야!”
영어로 세련되면서 차가운 어조와 달리 구수하고 억센 한국어가 입에서 튀어나왔고 슈가 베인더는 자신의 잡힌 머리와 알 수 없는 말에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설마 팅커벨이라 불리는 아가씨가 이런 야만인 같은 방법으로 자신에게 달려들지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악~! 뭐해!? 보고만 있을 거야? 빨리 이 정신 나간 여자를 당장 떼어내!”
우당탕!
질질질.
“지금 대머리 되고 싶지 않으면 제시한테 당장 손 떼~!”
“Fuck-!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영어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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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뒤엉켜 몸 다툼을 벌이고 그 둘을 말리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한 남성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성격 하나 화끈하네. 설마 달려들 줄이야. 저 여자 재밌네요.”
“재밌긴요. 감정이 격해져서 손부터 나가다니 에이전트로서 실격입니다. SMI 에이전시도 수준이 낮아진 건가요? 저렇게 감정적인 사람을 에이전트로 쓰다니 의외군요.”
“허허허...!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저 두 사람은 앙숙 관계이니 이해해 주세요.”
“그렇습니까?”
“하하 저리 보여도 능력 하나는 확실한 둘입니다. 그리고 사실 조나단의 요구에 맞춰 추천할 에이전트 후보가 저 둘이기도 하구요.”
“저 두 사람이 말입니까?”
소란스러운 풍경이 보이는 밖을 블라인드를 내려 가린 중년남성은 난처한 듯 웃으면서도 자신의 부하직원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사실 추천할 에이전트 후보가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던 두 인물이기 때문이다.
“네. 저 두 사람이라면 조나단 씨의 까다로운 요구에 딱 알맞은 인재들입니다.”
“응? 조나단 씨가 별도로 무언가를 부탁했었나요?”
“그럼요. 법학전공에다가 수완이 좋으며 담력이 세고 인내심이 강한 인물을 요구하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도경 씨라고 했나요? 운이 좋군요. 리아 바라기인 조나단 씨가 이 정도로 챙기다니 그쪽이 마음에 무척 들었나 봅니다.”
“그런 거예요?”
힐끔.
그 말을 들은 도경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조나단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면서 낯간지러운 시선을 보내었지만 조나단은 그런 도경의 시선에 질색 팔색하며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표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슈퍼 웰터급 랭킹 1위에서 이제는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로이드를 1라운드에 때려눕힌 도경에게 저런 시선을 받자니 소름이 돋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조나단 그는 아직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움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리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절대 맡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 같은 꼴통하고 일하려면 보통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법학 전공, 담력이 세고 인내심이 좋을 것이란 조건은 전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한번 일을 저질렀다 하면 대형사고를 치는 도경을 커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도경은 분명 나중에도 사고를 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거리를 둬야 해! 그를 맡던 클라이언트가 손을 떼어 나중에 또다시 날 찾아오면 곤란하지.’
만약 도경을 맡았던 클라이언트가 버티지 못하고 도경을 포기하면 리아가 다시 한번 더 자신에게 도경을 맡아줄 클라이언트를 신경써 달라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나단은 도경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은 도경과 자주 만나는 것을 사양하고 싶었다. 미래의 잠재적 폭탄과 엮어서 좋을 것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스티븐을 붉은색 글러브로 두들겨 패는 도경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 이상 그의 결심은 변치 않을 터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그저 의외로 자신을 신경 써주는 조나단이 고마울 뿐이었다.
“에이 부끄러워하기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보답할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앞으로 무탈하게 승승장구하시길 기원하지요.”
“하하하! 그래요. 제대로 성공하고 화끈하게 보답하라 이거죠?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지만... 뭐, 알아서 하십시오.”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며 웃음 짓고 있는 도경을 보며 조나단은 그저 말꼬리를 흐릴 뿐이었다. 겉보기에는 믿음직하지 않은 모습과 달리 자신의 성공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의 자신감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꼴통이야... 꼴통이 분명한데...!’
아메리칸 드림은 지독한 허상이다.
여러 인종이 이곳에서 성공하기 위해, 정착하기 위해서 오지만 이 미국이란 나라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 그것도 아시아에 사는 순수한 동양인이 미국 연예계에 진출해서 탑스타가 된 인물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연예계의 에이전트로서 활약하는 조나단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경을 보면 만에 하나라는 상황이 떠오른다.
“제대로 일을 낼 거 같단 말이지.”
중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한 동양인에 의해서 왠지 모르게 자신의 나라가 시끄러워질 거 같은 예감이 드는 조나단이었다.
“응 무슨 말 했어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설명을 듣자 하니 아까 두 사람은 에이전트로서 성향이 전혀 다른 듯싶은데 도경 씨는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십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고객의 먼 미래를 내다보며 느리지만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는 성장을 지향하는 「크리스틴 정」과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온갖 비즈니스 수단을 써 가까운 시일 내에 빠른 결과를 내는 「슈가 베인더」
그 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두 사람 모두 에이전트로서 확실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과연 도경이라면 어떤 유형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궁금했다.
‘크리스틴이냐 아니면 슈가 베인더일까?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매니저와 에이전트는 비슷한 직종이라 간혹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큰 오산이나 다름없었다. 고객이 본업에 충실하도록 고객의 법적인 책임과 수많은 계약권을 떠맡고 세금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획사의 수많은 사람이 뭉쳐서 하는 일을 한 개인이 맡아서 하기에 미국 연예계에 있어 에이전트란 존재는 그야말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도경이 과연 누구를 택할지 조나단 개인으로서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말이죠...”
“네.”
“저는..!”
“네.”
「흐아아아앙~!」
“...!?”
조나단의 물음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도경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려는 순간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이 닫혀 있음에서 그 밖으로 서러움이 듬뿍 담긴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울음소리?”
“이게... 무슨?”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도경과 조나단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