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두 분 다 일단 진정을 하시죠. 계약 건에 대해서는 조율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크리스틴은 식은땀을 흘리며 레이블 관계자와 도경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힘썼다. 하지만 도경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수익분배 9대 1을 제시하는 건데 조율이 되겠냐? 저 자식 완전 호구로 보는 거라니까?”
“그래도 일단은 이야기를 꺼내 봐야죠.”
“어이! 영어로 말해! 비즈니스를 할 대상을 두고 자기들끼리 뭘 숙덕거리는 거냐?”
“네가 나를 호구로 본다는 이야기 나눴다. 이 대머리야. 후려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비즈니스 같은 소리가 잘도 나오네.”
흰색의 뿔테 안경을 쓰고 있던 패셔너블한 흑인이 도경의 말을 들으며 코웃음 치더니 이내 도경이 건네었던 앨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이봐 네가 이쪽 바닥의 생리를 몰라서 그런가 본데 보통 신인들은 이 수익분배로 계약한다고? 특별히 후려치고 호구 취급하는 게 아니야.”
“헛소리하고 마. 그건 네 말대로 아무런 실적도 없는 신인들의 사항이잖아? 내가 새파란 신인처럼 보여?”
으스대며 말하는 흑인을 보며 도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자신이 미국에서 신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런 실적이 없는 새파란 신인은 아니었다.
도경에겐 빌보드 차트 상위권 안에 들어간 성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Again에서 부른 노래들 또한 빌보드 차트에 들었다. 절대로 새파란 신인으로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결과임에도 이런 계약 조건이라니 도경으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도경 씨 말이 맞습니다. 이쪽에 있는 도경 씨는 이미 충분한 실적과 이력을 가지고 있는 실력 있는 뮤지션입니다. 이런 계약 조건은 곤란합니다. 재조정이 필요한 듯싶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조건도 그리 까다로운 것도 아닙니다. 통상적인...”
도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틴은 에이전트로서 그의 말을 거들었다. 사실 그녀 또한 이런 계약 조건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본 도경이라면 업계에서 받아야 할 통상적인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밑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도경과 크리스틴의 입장이었지만 앞에 있는 상대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잠깐! 그... 당신네가 말한 실적과 이력 말이야. 그거 모두 얻어걸린 것들 아닌가?”
“네?”
“Go High와 리아 그라테 때문에 낸 실적들이잖아? 그쪽 조그마한 나라에선 어떨지 몰라도 미국에서 통할지 말지 아직은 미지수란 말이지.”
“하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 지금 내 노래 들었잖아.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당신이 내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한 거 진작에 눈치 다 챘다고 그런데 대체 그 태도는 뭔데?”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군. 이쯤 되면 자의식 과잉 아닌가?”
“속일 사람을 속여. 당신이 음악 관계자라면 내 앨범이 죽여주는 물건이라는 걸 알 텐데?”
“큼...!”
어처구니없었다. 도경이 누군가?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데 도가 튼 존재 아닌가. 티 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도경은 자신의 앞에 있는 레이블 관계자는 자신의 앨범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딴 계약 조건을 걸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지 말이다.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뭐가 문제야? 앨범 구성도 좋고, 노래도 죽여주게 불러.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건데?”
“.....”
도경의 강한 확신이 서린 물음에 레이블 관계자의 흑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 또한 도경이 가져온 앨범이 훌륭한 앨범이라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티스트로서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도경을 보자니 이 이상 수작질은 더욱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뭐 좋아. 솔직하게 말하지 이 앨범은 네 말대로 좋아. 하지만...”
“하지만?”.
“문제는 바로 너야.”
“무슨 소리야?”
“이 컨트리 앨범 말이야. 네가 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 미국인들 눈에는 어떻게 보인다고 생각해?”
“설마... 지금 내 인종이 문제라고 하는 거야?”
“그래. 미국에서 음악은 인종 간의 영역이니까”
그의 말에 도경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그런 같잖은 이유로 자신을 내리깎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세계여행하며 인종 차별문제야 겪어보긴 했지만 설마 음악에서까지 인종으로 차별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컨트리 음악은 백인 전유물의 음악이야. 컨트리 음악을 부르고 성공하는 것은 모두 백인 가수들이고 심지어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흑인들은 자신이 컨트리 음악을 듣는 것을 감추기도 하는데 동양인인 네가 컨트리를 부른다고 생각해봐. 한 편의 코미디지.”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소리야? 이미 음악 장르의 흑백장벽은 무너졌잖아? 초창기의 로큰롤도 흑인 음악이었지만 앨비스가 불러 백인들에게 대중화시켰고 마이클 잭슨도 백인들의 장르인 팝, 록을 알앤비에 결합해서 성공했잖아. 그 둘뿐만이 아니라 흑백의 장벽을 허물어서 성공한 아티스트들도 많은걸 알 텐데?”
“그건 특별한 그들이라서 가능한 거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은 전부 흑인과 백인이지.”
“와아...”
뼛속 깊은 고정관념에 도경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음을 던졌지만 이내 들려오는 흑인의 대답에서 지금의 문제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싫어하지만, 흑백의 장벽을 침범할 수 있는 건 흑인과 백인뿐이라는 거냐? 쉽게 말해 나 같은 동양인은 낄 자리가 없다?”
“뭐, 그렇게 해석이 되겠지?”
“하...!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계약 건을 거절하면 되지 왜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거야?”
“사실 제안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이야기를 길게 끄는 것을 싫어하는 듯 싶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말해.”
“이 앨범 팔 생각 없나? 확실히 띄울 수 있는 주인을 만나게 해줄 거라 약속하지. 그리고 여기 그에 대한 보답이 적힌 계약서야 한번 읽어봐.”
팔랑.
멀끔한 한 장의 계약서. 도경은 그 계약서를 집어 들려는 그 순간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틴이 중간에 그 계약서를 낚아챘다.
“아뇨. 읽을 필요 없습니다.”
찌이익!
“!?”
그녀는 낚아챈 계약서를 그 즉시 보는 앞에서 찢어 버렸다. 가차 없는 그녀의 태도가 모두가 놀랐다.
“으음. 이게 무슨 짓이지?”
“이쪽에서야말로 묻고 싶군요. 이 얼마나 경우 없는 짓입니까? 저희 쪽이 원하는 건 앨범 발매와 유통과 홍보였지 곡을 파는 게 아닐 텐데요. 제 아티스트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 용서 할 수 없군요.”
“자존심보다 현실을 보지 그래? 후한 계약 조건을 달아 놓았는데 말이야. 아까운 짓을 하는 군.”
“할 말 없습니다.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냉정함을 유지하며 상황을 조율하려 애썼던 크리스틴이 결국 노기를 나타내며 박력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 있던 도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경 씨 죄송합니다. 하필 이런 예의 없는 레이블 회사와 미팅을 잡다니 제 실책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른 레이블 회사를 찾아보도록 하죠. 일어나시죠.”
“아아... 뭐, 그러지 뭐...!”
도경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먼저 나서서 깽판 치는 일이 많았던 도경으로서는 남이 자신을 위해 먼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생소한 경험 덕에 도경은 얌전히 크리스틴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텐데 시간 낭비하지 않은 게 좋지 않겠어?”
“이미 당신이 도경 씨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 앨범을 탐내는 순간 당신은 갑이 아닌 을이 된 겁니다. 착각하지 마시죠.”
“뭐, 뭐라고...!”
“레이블 회사가 여기만 있습니까? 분명 제 아티스트와 이 앨범의 가치를 알아주는 회사는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도경과 크리스틴이 일어나 미팅룸을 문밖으로 나가려 할 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조금은 다급함이 담겨있는 그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뒤돌아보며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문디 자슥아. 주둥이 패버리기 전에 입 닥치라!”
쿵!
거칠게 닫힌 문 뒤로 도경은 빠른 걸음을 옮기는 크리스틴을 뒤따라가며 실실 웃음 지었다. 이 여자 왠지 모르게 자신과 잘 맞을 거 같았다.
코드가 맞다고 해야 하나? 같이 일하는 맛이 있는 여자라 도경은 생각했다.
“크리스틴 멋있잖아! 되게 인상적이었어.”
씨익.
“죄송할 따름입니다. 설마 저런 의도로 불렀을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했던 건데...!”
“괜찮아. 낯선 나라에서 쉽게 일이 풀리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그런 것 치고는 화를 많이 내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또 신기하게 차분하시군요.”
좀 전에 화를 냈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차분한 도경의 상태에 의아스러운 듯이 바라보는 크리스틴을 향해 도경은 웃음 지었다.
“누가 봐도 화를 내야 하는 순간은 화를 내야지. 지금은 그런 순간이 아니고 말이야.”
“화낸다는 감각이 수도꼭지 틀고 잠그듯 조절되는 그런 겁니까? 정말 이상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시군요.”
“하하. 뭐 처세술이지. 그나저나 다른 레이블 회사는 생각해둔 곳 있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메이저 레이블들은 아까 같은 차별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겠더군요. 동양인 배우들도 그렇지만 뮤지션에게도 그 정도로 차별이 존재할 줄은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그러게. 나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식하지 못한 부분이라 그런 제약이 존재할지 많이 놀란 게 사실이야.”
듣기에만 좋은 음악을 쫓았지 노래 장르와 그에 대한 인종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도경 또한 의식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음악에 대한 장르 제약 없이 마음껏 노래들을 부르고 앨범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양한 노래 장르들의 본토인 미국에서는 인종의 제약 때문에 마음에 든 노래를 마음껏 못 부르고 머나먼 타국에선 장르 구분 없이 원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것이 말이다.
“설마 레이블 회사를 구하는 거에서 막힐 줄이야. 이거 예상외의 난관인데? 이런 곳에 발목 잡힐 생각 없었는데 말이야. 크리스틴 정말 괜찮은 곳 없어?”
“그게...”
“응?”
미국 진출에 앞서 메이저 레이블 회사의 계약은 도경에게 중요했다. 앨범의 발매와 홍보는 물론 자신이 계획했던 전미 투어는 모두 레이블 회사의 계약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계획에는 없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 발목을 잡힌 도경이 조금 갑갑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무언가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군데... 한군데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 거기가 어디야?”
“돈키호테 레이블이라고 도경 씨의 앨범의 샘플을 메일로 뿌렸을 때 제일 빨리 답장이 온 곳으로 많은 관심을 보이며 후한 조건을 미리 양식으로 만들어 보낸 곳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진작 그쪽으로 가지. 왜 이곳으로 온 거야?”
크리스틴의 말에 도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한 조건에 자신의 앨범에 호의적인 레이블 회사로 먼저 가지 않은 것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메이저 레이블 회사였던 곳이라 할까요? 조금 애매한 회사라서 말입니다.”
“회사였던 곳? 과거형이네?”
“네. 돈키호테 레이블은 과거에는 잘나가는 메이저 레이블 회사였지만 10년간 과도한 투자와 실험적인 시도로 경연 난에 시달리다 지금에 와서는 정원 15명의 소규모 조직의 레이블 회사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음... 말만 들으면 망한 회사나 다름없는데 이곳을 추천한 이유가 있어?”
긁적긁적.
사실 설명만 들으면 그리 끌리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 도경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의 성격상 지금의 자신에게 이 회사의 이름을 꺼낼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건...”
그런 도경의 의문에 크리스틴은 에이전트로서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도경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헤에-. 그거 재미있는 회사잖아?”
망하고 과거의 영광뿐인 남은 돈키호테 레이블 회사. 지금 도경은 그 회사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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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레이블]
따그닥! 따그닥!
“호우-! 달려라 달려! 넌 할 수 있어! 내가 응원한다. 오늘은 너의 날이 분명하다 호키하젠!”
삐걱삐걱!
조그마한 TV 브라운관에 비추는 경마장. 그 안에 숨 가삐 뛰는 검은색의 경주마를 응원하는 한 노인이 눈에 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시대착오적인 카우보이 복장을 한 그는 마치 자신의 말에 탄 기수가 된 듯이 의자 위에서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경주마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노인을 향해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하는데 시끄럽잖아요! 사장님 또 경마하시는 거예요? 진짜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한판도 이기신 적도 없으시잖아요.”
“시끄러워!”
콰당!
“으악! 미쳤어요 사장님?”
“부정 타기 전에 당장 꺼져! 지금까지의 것들은 모두 대박을 기원하는 제물의식 같은 것일 뿐이야 이번에는 기필코 승리한다!”
“기우제 지내요? 경마도 엄연한 통계학이거든요?”
“흥! 도박에 통계학은 무슨...! 모든 건 운빨! 하늘의 뜻이다! 한방이야! 한방이라고! 그리고 지금 잭팟이 터질 거다! 그렇지? 가라 호키하젠!!!”
“못 말려 진짜...!”
눈이 벌겋게 TV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인생의 모든 것을 건듯한 기세를 내뿜는 자신의 사장을 바라보며 직원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사장실을 서둘러 나왔다.
그도 그럴게...
“으아아악! 안돼!!! 호킨하젠 너마저!”
“차라리 통계학으로 접근하시라고요.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양반이 사장님인데 운에 걸어서 되겠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모든 운은 다 쓴 것처럼 온갖 불행을 떠안은 인물이 바로 그의 사장의 정체였기 때문이다.
띵동!
“응? 누구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등 뒤로 울려 퍼지는 사장의 절규를 뒤로하고 자신의 회사를 찾아온 손님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