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LA.베벌리 힐스(Beverly Hills)]
“도경!”
“하하! 켄드릭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덕분에-!”
와락!
하하하.
흰색의 고급스러운 저택. 수영장 앞에서 두 남자가 반갑게 포옹을 나누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에이전시에서 볼일을 마친 도경은 조나단과 헤어지고 베벌리 힐스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안 보이네?”
“아아. 용환과 도한 말이야? 두 사람 다 이번에 눈여겨본 작품 오디션 보러 갔어. 그나저나 의외로 두 사람 신경 쓰는데? 여기 보내고 나서 연락 한 번도 안 했으면서 말이야.”
“그래도 한국에서 연이 있던 사람들인데 신경 안 쓸 리 없지. 그냥 서로들 용건 없으면 연락 잘 안 하는 성격들일 뿐이라고 그나저나 요즘 두 아시안 덤앤더머 형제 때문에 난리라며? 이야기 들었어 축하해 켄드릭.”
“하하. 그러게 말이야. 용환이 잘해준 덕분이지. 이번에 2시즌 제작하기로 확정됐어.”
정용환과 차도한. 두 사람 다 모두 반가운 이름들이었다.
숙적으로 임꺽정에서 함께 열연을 펼쳤던 정용환과 도경의 첫 번째 매니저 차도한. 두 사람 다 도경과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독특한 제목이더라 아시안 표류기라니 말이야.”
“하하하 그렇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아시아인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어제 대충 보긴 했는데 재밌더라. 캐릭터 케미가 좋던데?”
[아시안 표류기]
미국에서 배우를 꿈꾸며 단역배우를 하는 동생(21)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형(34).
전형적인 멋진 동생과 막장인 형. 이혼한 한국인과 중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형제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좌충우돌을 겪으며 성장한다는 이 드라마는 파일럿으로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인기몰이에 공식적으로 제작이 들어갔고 현재 성황리에 1시즌을 끝마쳤다.
“시즌2에 대한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죽여줘! 더 재밌어졌어.”
씨익.
“그래?”
“그렇다니까~. 어떤 내용인지 얘기해줄게.”
“하하하.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
자신이 출연한 이번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켄드릭은 즐거운 미소를 띠며 도경을 향해 자랑하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여간 그 작품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럼! 마음에 들지 안 들어? 도경이 너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와서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아시안 배우가 주연인 작품이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걸?”
“그 정도야?”
“말도 마. 임금 차별은 물론 배역 자체가 너무 한정되어있어서 아시안이 서 있기 힘든 판이 이곳이라니까. 백인 흑인만 관심 가지지. 아시아인에게는 아무도 관심도 안 줘. 백인과 흑인들의 기 싸움에 치여나가서 소외된다고 해야 할까? 뭐 그들만의 리그라는 거지.”
“흐음. 그거 꽤 성가시겠어.”
“그래도 뭐 어쩌겠어? 미국에 살면 감안해야하는 문제니까 어쩔 수 없지.”
스탠드 코미디언 출신으로 항상 쾌활하고 긍정의 아이콘인 켄드릭이 쓴웃음이 지으며 푸념하는 것을 보며 도경은 미국에서 뿌리 깊게 존재하는 인종 간의 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흑인과 백인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나라인데 그 사이에 꼽사리 낀 아시아인이나 여러 인종이 설 영역이 좁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나저나 도경 너는 왜 갑자기 미국진출을 하려는 거야? 네 나라에서 잘 나간다며? 너도 용환처럼 한국에서 사고 친 거야?”
그렇기에 켄드릭은 자신의 친구가 한 선택이 궁금했다. 정용환과 차도한에게 듣자 하니 한국에서 도경의 위상이 신화적이라 할 만큼 뜨겁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미국행을 택하는 그의 생뚱맞은 선택에 의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사고는 무슨. 그저 큰물에 놀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중국하고 일본이 있잖아. 정서적으로나 같은 동양인이라서 진출하기도 미국보다 훨씬 편할 거고 말이야.”
켄드릭의 말 그대로였다. 미국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요즘같이 글로벌한 시대에 거대한 시장구조를 지닌 국가는 옛날과 달리 미국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경이 미국 유명 토크쇼에 한 번 출연하고 이번에 낸 영화도 미국에서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행을 선택하는 것은 섣부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서 온갖 텃새와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는 켄드릭은 솔직히 말해서 도경의 선택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위험부담이 커.’
자신이야 미국에 도전할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맨몸이었기 실패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했지만, 도경은 아니었다. 도경이 이루어낸 것은 많았고 그만큼 잃을 것도 많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은인이자 친구가 굳이 위험부담을 자처해서 상처를 입지 않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쪽은 최고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없잖아.”
“뭐?”
“다들 미국을 싫어하지만 웃기게도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최고라는 감각적인 이미지는 미국에 깔려있는단 말이지. 켄드릭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야. 내 이름을 듣자마자 논란의 여지 없이 최고의 스타라고 떠올리는 이미지 말이야. 그건 미국에서밖에 얻지 못해.”
자본주의의 끝판왕 미국.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이 연방 국가는 지구상의 유일한 초강대국임이 분명했다.
군사력, 경제, 기술, 문화 등등 모든 부분에서 최고를 선점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도경이 원하는 것은 그와 같은 최고라는 이미지를 갖는 거였다.
“도경...! 너 진심이구나?”
“하하하! 그럼!”
과장도 허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최고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도경을 보면서 켄드릭은 직감적으로 도경이 진심으로 최고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야 도경이 미국행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경이 노리는 것은 돈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 시대의 최고의 스타. 고추 한번 달고 태어난 사내라면 그 정도는 찍어줘야지. 안 그래?”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최고의 스타가 되겠다고?”
“이 몸이라면 가능해!”
“바보냐? 그거 진짜 막무가내 자신감밖에 없는 거잖냐.”
“두고 보면 안다니까?”
“최고의 스타라니 목표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고...”
최고로서 세상에 인정받겠다. 무슨 위인전에 나오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목표란 말인가? 특히나 아시아인으로서 미국에서 최고의 스타로 반열에 선 인물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난 이래에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젊은 청년이 되겠다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도...”
피식.
“그거 나쁘지 않네.”
그런데 이상하다. 듣기만 해도 왜 이리 즐거워진단 말인가?
도경의 말에 켄드릭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미국에서 최고로 성공하고 인정받는 스타가 동양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
“그래 될 수 있으면 되어봐라. 응원할 테니까.”
“Roger that!”
“하하하! 진짜 4년이 지나도 넌 변함이 없구나. 정말 또라이라니까. 그래서 네가 마음에 쏙 들지만 말이야. 친구! 오랜만에 봤는데 시원한 맥주나 깔까?”
“당연한 거 아니야? 오랜만에 보는 건데 술을 안마실 수가 없지. 원래 너와의 덤앤더머는 내가 먼저였잖아. 안 그래?”
“하하하. 그렇지. 좋아! 기다리라고 내가 맥주 가져올게.”
켄드릭은 냉장고에서 가슴에 한가득 맥주를 품어 가져오며 그중 하나를 도경에게 건네었다. 차고 시원한 맥주캔의 감촉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며 웃음 지었다. 시간이 지났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조우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치익!
“건배-!”
“위하여!”
12살 띠동갑 나이 차이의 두 친구의 4년 만의 재회는 코가 삐뚤어지는 폭음으로 시작되었다.
“이게 무슨...”
뒤늦게 집에 도착한 정용환과 차도한. 그 두 사람은 각종 술병과 맥주캔이 너부러져 있는 집안을 거닐다가 화장실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도경과 찬물이 틀어진 욕조에 누워 추위에 떨고 있는 켄드릭을 발견하면서 이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아무래도 이젠 조용한 날은 다 간 거 같지?”
“그러게. 저 두 사람이 만났으니 말이야. 분명 그렇겠지.”
“또라이와 또라이의 만남이라...”
“일단 침대로 옮길까?”
“그러자.”
약 빤 또라이와 미친 또라이.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두 명의 또라이들을 각자 들어 올려 부축하는 정용환과 차도한의 모습이 이상하게 처량해 보였다.
“무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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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lood~.
너는 나쁜 피야.
가슴을 뛰게 만들고-
일으켜 세우고-
눈을 멀게 만들어-
미친 듯이 뛰게 만들잖아.]
딸칵!
“후우...”
캄캄한 방안.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보는 한 여성이 영상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으로 7번째 정주행. 이젠 볼 만큼 봤다 이 이상 보다가는 한숨도 못 잘 듯싶었다.
“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뭐야?”
여성의 정체는 도경에게 러브 콜을 받은 에이전트인 크리스틴. 그녀의 하루는 도경으로 시작해서 도경으로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자신이 연기대상 수상자라고 밝힌 도경의 말이 발단으로 그녀는 도경을 조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데뷔한 지 1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건 규격 외잖아?””
그가 출연했던 예능, 드라마, 영화까지 모든 것을 살펴본 그녀는 경악 그리고 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도경의 행보 하나하나가 평범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독 MC를 맡은 예능부터 인터넷 방송 플랫폼을 이용하여 음원 사이트를 점령하는 것도 그렇고 첫 드라마 작품부터 주연을 꿰차며 열연을 펼쳐서 연기대상을 받은 것까지 정말 규격 외의 것들투성이였다.
“설마 Again의 영화의 주연을 맡은 사람이 이 사람일 줄이야.”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례적인 성공을 거둬들여서 업계에서 화제가 된 인디 뮤직 영화 Again의 주인공이 바로 도경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배우를 좋아하는 만큼 영화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는 크리스틴이 눈여겨보던 영화의 주인공이 설마 도경이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일에 치였다고 하지만 이건 반성해야 할 일이야. 그리고 이 사람...”
여러 클라이언트의 매니지먼트와 제시와의 전속 에이전트 계약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고 하지만 조금은 해이해지지 않았나 싶어 반성하는 동시에 크리스틴은 모니터에 떠 있는 도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기 진짜 잘하잖아.”
「임꺽정」, 「Again」 딱 2편의 작품이었지만 도경의 연기력을 보는 데는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서 그의 미친 재능을 뼈저리게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연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동양인 특유의 발음문제도 없어. 그리고 몸도 좋은 데다가 액션 씬을 보니 운동신경도 좋아 보여. 게다가 노래까지... 정말 다재다능 한 사람이야.”
[임꺽정]을 보면서 그가 배우로서 지닌 연기력과 장점들을 보았고 [Again]에선 미국진출에 대한 성공의 가능성과 그의 다재다능함을 목격하였다. 크리스틴 그녀는 직감했다.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인재가 있다면 바로 도경을 두고 하는 얘기일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를 자각하였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뻗댄 거야?”
화끈.
뒤늦게 올라오는 창피함에 얼굴에 열이 올라왔지만, 크리스틴은 자신의 얼굴의 열을 식힐 시간을 가지기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것을 택하였다. 스마트폰과 어제 받았던 도경의 명함을 집어 드는 것으로 말이다.
「살아 숨 쉬는 전설.
박도경(Kyle)」
‘이 사람은 어떻게든 잡아야 해.’
검붉은 색의 고급스러운 명함과 달리 금박으로는 장난스러운 문구가 적힌 도경의 명함. 그곳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향해 그녀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아직 시작이야. 더 많은 배역을 맡아 다양한 연기를 펼쳐야 해.”
크리스틴의 붉게 물든 얼굴.
그것은 자신이 실수로 인한 창피함일까 아니면 도경의 새로운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일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금 그녀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고 동시에 그녀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Over Lord 레이블]
“까고 앉아있네. 너희들 귓구멍은 제대로 달려있기나 하냐? 이딴 걸 계약이라 내밀어? X이나 까 잡숴라.”
“도경 씨...!”
“뭐라고? 이 건방진 동양인 다시 말해봐!”
쿵!
도경의 생각지도 못한 연기에 끔뻑 넘어간 크리스틴. 그녀는 도경의 본업이 배우가 아닌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것도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는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X까라고 했다! 도둑놈 새끼들아.”
크리스틴이 감탄했던 도경의 영어 발음.
현지인보다 찰진 욕설을 내뱉은 도경을 보며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