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07화 (307/357)

307화

감정이 격해진 고든 작가가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서고 그를 서둘러 따라나선 맥 클라우드 감독.

조용해진 거실에는 도경과 그의 에이전트로 따라왔던 크리스틴이 놓여있었다.

“설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뭐, 아무런 말도 못 했네...”

“잘하셨습니다. 오히려 어설프게 말을 내뱉었다간 더 복잡해졌을 겁니다.”

“후...”

도경의 한숨에 크리스틴이 그를 위로했다.

엔간해선 기운을 잃지 않는 도경이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자 그녀로서는 그저 쓴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부당한 대우나 어려운 요구사항을 해온다면 에이전트인 자신이 중간에 조율이라도 해보련만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이라 그녀조차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세상을 살면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지금 도경이 조우한 상황 또한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 크리스틴은 생각했다.

“정말로 생각 못 했어. LA 폭동에 한국인과 흑인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말이야.”

“한국에 살았던 도경 씨는 모르겠지만 미국에 사는 한인들 사이에선 유명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인들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구요.”

“복잡해...”

“복잡하죠. 그날의 사건은 모두가 피해자였으니까요.”

“음... 모두가 피해자라...”

고든 작가를 떠올리며 도경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든 작가의 표정과 눈빛은 이성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님을 도경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모두가 가해자란 거였네.”

“네?”

“그렇잖아? 모두가 피해자라는 말은 모두가 가해자의 위치로 있었다는 거니까.”

“가해자란 어감은 한인들에겐 억울하군요. 한인들의 입장에선 그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도경의 말에 크리스틴은 미간을 구기며 학창시절 사회시간에 배운 1992년에 발생한 LA 폭동에 대해서 떠올렸다.

[로드니 킹 사건]

음주운전과 과속을 했던 흑인을 과잉진압하여 장애를 입힌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를 받은 부정당한 판결 결과에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를 나와 시위를 시작으로 폭동으로 발달한 사건이었다.

사실 음주운전 상태에서 과속이란 범죄를 저지른 그의 잘못이 있기에 폭동까지 발달할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흑인들에 대한 고질적인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극빈층인 흑인들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시점이라 결국 최악의 인종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최악의 폭동에 한국인이 껴있었다는 것이었다.

“폭동의 원인은 백인들의 불공정한 인종차별과 빈부격차 때문이었는데 언론과 정치가들이 합심해서 폭동의 원인을 우리 한인들에게 돌렸고 그 선동에 분풀이처럼 한인들을 약탈하고 다치게 한 흑인들도 저희 처지에선 좋게 볼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시위나 운동이 아닌 폭동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폭동이 일어나자 LA 경찰들은 흑인들이 오지 못하도록 백인들이 사는 지역을 원천 봉쇄하였는데 덕분에 갈 곳을 잃은 흑인들이 한인타운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언론들은 이때다 싶어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려 물타기를 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두순자 사건』이었다.

[두순자 사건]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로 한인 마트 점주가 흑인의 어린 소녀를 소매치기로 오인하여 총으로 피살한 사건으로 LA 언론들과 정치가들은 이 사건을 흑인의 폭동의 원인으로 재조명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흑백갈등에 한인이 껴버리며 한인들에게 있어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해자보단 희생양이란 말이 옳습니다.”

“희생양이라...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잖아?”

“네?”

재미교포에게 있어 조금은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크리스틴은 도경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도경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대답을 하였다.

“한인들 또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잖아.”

“그건...!”

스마트폰으로 당시의 사건에 관련된 글들을 읽고 있었던 도경은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을 바라보며 물었다.

“LA에서 벌어지는 흑백갈등과 흑인들의 분노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한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두순자 사건도 그렇고, 로드니 킹 사건 때도 말이야. 너무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어.”

“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경의 말에 크리스틴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경이 했던 말처럼 그 당시 한인들은 미국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인식 자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세금을 더 낼뿐이라면서 시민권의 취득을 미루었던 한인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가해자란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당시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안다면 도경 씨는 가해자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뭐, 그렇겠지.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나라도 그 상황이라면 분명 옳고 그름을 떠나 분명 분노할 거야. 그러니까 고든 작가의 제자가 죽은 거 아니겠어?”

“그건...”

‘뭐, 그게 버거운 현실과 사람의 한계겠지.’

가해자란 말에 기분이 상한 크리스틴을 보며 도경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성적으로 그 누구보다 올바르게 살기엔 사람이란 존재는 환경이나 상황에 좌지우지되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정론으로 현실을 살아가기엔 너무나 버겁다.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거야.”

“네?”

“고든 작가 말이야.”

도경의 영문모를 말에 크리스틴이 의아해했지만, 도경은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액자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왕좌의 길에서 인종차별에 일침을 가하는 글들을 쓴 작가라고? 분명 그러면 안 될 것 알면서도 미워하고 싶은 거겠지.”

거기에는 고든 작가와 함께 학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한 흑인 여성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거실을 나갈 때 괴로움이 서린 눈으로 사진을 쓸었던 그의 시선을 생각한다면 분명 그 잃었던 제자는 사진에 있는 소녀가 분명했다.

“바로 이 여성 때문에 말이야. 분명 특별한 사이였을 게 분명해.”

스윽.

“안 그렇습니까? 사모님?”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도경은 뒤에 느껴지는 인기척과 달콤한 향기에 고개를 돌리며 한 노파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에서나 볼 벗한 평범한 인상의 노파였지만 얼굴 위에 쓴 안경.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인자한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사람을 편안케 하여 인상적이었다.

“맞아요. 옥타비아. 그 아이는 그이의 특별한 제자였죠.”

빙긋.

“실례가 안 된다면 그에 관한 이야기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물끄러미.

은색의 쟁반에 직접 만든 사과 파이와 김이 모락 나는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노파는 물끄러미 도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가까운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러도록 하죠. 저쪽도 뭔가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마담.”

“마담이라니. 재밌는 청년이네요. 앨리스라 편히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앨리스 여사님.”

“호호호.”

영화 속 귀족들이 보일 벗한 예법을 넉살스럽게 보이는 도경의 모습에 노파가 싫지 않은 듯 웃음 지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분위기를 가진 독특한 청년이었다. 그런 점이 아니었다면 도경의 요청에 수락하며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 소녀의 이름이 옥타비아라고 했나요?”

“그래요. 옥타비아 그 아이는...”

마당 뒤편에서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맥 클라우드 감독과 고든 작가와 달리 부드러운 화조로 그녀는 도경과 크리스틴을 향해 동화책을 읽어주듯 과거를 들려주었다.

---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 자신의 오빠를 따라 갱단에 가입하며 방황하던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옥타비아.

온갖 비행과 방황을 일삼던 옥타비아에게 고든은 그녀에게 뛰어난 글쓰기 재능이 있는 것을 자신의 수업에서 발견하였다. 그렇게 하나의 청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고든 작가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 덕에 옥타비아는 힘겹지만 변화하기 시작하고 그 자그마한 변화는 슬럼가에 있는 갱단 소녀가 명문대 장학생으로 추천 합격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내었다.

도경은 현재 그런 기적이 남겨놓은 글을 읽는 중이었다.

팔랑.

“후우~ 이건...!”

“어떤가요?”

“앨리스 여사. 이건 정말 좋은 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실 아나긴이죠?”

“단박에 눈치채다니 대단하네요. 옥타비아 그녀가 우리 그이에게 선물한 소설이랍니다.”

도경은 자신의 손안에 들린 낡은 얇은 책자를 들어 올리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조그마한 마을. 평범한 중년인의 농부의 따스한 일상과 어느 날 찾아온 객을 맞이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소설은 놀랍게도 아나긴을 묘사한 소설이었다.

“정말 야속한 일이네요. 분명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뛰어난 작가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죠. 안타까운 일이죠.”

도경의 말에 앨리스 여사가 서글픈 눈빛을 지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에게 있어서도 옥타비아란 소녀는 딸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이 마음에 든다...!’

불끈.

“덕분에...!”

“...?”

누구나 인정하는 왕좌의 길이란 대서사시의 명작도 좋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짧은 단편소설이 개인적으로는 도경의 마음에 와닿았다.

“더욱더 아나긴을 연기하고 싶어졌어요...!”

도경의 강한 의지가 서린 나지막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질 때. 비웃음이 섞인 차가운 조소가 이어졌다.

“흥! 어림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군!”

“여보...”

“당신 쓸데없는 짓을 했구려.”

뒤늦게 거실로 나타난 고든 작가.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는 애처가인 그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를 탓하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그 아이의 소설을 도경에게 보여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뭐?”

“부인 덕에 확신이 섰으니까요.”

도경은 탁자 위에 있는 책자를 집으며 고든 작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갔다.

“이 아나긴은 어떻게서든 제가 가져야겠습니다.”

툭!

“너어 지금...!”

“대신 당신과 옥타비아가 그리는 아나긴을 보여주도록 하죠.”

“뭐...!?”

손에 쥐고 있던 책을 툭 튕기며 내뱉은 예상치 못한 도경의 말에 고든 작가는 그에게 화를 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경이 입에 담는 각오가 너무나 터무니없는 까닭이었다.

“모든 사람이 아나긴에게 열광하게 만들 겁니다.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도록 세상에 단단히 아나긴을 새겨 놓겠습니다.”

경건한 기사의 서약처럼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맹세하는 도경의 그 말에 고든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두근.

그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

“.....”

저벅저벅.

“큼-! 큼큼!”

“뭡니까 감독님?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하세요.”

“아니! 카일 너 정말 자신 있어?”

“뭐가요?”

고든 작가의 집을 나온 세 사람.

번잡한 걸 싫어하는 고든 작가를 고려해서 차를 멀리 세워둬 주차한 곳까지 오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도경의 옆에 걸음을 옮기고 있던 맥 클라우드 감독이 안절부절못하며 도경을 향해 눈치를 주고 있었다.

“드라마로 세상 사람들을 열광케 할 거라니 그렇게 막 호언장담해도 되는 거야?”

“왜요? 감독님은 자신 없으세요?”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게다가 못 미더우면 현장에 직접 와서 보고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NG 내도 좋다니.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거야? 너희 한국에선 그런 식으로 일 처리가 가능한지 몰라도 여긴 미국이라고! 현장에 감독의 역량을 침범하게 만드는 일을 만들다니 절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뭐, 덕분에 엎어지지 않고 어찌어찌 기회를 얻을 수 있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아! 젠장 모르겠다. 널 뽑은 내가 죄인이지 죄인이야.”

왕좌의 길이 명작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드라마까지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게다가 촬영 현장에 라이언 고든을 불러들이는 도경의 행태는 맥 클라우드 감독으로서도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힐끔.

‘이해할 수 없군. 왜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한 거지?’

만약 현장에서 트러블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분위기는 끔찍할 것이 분명했기에 맥 클라우드 감독은 난색을 보여야 하는 처지이었건만 웃긴 것은 감독 그 본인조차도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감독님. 저만 믿으면 다 잘될 겁니다. 그런 느낌이 드니까 감독님도 제 행동을 눈감아 준 거 아니에요?”

“젠장! 넌 진짜 빌어먹을 놈이야! 캐스팅 이후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시늉만 하지 넌 오디션 때나 마찬가지로 그냥 건방진 미친놈이라고!”

자신도 긴가민가하고 있던 본심을 쿡 찌르는 도경의 말에 맥 클라우드 분한 표정을 지으며 도경을 향해 온갖 상스러운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천하의 자신이 무명의 동양인 배우에게 휘둘리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거참 배우한테 못할 말이 없네. 좀 배우 컨디션 좀 신경 써주시죠.”

“지랄! 네 녀석한테는 그딴 거 신경 안 써! 카일 넌 진짜 이틀 뒤에 있을 티저 촬영 잘해야 된다고! 고든 작가님 오실 텐데 그 앞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해봐? 그럼 너나, 나나 개망신이야! 그렇게 되면 고든 작가님이 아니라 내가 널 죽여버릴 거야. 알겠어!?”

“하하하. 언제든지요!”

엄포를 놓는 맥 클라우드 감독을 뒤로하고 웃음 지으며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는 도경을 향해 맥 클라우드 감독과 크리스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도경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틀 뒤라...! 빠듯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짧지만 강렬한 헤프닝.

그리고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왕좌의 길 티저 촬영을 두고 도경이 무엇을 준비해 나갈지 그것은 오로지 도경 그 본인만이 알 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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