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후...! 여기까지입니다.”
“......”
툭-! 데구르르.
“하아... 하아...!”
#씬67의 연기가 끝이 났다.
도경이 직접 자신의 연기가 끝났음을 알리었지만, 사람들은 아직 도경이 보여준 연기의 여파에 벗어나지 못한 듯싶었다.
훌륭하다? 최고였다? 브라보? 어떤 말을 꺼내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도경이 보였던 연기에 지금 자신들이 수식어를 붙이며 언급한다면 무언가 결례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느낌에 그 누구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우. 안 쓰는 근육 써서 그런지 얼굴 얼얼하네.”
주물럭주물럭!
그런 사람들의 곤란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경직되어 있던 자신의 안면근육을 푸는 데 여념이 없었다. 평상시에 무표정하거나 냉막한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는 도경이기에 느끼는 피로감이었다.
“......”
꿀꺽.
‘정말로 이 녀석이 좀 전과 같은 녀석이라고?’
좀 전에 그 누구보다 비장하고 차가운 얼굴로 냉혹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지금은 산들바람처럼 여유롭고 생기가 가득 찬 얼굴로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수 없잖아! 그리고...’
부르르.
그 엄청난 갭 차이에 스캇은 그저 소름이 돋을 뿐이었다.
좀 전에 자신을 향해 죽음을 고하던 아나긴의 서늘한 두 눈동자도 지금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주무르는 모습도 자신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신경이야!?”
중얼
아나긴이 그 자체가 된 혼신의 연기를 선보이고는 연기가 끝난 순간 천연덕스럽게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연기하는 모습 같아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음?”
힐끔.
“...!”
움찔.
그러 스캇의 시선을 느꼈을까? 도경은 주물럭거리던 얼굴에 손을 떼고는 자신에게 멍한 시선을 보고 있는 스캇을 향해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고생했어요. 아까 좀 까칠했죠? 조금 배역에 몰입해 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줘요.”
“어, 어? 그래... 그 정도쯤이야.”
좀 전에 뻗대던 태도와 달리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도경을 보며 스캇은 당황하면서도 자연스레 악수를 나누었는데 이내 이어지는 도경의 말에 그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이번엔 스캇 당신이 #씬67을 연기할 차례인가요? 상대역은 제가 맡고 말이에요. 되게 기대되네요.”
“윽! 그건...”
“음? 왜 그래요? 스캇? 표정이 안 좋네요? 어디 컨디션이라도 안 좋은 거예요?”
씨익.
“...!”
‘이 자식...! 일부러 그러는 거지?’
도경이 자신을 향해 해맑게 미소짓는 것을 보면서 스캇은 등 뒤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나긴 그 자체인 혼 들린 연기를 봐놓고 그 상태에서 아나긴을 연기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후... 너 성격 하나 끝내주는 구나?”
이미 스캇 본인 스스로가 결과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도경 이상의 아나긴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연기를 보일 만큼 그는 미련하지도 낯짝이 두껍지도 못했기에 그는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 걸 봐버렸는데 연기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포기 의사를 밝히는 스캇. 그것은 자신의 배역을 순순히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스캇의 얼굴에는 분해하거나 굴욕적이라고 느끼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도경의 보여준 아나긴의 연기는 분한 감정조차도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연기였기 때문이다.
아나긴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 앞에 있는 동양인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스캇의 진심이었다.
씨익.
“후후. 좀 내가 잘해버렸지?”
“그래.”
피식.
“네 녀석의 승리다.”
순수하게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스캇을 보면서 도경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제법 그릇이 큰 멋진 녀석이라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도경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캇은 뒤 돌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제작진과 맥 클라우드 감독을 바라보며 시원섭섭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감독 이미 결정은 난 거죠?”
“미안하다. 스캇”
“아뇨. 감독 나도 배우입니다. 이런 걸 봐버렸는데 고집부리는 게 웃긴 거죠.”
“스캇...”
술렁.
“하하. 괜찮아요. 위약금이나 두둑이 챙겨주세요.”
“그래...”
“에이. 분위기 이상해졌네. 다들 저 괜찮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거지 표정들 풀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갑작스럽게 아나긴을 연기할 주연이 교체되어 버린 상황.
사람들은 머릿속으로는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면서도 눈앞에 자신의 배역을 빼앗긴 스캇에 대한 동정과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스캇은 너털웃음 지으며 자신은 괜찮다며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저기요...!”
“음?”
“저 합격이죠? 아나긴의 주연으로 선정된 거죠?”
“그래. 그래야겠지... 합격이야. 아나긴의 배역은 자네 거야. 축하하네.”
꿈틀!
‘연기력과 자신감이 넘치는 만큼 인성은 역시 그다지 좋지 못한가 보군. 그래도 상대방의 배역을 빼앗은 건데 배려가 없어.’
자신이 주연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도경의 행동에 맥 클라우드 감독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결과를 확실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의 스콧의 앞에서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도경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맥 클라우드 감독이었다.
배역을 빼앗기고 제일 분해해야 하고 화내야 할 스캇이 사람들을 신경 써주고 있는데 오히려 배려를 보여야 할 도경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연기력을 떠나서 사람으로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럼 감독님.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로서 한 가지 의견을 내고 싶습니다.”
“뭐라고? 의견? 자네 좀 건방지다 생각하지 않아?”
“배우가 자신의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데 안 됩니까?”
“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리를 말하며 맥 클라우드 감독에게 따지는 도경의 모습에 사람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면 자신감을 넘어서 그냥 예의범절이 없는 망나니나 다름없었는데 저 동양인에게 아나긴을 맡기는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에게 「롭 라즐리온」 배역을 주면 안 됩니까?”
“뭐?! 롭 라즐리온을?”
웅성.
“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설마 싸구려 동정심이냐!?”
울컥!
“그딴 거 아니야. 그저 배우로서 내고 싶은 의견이었을 뿐이야.”
“뭐?”
도경의 예상치 못한 의견에 사람들이 술렁였고 스캇은 자신을 동정해서 벌인 일인 줄 알고 도경을 노려보았지만, 도경은 스캇을 무시하며 맥 클라우드 감독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감독님?”
“『롭 라즐리온』은 노인에 가까운 중년인. 젊은 스캇과 안 맞는걸 알 텐데?”
“그러니까 묻는 건데요?”
“음...”
『롭 라즐리온』
왕좌의 길. 시즌1에 나오는 조연으로 윈터플 영지에서 레지스탕스인 카이언인들의 단체 『블루문』을 이끄는 수장으로 파이크 영지의 가주 베르닉 파이크와 적대적인 구도에 서서 작품에서 사건을 일으키며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배역이었는데 도경은 그런 배역을 지금 스캇에게 주면 안 되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고. 우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의견을 낸 거지?”
롭 라즐리온의 설정상의 나이는 52세. 올해로 21살인 스캇이 절대 맡을 수 배역이건만 이상하게도 맥 클라우드는 도경의 생각을 더 듣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도경의 말을 들어야 하는 느낌을 받은 까닭이다.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요.”
“어째서?”
“저, 이 녀석 그리고 저쪽. 3명이 그림이 된다 생각하니까요.”
“어?”
자신과 스캇 그리고 제작진과 함께 앉아있는 잭 스미스를 가리키는 도경의 손짓에 맥 클라우드 감독이 서둘러 그 3명을 살피며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왕자님 같은 꽃미남 『잭 스미스』
듬직한 덩치에 훈훈한 미소가 매력적인 마초남 『스캇 드바로』
다소 담백한 인상이지만 미친 연기력과 묘한 매력을 품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양인 『카일』
‘이거...’
꿀꺽.
이 3명의 남자가 서 있는 구도를 떠올린 맥 클라우드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림이 된다!’
찌릿!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전율.
작품 촬영일이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불안과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맥 클라우드 감독은 이거 다란 느낌에 눈빛을 번쩍이며 흥분이 섞인 기색으로 도경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림이 되는군. 그럼 카일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래도 스캇이 롭 라즐리온의 역할을 맡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 건 사실이잖나.”
“장애가 되나요? 나이야 숫자일 뿐 아닙니까. 롭 라즐리온은 종족도 인간도 아닌데 뭐, 설정으로 뭐 안 될까요? 왕좌의 길의 장르는 판타지잖아요.”
“그렇지...! 그런 거였지! 왕좌의 길은 판타지였지! 내가 어리석었어! 원작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너무 꽉 막혀 있었어!”
쿵!
“가, 감독님?”
흥분하며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맥 클라우드 감독의 모습에 제작진들은 당황하고 있었지만, 맥 클라우드 감독은 그들 전부 무시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급히 걸었다.
전화를 건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전화를 끊고 다시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어! 나야. 맥 클라우드 감독. 스타킨 작가가 글 쓰는지 연락을 안 받는 듯싶은데 급한 일이니까 내 쪽으로 빨리 연락 좀 달라고 전해줘.”
통보에 가까운 그 재촉에 전화 받은 상대 쪽은 난감한 이유가 있는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맥 클라우드 감독은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시끄러워! 이쪽이 더 급한 일이라고!”
“...!”
그런 맥 클라우드 감독을 보며 제작진들은 직감했다. 도경의 제안을 맥 클라우드 감독이 수락했고 그 일의 여파로 여러 사람이 피곤해질 거라는 것을 말이다.
씨익.
“느낌이 좋아.”
모두가 어안 벙벙해야 하고 있을 때. 도경만이 앞으로 벌어질 재미난 일에 기대하고 있었다.
큰일을 벌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온몸이 근질거리는 감각에 결국 도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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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 엔터테인먼트
“우하하하! 우리 회사 주자가 쭉쭉 성장하는구나!”
한 사무실 모니터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한 남자. 그는 태블릿 패드를 쓰다듬으며 진한 키스를 날리었다.
“설마 가자마자 빌보드 차트를 석권할 줄이야. 역시 우리 도경이라니까! 얼른 현섭이 형 만나서 속 좀 뒤집어 줘야 하는데 말이야. 우헤헤! 쌤통이다! 주식 가지고 아직은 멀었다느니 속 뒤집더니 이젠 할 말 없어서 어쩌나?”
씰룩씰룩.
이상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시즌을 맞이하고 있는 남자의 정체는 [JY]엔터테이먼트 대표 박진용 사장. 그는 도경이 미국에서 친 대박으로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JY엔터 주가 성장! 당당히 3대 기획사라 말하다!]
[드디어 꽃을 피운 JY엔터테인먼트의 미국진출!]
[드림걸즈! 카일 박도경! TOP.10 Project 인기 멤버 아이돌까지! 대박 연속! 엔터테인먼트 브랜드 파워 1위 달성!]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박진용 사장의 집념의 빌보드 넘어트리기 한판승!]
“진짜 격세지감이란 게 이런 말이겠지.”
지옥과 천당을 오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처음에 미국에 도경을 아무런 반대 없이 보내줬을 때. 임원들의 엄청난 반발과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또 미국 병이 도졌다면서 도경을 망칠 거라고 오만가지 욕을 먹었던 박진용 사장은 180도 뒤바뀐 지금의 상황에 박진용은 그저 도경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미국진출의 쓰디쓴 실패와 미국의 두꺼운 벽을 알면서도 도경을 미국으로 너무 순순히 내보낸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었을까 박진용 사장도 도경에 대한 고민과 수많은 걱정으로 말을 못 이루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도경이 이렇게 빨리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후후. 그럼 나도 슬슬 눈치 안 보고 내 앨범을 내도 되겠지?”
Rrrrr!
“응? 이 시간에 누구지?”
회사와 세간의 눈치를 보느라 앨범에 앨자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자신의 앨범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고 있었던 박진용 사장에게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
『매니져 형』
“상길이 형?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수십 년을 함께 해와도 바꾸지 않은 전화번호부의 이름에 박진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새벽 2시경. 보통 같으면 자신이 자고 있을 시간임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직감한 박진용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상길이 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회사에 뭔 일이라도 난 거야?”
[그래! 일이면 일 낳지. 도경이가 또 한 건 해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역시 아직 모르는구나. 나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톡으로 내용 보낼 테니까 읽어 봐라.]
“어. 알았어.”
전화가 끊기자마자 날라오는 영문의 뉴스 기사 링크들. 박진용은 그것들을 읽으면서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HBA 올해 기되대는 드라마 신작 『왕좌의 길』 주연 변동!]
[알 수 없는 주연 변동과 캐스팅. 회심의 수? 아님 최악의 수?]
[Kyle이란 동양인 배우는 누구?]
“뭐...! 드라마 주연? 뭐야 이게!?”
생뚱맞게 드라마에 관련한 기사에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던 박진용은 이내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빌보드에 이름을 알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드라마의 주연을 꿰찬 도경의 행보에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박도경! 이 자식 뭐 하는 녀석이야! 드라마 주연이라고? 투어 끝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이게 말이 돼?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거야? 아니! 그것보다 왜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한 거야! 내 당장 이 자식을!”
톡!
“음?”
기쁨과 괘씸함 이상한 감정이 서로 오가고 들끓고 있던 박진용에게 한상길 매니저의 한 통의 톡이 날라오고 박진용은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내일 아침 일찍 와. 당분간 또 바쁠 거다. 그리고 너 새 앨범은... 말 안 해도 알지?]
“으아아!!!”
미뤄지는 자신의 새 앨범.
잘난 스타를 둔 기획사 사장의 즐거움과 비애가 섞인 비명이 한방 중에 울려 퍼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