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저 자식은 무슨 낯짝으로 삼촌을 찾아온 거야? 삼촌도 삼촌이지 저놈하고 무슨 얘기 할 게 있다고...!”
콰직.
우물우물.
성공적인 이벤트에 떠들썩하고 즐겁게 가졌을 식사시간은 현재 흥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모임의 주최인 웨인을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인 모건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있어도 저 멀리서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웨인과 그 둘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토마스의 모습 때문에 도경으로서도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없었다.
힐끔.
“저 사람 이름이 모건이라고 했나? 웨인 씨 표정을 보니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네.”
“안 좋을 뿐인가요? 거의 원수나 다름없죠.”
“원수?”
“저 자식 때문에 돈키호테가 아작나 버렸으니 말이에요.”
“아, 혹시 회사에 아티스트들이 대거로 이탈하게 된 거 말하는 거야?”
“어...? 알고 있었습니까?”
우뚝.
도경의 말에 거칠게 움직이던 나이프와 포크를 멈춘 토마스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옛날 돈키호테에 벌어졌던 좋지 못한 과거를 도경이 알고 있을 줄은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웨인이나 토마스에게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레이블 회사에서 아티스트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으레 그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너무 당황하지 않아도 돼. 계약하기 전에 파트너에 대한 조사는 기본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나는 그 사건 덕분에 돈키호테를 좋게 생각하고 있는걸?”
“네?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나가고 싶다는 아티스트들 그냥 놓아줬다면서? 사실 그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도경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돈키호테에 불신할 줄 알았던 도경의 입에서 오히려 돈키호테를 좋게 보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토마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맞아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죠. 모두들 도경 씨처럼 생각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을 못 해줬을까요...!”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거야?”
“덕분에 회사 내에선 안 좋은 소문이 났거든요.”
그 당시에 토마스는 어린 나이었지만 그때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한다. 삼촌을 향해 추궁하는 회사 동료와 그것을 보며 회사를 불신하는 아티스트들을 말이다.
덕분에 회사의 유능한 인재들과 아티스트들은 다른 회사로 떠났고 돈키호테는 그렇게 나락으로 기울어져 갔다.
“소문?”
“군말 없이 계약한 아티스트를 보내줄 정도로 삼촌이 잘못된 짓을 했다고 말이에요.”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
토마스의 설명을 들은 도경은 혀를 내둘렀다.
선의로 한 행동이 악의로 돌아왔다. 분명 웨인은 자신이 키워오고 함께한 아티스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려 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독이 되어버리다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뇨. 그건 절대 안타까운 일이 아녔어요.”
“음?”
“알고 보니 모두 저 자식이 의도적으로 낸 소문이었거든요.”
“뭐? 왜 그런 거래? 저 사람 너희 회사 유망한 프로듀서였다고 했잖아.”
“맞아요. 그리고 지금은 슈퍼노바란 메이저 레이블 회사의 대표 프로듀서죠.”
“하, 배신이라는 거냐?”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토마스를 보며 도경은 모든 것의 전후 사정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티스트들의 탈주와 회사 내에서 도는 의도적인 악소문. 그리고 다른 메이저 레이블에 대표 프로듀서가 된 모건이라는 존재.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정황은 모건이라는 작자가 의도적으로 돈키호테를 망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 역시 짜증 나는 놈이 맞았어.’
모건 휘태커. 그를 바라보는 도경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졌다.
그도 그럴 게 믿었던 동료를 배신하고 이용하는 작자다. 그런 유형의 인간은 도경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경멸하는 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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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달그락.
웨인과 모건.
한때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두 사람은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쩝쩝!
후루룩.
“음?”
까닥.
“거, 안 드십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기껏 사드리는 건데 말입니다.”
“필요 없다.”
“꼬장한 성격은 여전하시네.”
피식.
식사하는 자와 식사를 하지 않는 자. 상반된 행동으로 두 사람은 일방적인 식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태평하게 식사를 하는 쪽은 불청객으로 찾아온 모건이었고, 굳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지 않은 쪽은 웨인이었다.
슥슥.
“저 애송이입니까? 당신이 기대하는 신인이? 동양인이라 마지막 도전치고는 너무 과감한 거 아닙니까?”
“......”
모건은 자신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면서 웨인의 등 뒤에서 자신을 향해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동양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을 흘겨보는 눈초리를 보아하니 토마스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찾아온 용건이 뭐냐?”
“이번 투어에 빠져주셔야겠습니다.”
“뭐?”
“제 아티스트에게 날파리가 붙는 것은 사양이라서요. 소정의 보상은 하지요.”
“날파리? 너 이자식이...!”
“왜요? 치시게요? 저야 옛날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만 결과는 좋지 않으실 겁니다.”
큭!
“그래요. 참으셔야죠.”
모건의 말에 웨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다짜고짜 와서 하는 소리가 빠지라는 소리와 함께 모욕적인 언사라니 화가 머릿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내야 했다.
“예전에 제 얼굴을 마음껏 후려갈기셨던 예전 다르니까 말입니다.”
씨익
“흥! 잘도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구나! 쓰레기 같은 놈.”
“하하. 쓰레기라... 그 쓰레기가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지금의 로시난테를 만들었습니다만?”
“흥. 말은 바로 해야지. 지금의 로시난테를 만든 건 ‘Full Moon’이지 네가 아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향해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모건의 모습에 웨인은 경멸의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그를 쏘아붙였다.
“한나의 노래지.”
꿈틀.
쿵.
“영감...!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Full Moon은 내 노래라고 말이야. 언제까지 증거도 없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생각이야? 정말로 법정에서 얼굴을 봐야 정신 차리겠어?”
굳은 눈빛으로 나지막이 경고하는 모건은 흉포하기 그지없었으나 웨인은 끄덕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오히려 그가 경멸스러웠다.
“네가 세상에 ‘Full Moon’이 네 노래라고 속여도 나는 못 속여. 그 노래는 한나의 노래다. 한나가 자살하기 전날에 내게 직접 불러주었던 노래란 말이다. 너는 단지 도둑놈일 뿐이야.”
놀라운 사실이 웨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Full Moon.
모건의 작사·작곡으로 나와 로시난테를 스타덤으로 올려준 그 노래가 사실은 모건의 곡이 아니라 자살한 한나의 것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웨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죽은 연인의 곡을 빼앗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후...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래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벌써 과거사가 이렇게 줄줄 나오니 말이야.”
콱!
손에 들린 나이프를 거칠게 스테이크에 꽂아버린 모건은 웨인을 바라보며 앤디가 왜 그의 싸구려 도발에 넘어간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겨운 노인네. 그 나이 먹고도 과거는 과거로 묻어둘 생각을 하지 못하는군.’
저 노망난 노인네를 마주하면 오래된 옛 과거가 담긴 추억의 상자를 연 것처럼 옛날의 일들이 모두 어제 일처럼 선명해진다.
“노인네 이젠 추잡한 짓은 그만해. 언제까지 죽은 한나를 이용해서 남을 괴롭힐 생각이야?”
“뭐, 뭐라고?”
“주제를 알아. ‘Full Moon’이 한나의 노래라고?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한번 지껄여 봐. 세상이 누구 편을 들어줄지 한번 보자고 보도록 하자고. 로시난테를 키워낸 유명 프로듀서인 이 몸일까? 아니면 아티스트들에게 버림받은 영세한 레이블 회사 대표일까?”
“쓰레기 같은 놈...!”
“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분수를 알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나? 그럼 알려주도록 할까?”
힐끔.
모건의 마음이 바뀌었다. 원래는 웨인에게 적당히 돈이나 좀 쥐여주고 타일러서 돌려보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잘근잘근 밟아야 할 것 같았다. 도경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모건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모건 너. 무슨 생각이냐...!”
“그냥 인사나 하러 가는 겁니다.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저 신인에게요.”
저벅저벅.
그 말에 서둘러 뒤따라 가려는 웨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행동은 조금 늦은 경향이 있지 않았다. 어느새 도경의 옆자리에 모건이 자신의 엉덩이를 앉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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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뭐야 당신?”
“그래. 돈키호테의 기대 중인 신인이라고?”
도경과 토마스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모건의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했지만, 모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경에게 말을 걸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을 겁니다. 모건.”
“토마스 오랜만에 보는 데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그래도 예전에 몸담았던 곳에서 기대하는 신인을 보고 싶어서 말이야. 인사 정도는 나누게 해달라고?”
“이익! 당신...!”
까득.
“잠깐 토마스. 인사 정도 나누러 왔다잖아? 뭐 이리 흥분해?”
“도경 씨.”
스르륵.
이를 가는 토마스를 보며 모건은 오히려 보란 듯이 웃음 지었고 결국 토마스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분노를 맛보며 주먹에 강하게 움켜쥐었지만 이내 자신을 말리는 도경을 보며 주먹에 힘을 풀어야 했다.
“그래. 갑자기 나한테는 무슨 인사려나?”
“생각보다 도도한 동양인이잖아? 미국교포?”
“교포는 무슨 순수 본토에서 올라온 한국인이다.”
“그래? 그거 의외인걸? 보통 동양인들은 내성적인 성격인데 말이야.”
“보다시피 나는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야.”
갑작스레 찾아온 자신을 보며 당황하지 않고 여유를 보이며 웃음 짓는 도경의 모습에 모건은 도경이 조금 독특한 동양인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다니 그래도 배짱은 있다는 건가?’
자신의 인상이 험악한 것을 아는 모건은 개인적으로 배짱 있는 녀석을 좋아한다. 웨인을 짓밟기 위해 부렸던 유희 거리가 어느새 도경에 대한 흥미로 발전하였다
‘하긴 웨인 영감탱이가 고리타분해도 사람 보는 눈은 있었지.’
힐끔.
‘그 웨인이 기대를 거는 동양인이라...!’
웨인이 아무에게나 기대를 걸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와 함께해본 경험이 있는 모건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노망난 노인네라 욕하며 무시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웨인의 안목을 제일이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모건인 것이었다.
씨익.
‘이거 의외로 욕심이 생기잖아?’
중얼.
미국에서의 동양인 뮤지션 한계에 도경에게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모건이지만 한 번 더 머리를 굴려보니 새로운 시각으로 도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웨인이 7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던 로시난테에 직접 찾아와 부탁한 신인이다. 절대로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고 그것은 자신이 뺏어와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상품이라는 것이었다.
“카일이라고 했나?”
“그쪽은 배신자 모건 씨라고?”
“하하! 그래 배신자라. 뭐, 나에 대해서 토마스가 어떻게 설명을 들었는지 예상 가는군. 그래 배신자지. 그래서 말인데 카일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자신이 배신자라는 말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아니, 오히려 당당한 그의 모습은 사람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 대상이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다면 희한하게 그 사람이 특별해 보이는 느낌 같은 것을 받는다.
그런 경우가 바로 모건이었고 그는 자신의 그런 강점을 앞세워 모두가 예상하지 못하는 발언을 도경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우리 슈퍼노바와 계약하지 않겠나?”
“뭣...!”
“당신 그게 무슨!”
“돈키호테에 맺은 계약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우리 쪽에서 다 커버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신인으로 최고의 대우로 계약조건도 말이야.”
웨인이 지켜보고 토마스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 도경에게 헤드헌팅을 제시하는 모건의 모습에서 두 사람은 노발대발했지만, 모건은 그 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도경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음. 순수한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뭐 그렇지. 쪼잔하게 거짓말하지 않도록 하지. 저 영감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제시한 계약이긴 해.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너에게 제시한 계약은 진짜라고? 웨인을 엿 먹이고 싶은 거지. 너에게는 피해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엄청난 이득뿐이지.”
“당신 의외로 뻔뻔한데?”
피식.
“하하하! 비즈니스에 뻔뻔함은 능력이지. 칭찬으로 들리는 건 내 착가인가?”
“재밌네 당신.”
“도경...!”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풍경. 그런 도경과 모건을 바라보는 웨인과 토마스의 동공은 남몰래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그저 모건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