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03화 (303/357)

303화

왕좌의 길(King’s Row)

어스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바티스 국왕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 이렐리아 바티스의 폭정을 명분으로 대륙 중부와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4대 공작가들의 대영주들이 서로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바티스 가문을 몰아세워 대륙 밖으로 추방하며 평화가 찾아온 듯싶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이제부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바티스 가문을 쫓아내고 남은 킹스랜드를 차지하기 위해 4공작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고 그것은 이내 대륙전쟁으로 발발하고 만 것이다.

‘뱀의 머리’ [프레드릭 가문]

‘황금의 검’ [리버룬 가문]

‘고고한 사자’ [레니스터  가문]

‘바람을 타는 말’ [마티렐 가문]

4대 공작들 사이에서 어스랜드의 패권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크고 작은 영지들은 공작가에게 흡수되거나 복속되었고 수많은 피를 흘리는 시간은 무려 3년이 지났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피가 흘렀고 사람들은 굶주림과 고통에 괴로워하였지만 그것은 4대 공작들은 알바 아니었다.

‘곧! 왕좌의 주인이 결정된다!’

외부로는 서로를 향한 긴장과 견제를 한시도 놓지 않았으며 내부로는 치열한 암투를 벌이며 가문의 내실을 다지던 공작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흡수할 세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내실은 이지 수많은 피로 다질 만큼 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모든 것을 쏟아부을 총력전. 4대 공작들은 서로가 비장의 카드를 손에 쥐고 상대가 틈을 보이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폭풍 전의 고요.

숨을 죽이고 조금이라도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조용히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4대 공작들은 뜻밖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어스랜드 북부지역 『윈터플』.

추운 기온. 설산과 흉학한 짐승들이 가득한 척박한 환경 속에 유배당했던 한 가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심장’ [파이크 가문]

과거 어스랜드의 5번째 공작. 베르닉 파이크의 등장으로 왕좌 쟁탈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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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은 왕좌의 길 대본에 적혀있는 작품의 배경과 설정을 곱씹고는 자신이 맡게 될 배역을 읽어나갔다.

‘잊혀진 가문. 파이크 가(家)의 기사. 흑기사 아나긴...!’

흑기사 『아나긴』.

젊은 나이에 파이크 가(家)에 있는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은 그는 파이크 가(家) 가주 베르닉에게 신임을 받는 기사이자 영지의 치안을 관리하는 치안단장으로 파이크 가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었다.

휙!

도경은 대본을 빠르게 넘기면서 글을 읽어나갔고 자신이 연기할 아나긴을 분석하며 대본에 표현된 아나긴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그려나갔다.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제작진이 원하는 아나긴의 이미지가 선명해져 가고 도경이 쥐고 있던 대본은 어느새 끝장에 다 도달해 있었다.

“좋은 대본이야...!”

뛰어난 각본가가 쓴 대본이었다. 왕좌의 길 전반적인 캐릭터의 이해도가 뛰어나고 캐릭터의 고증을 최대한으로 담아낸 대본이었다.

도경이 맡을 아나긴이란 배역 또한 엄격하고 냉철하며 손속에 자비가 없는 잔인함을 지닌 흑기사의 카리스마를 잘 그려 내놓으면서도 한편으로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는 인간적인 약한 면모를 그려나가는 것을 잊지 않고 표현했다.

“역시 이 드라마를 택한 것이 정답이었어.”

크리스틴이 드라마 오디션용으로 가져왔던 배역 대본들 중에 캐릭터에 대한 묘사와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지시문을 보고 이 드라마를 택했던 것이었는데 역시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대본이었다.

‘하지만... 부족해!’

치밀한 구성과 디테일한 완성도에 신경 쓰고 집착하는 특징을 지닌 미국의 대본은 역시나 훌륭했다. 조연과 주연을 나누지 않고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을 담은 대사들과 심리묘사를 표현할 구체적이고 섬세한 지시문은 정말로 나무랄 데가 없는 대본이었다. 하지만 도경은 부족하다 여겼다.

“이거 가지고는 조금 모자라다.”

중얼.

분명 완성도가 높은 아나긴 이었다. 하지만 도경 그 스스로가 생각하고 해석한 아나긴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나긴 이라면...”

스윽.

도경은 대본을 읽고 또 읽으며 아나긴을 떠올려간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생각하고 해석한 아나긴을 조심스레 덧씌워나갔다.

“아나긴은...!”

가상의 인물을 헤아리며 상상으로 구체화. 그리고 구체화한 캐릭터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현실로 실체화하는 작업을 가져가기 시작한다.

“난..”

후-.

호흡이 변하고 눈빛이 변하였다.

눈빛이 변하자 자세가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대본의 종이를 넘기는 손길은 느릿느릿해 져간다.

“나는...!”

우뚝.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그 손길은 너무나도 규칙적이고 절도가 배어 나와 단순히 종이를 넘기는 행위임일 뿐임에도 그 사람이 틈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무언으로 알려주고 있었는데

“아나긴이다.”

스르륵.

툭!

천천히 대본의 책자를 덮은 도경.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도경은 대본을 책상 위에 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경 씨...?”

“가자.”

“네?”

“오디션 보러 말이야.”

“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더 이상은 시간 낭비야. 먼저 간다 크리스틴.”

앉은 제자리에 무서운 기세로 대본을 읽던 도경이 갑자기 일어나자 크리스틴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도경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황당한 대답이었다.

“자, 잠깐만요 도경 씨. 대본은 챙겨가야죠!”

싸늘한 음성과 함께 먼저 대기실 자리를 뜨는 도경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크리스틴.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도경이 두고 간 대본을 챙겨 도경의 뒤를 다급하게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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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란 시간은 모두에게 쏜살같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하나, 둘 다시 오디션장에 모였다.

“......”

맥 클라우드 감독과 두 배우는 미리 앉아서 도경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은 이 오디션이 설마 왕좌의 길의 주연인 아나긴 역을 걸고 벌어지는 오디션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그저 숨죽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철컥! 끼이익.

“!”

숨 막히는 적막감 속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문 뒤로 나타나는 도경의 얼굴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아졌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1시간이면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들어오는 도경을 향해 맥 클라우드가 인사를 건네며 이 자리의 주역을 반기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이 받았던 느낌이 진짜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느낌이었을지 판별하는 순간이 올 것이기에 그는 조금 상기돼 있었다.

“많이 준비해왔나?”

끄덕.

“마음에 들 겁니다.”

“그래...!”

힐끔.

‘묘하군. 미세하지만 분위기가 바뀌었어. 뭐지? 긴장한 건가? 아니면 마인드 컨트롤?’

좀 전에는 세상 두려울 것 없던 모습을 보였던 도경의 기질이 차분하게 바뀌어 있는 것에 맥 클라우드 감독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차분함의 근원을 딱 집어서 분류할 수 없는 연유에서였다.

“그래. 그래서 어디 씬을 준비해왔나.”

“왕좌의 길. 2화 #67씬의 연기를 펼칠 생각입니다.”

“역시. 그 쪽인가?”

끄덕.

“그렇죠. 중요한 씬 이니까.”

도경이 말한 씬을 듣고 아나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맥 클라우드 감독과 그 옆에 아나긴의 배역의 주인인 스캇 드바로가 서로들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왔다.

#67번의 장면은 드라마 내에서 아나긴이란 캐릭터의 임팩트를 주는 주요 장면으로 아나긴의 비밀과 그가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한 인물인지를 표현하는 장면이었기에 두 사람은 도경이 가져온 씬을 당연하다는 듯이 납득 한 것이다.

“바로 연기 들어가고 싶은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상대역들 대사는 내가 쳐 줄 테니 연기 들어가고 싶으면 신호 보내게.”

“알겠습니다. 그럼...”

“둘 다 잠깐!”

똑똑.

“응?”

도경은 사람들이 자신이 말한 씬을 대본 책자에서 찾은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연기를 펼치고 싶다고 의사 표현을 하며 맥 클라우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남성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목을 이끈 후. 두 사람 사이를 난입했다.

“스캇? 무슨 일이지?”

난입한 남성은 좀 전에 맥 클라우드 감독과 멱살잡이를 했던 스캇 드바로.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감독을 바라보며 모두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네었다.

“감독. 그 상대역 내가 맡을게. 그리고 나도 #67을 연기하겠어”

“뭐라고?”

“감독이 직접 확인해 보라며? 저 자식이 나보다 아나긴에 어울리는지 아닌지 말이야. 그럴 거면 서로 직접 연기를 펼치고 비교하는 게 좋지 않겠어?”

스캇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맥 클라우드 감독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조용히 앉아서 골똘히 대본만을 들여다보고 있다 싶더니 연기대결을 제안해 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감독에게 거부권은 없는 거 알지? 아나긴은 내 배역이잖아. 이 정도의 권리는 줘야 공평해. 그렇지?”

“네 말이 맞지만, 네 모양새가 안 좋아지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냐? 먼저 저 녀석이 펼치는 연기를 보고 나서 제안해도 늦지 않은데 말이다.”

“어느 배우가 눈 멀쩡히 뜨고 정체도 모르는 놈팡이 녀석에게 순순히 자신의 배역 오디션을 보게 만들어?”

“.....”

스캇은 자신의 배역을 두고 도경이 얌전히 오디션을 보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배우로서 당연한 행동이었고 스캇 개인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맥 클라우드 감독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스윽.

“어이, 동양인!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카일. 내 이름은 카일이다.”

사람들의 무언의 동의를 얻은 스캇. 그는 자신의 상의를 벗어 재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경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다가섰다.

“그래 카일.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배역』을 얄팍한 수로 훔치려는 네 녀석을 내가 혼 내줄 생각이니 말이야.”

“...마음대로 해. 상관없으니까.”

“하하. 상관 없다라... 자신감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거 빼면 시체라.”

“하하하...”

스캇은 도경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압박하며 도발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더 열 받는 상황에 눈빛을 굳히고 말았다. 그래도 조금은 당황하거나 긴장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유쾌할 텐데 아무런 흔들림 없는 도경의 얼굴을 보니 감정이 상한다.

‘낯짝 하나는 제대로 두껍네. 하긴, 그러니까 내 위약금을 물겠다고 그런 개소리를 지껄일 수도 있었던 거겠지. 정말...’

울컥.

스캇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열이 받았다.

처음 보는 놈팡이가 아나긴 배역을 훔치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배역에 관한 계약파기로 발생 되는 위약금 전부를 자기가 물겠다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동양인의 존재에 분노가 일었다.

“개 같은 새끼야...”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스캇은 결국 욕을 내뱉고 말았다.

이 날벼락 같은 어이없는 상황도 화가 났지만, 아무런 동요 하나 보이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오디션 볼 준비를 하는 도경이 문제였다.

‘감히 나를 개무시하다니... 연기로 묵사발 내주마!’

으득.

자신이 배역을 딸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한 점 의심하지 않는 도경의 모습을 스캇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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