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웅성!
탕탕탕탕!
바글바글.
“와아-! 역시 미국! 스케일이 다르네.”
“HBA에서 전면지원한다더니 확실히 규모가 크네요.”
“대단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더니. 이건 정말 엄청나잖아! 정말로 일일이 하나하나 만드는 거구나.”
수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오가며 무언가 소란스러운 장소.
도경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창고 같은 곳을 들어서니 마을 규모의 세트장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록색의 천막들을 배경으로 성과, 마을, 전초기지, 심지어 숲 같은 자연물까지 다양한 환경을 구현하고 심혈을 기울인 세트장의 규모는 도경이 보기에 그야말로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하하하! 진짜 말이 안 돼!”
[왕좌의 길 세트장]
도경과 크리스틴이 온 이곳은 앞으로 왕좌의 길을 촬영할 세트장. 확실히 미국이 왜 영상산업에 최선두에 설 수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이처럼 되게 좋아하는군요.”
“놀랍잖아!? 재미와 유희를 위해 이렇게 사치스러운 일을 벌인다는 게 말이야. 정말 제정신이 아닌 세상이라니까.”
쿡쿡!
“네? 도대체 뭐가...?”
“크리스틴은 몰라도 돼. 말해줘도 이해 못 할 거니까.”
“이상한 사람...”
“하하하! 맞아. 나 이상한 사람이야.”
세트장을 돌아다니면서 소품들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아이처럼 흥분하고 있는 도경을 보며 크리스틴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번영한 드라마산업을 앞에 두고 사치스럽다는 평가를 하며 즐겁게 웃음 짓는 이 남자를 종잡을 수 없는 까닭이다.
오랜 전쟁 동안 먹고 사는 데 급급해 오락거리나 문화가 없는 환경 속에 살아왔던 도경의 전생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평생 이해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역시 정상은 아니야.’
물끄러미.
그렇기에 크리스틴은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세상에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을 바로 도경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재능을 지닐 수 있는 건가?’
천재들만 지니는 재능.
범인인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천부적인 재능을 도경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천부적인 재능이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크리스틴이 알고 있는 재능이라는 것은 갈고닦을수록 빚을 내는 원석 같은 종류였는데 도경의 재능은 원석을 넘어서 그냥 빛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재능은 상식을 파괴하며 불가능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을 척척 쉽게 이루어 나간다.
“천재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중얼.
찬란한 재능을 만나길 고대했던 크리스틴조차 도경을 보면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성공하기 위한 일반적인 과정과 시간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상식과 감각을 뒤집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결과로 성사시키는 그 불가사의한 능력은 재능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너무나 괴이했기에 크리스틴은 괴물이란 단어를 조용히 입에 담았다.
“괴물?”
“아닙니다. 구경은 그만하고 슬슬 가야 하실 것 같습니다. 분장하셔야죠. 생각보다 꽤 걸립니다.”
“아, 그렇지. 분장실은 어디에 있어?”
“저쪽입니다.”
“하하하. 분장실도 엄청나겠지? 기대되는걸?!”
“그렇죠. 저 또한 기대됩니다.”
“음?”
기대감에 반짝이는 순순한 눈빛.
앞으로 있을 첫 촬영에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는 자신의 고객님을 바라보며 크리스틴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안내했다.
“과연 도경 씨가 고든 작가님에게 아나긴을 허락받을지 지켜보겠습니다.”
“...!”
크리스틴은 이번 촬영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과연 도경이 호언장담한 연기가 무엇일지. 그리고 그가 이번에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고든 작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그 결과가 궁금한 크리스틴은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죠!”
---
“피곤해! 촬영도 하기 전에 지쳐버렸어.”
“고생하셨습니다.”
분장은 크리스틴의 말대로 시간이 꽤 걸렸다.
모든 것이 첫 촬영. 앞으로 모습을 보일 왕좌의 길의 배역 이미지와 배우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기 때문이다. 특히나 도경 같은 경우는 서양 중세시대가 연상되는 배경에서 겉도는 동양인이었기에 더욱더 많은 시도를 해야 했다.
“후후. 지금은 아직 스타일이 확정되지 않아서 그렇지. 나중엔 지금처럼 시간이 들지는 않을 거예요.”
“제발 그래야지. 조금 전처럼 꼼짝달싹 못 한상태로 마네킹이 되는 건 사양이야. 그나저나 크리스틴 너 은근히 기분 좋아 보인다? 설마 내가 고생한 게 기분 좋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다만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도경 씨가 신기했을 뿐입니다.”
멈칫.
“너... 설마 내가 그때 입 다물라고 했던 거 가지고 아직 꽁해 있는 거야...?”
“음? 그저 조크였는데? 오해를 사버렸군요. 의외로 도경 씨가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전 괜찮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방긋.
“웃기시네. 꽁해있는 거 맞잖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지만, 도경은 크리스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크라면서 괜찮다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보이는 태도가 마치 하지도 않은 사과를 받은 듯했기 때문이다.
“도경 씨를 보니 타인의 말을 순수히 믿을 수 있으려면 평소 행실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우와... 출연료를 협상할 때도 그렇고 크리스틴 너 얌전해 보이면서 은근 입담이 장난 아닌걸? 얄미울 정도야.”
“덕분에 도경 씨 몸값을 15만 달러로 성사시켰습니다만? 불만이라도?”
“누가 뭐랬냐? 내 에이전트는 최고라고 이야기하려고 했지...”
크리스틴을 향해 투덜거리려던 도경은 본전을 뽑지 못하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그녀의 입담 덕분에 15만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출연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뭐, 그때는 나도 꽤 놀랬었으니까.’
왕좌의 길 오디션 당일은 도경이 배우로서의 가치를 보였지만 크리스틴의 에이전트로서의 가치 또한 동시에 입증한 날이었다.
박도경(카일)이란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침착하게 설명해 다른 주연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다며 확신하며 당당하게 15만 달러를 콜했던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상적이기 그지없었다.
“듣기 좋은 말입니다. 역시 돈이 최고군요. 이 맛에 에이전트 합니다.”
“참 내... 누가 보면 네가 돈 번 줄 알겠다.”
“틀린 말은 아니죠. 도경 씨 몸값은 제가 책임지니까요. 그러니 열심히 일하십시오. 결과만 가져오신다면 지금의 출연료 10배는 아니, 그 이상 받아들이게 해드리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럼 150만 달러라고? 내가 이쪽 사정을 잘 몰라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액수라는 걸 알거든? 구슬려도 적당히 구슬릴 줄 알아야지.”
“그건 모르는 겁니다.”
“음?”
150만 달러. 자그마치 17억에 가까운 액수.
현재 미국 드라마의 최고 출연료가 10억 내외. 도경의 말대로 17억이란 출연료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액수나 다름없건만 크리스틴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경에게 그건 모르는 거라 얘기를 꺼냈다.
“도경 씨가 아나긴으로 모든 사람들을 열광시키게 만들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그렇다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크리스틴 너...”
예상치 못한 크리스틴의 말에 도경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황하게 들릴 수 있는 자신의 말을 담아둔 것도 모자라 그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에이전트란 존재에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너 은근 열혈바보?”
“네?”
“그게 나 하나만 잘한다고 되겠냐?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다니 창피해. 내 손발 어찌할 거야?”
“이익!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 그리고 도경 씨가 먼저 세계니 뭐니 그런 거창한 말을 꺼냈잖아요.”
“응! 아냐. 나는 되고 너는 안돼. 모임 장소 저쪽이지? 나 먼저 갈란다.”
수십 또는 수백 명이 함께 촬영하는 드라마.
한 사람이 아무리 날뛰어도 합이 맞지 않는다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 말한 도경은 크리스틴을 놀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뭐, 저런 사람이...!”
빠득.
자신이 연기한 아나긴으로 모두를 열광케 하고 세계에 새긴다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던 자신이 바보 같아 억울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이 도경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알까? 그녀 자신의 말에 도경이 터무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뭐, 1인분이 안 되면 100인분 정도 하면 되려나?”
크리스틴의 말에 도경의 시야가 바뀌었다.
그 누구도 잊기 힘든 아나긴을 선보이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왕좌의 길 드라마 자체의 성공까지 고려하는 터무니 없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
“크흠! 드디어 오늘!”
분주한 분위기의 세트장 중심. 많은 사람이 말없이 한 중년인을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선 왕좌의 길의 작품의 모든 것을 기획하고 총괄할 맥 클라우드 감독이 서 있었다.
“처음으로 합을 맞춰보는 날입니다. 비록 티저영상을 촬영하는 거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네-!”
“좋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위치에서 스탠바이 하시고 배우들은 제 앞으로 나와주세요.”
첫날의 촬영인 만큼 많은 사람들은 기합이 든 채로 맥 클라우드 말에 힘차게 대답하고 그 모습을 본 맥 클라우드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을 알리며 모아놓은 사람들을 각자의 위치로 보내었다.
우르르.
“흐음-.”
한자리에 모여있던 수많은 스태프와 조연출 감독들이 맥 클라우드 감독의 말 한마디에 제자리로 흩어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지만 맥 클라우드 감독의 눈은 그들이 아닌 자신의 앞에 남겨진 배우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미묘한데? 화면에서 괜찮게 보일까?”
중얼중얼
움찔.
날카로운 눈초리로 배우들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건 품평하듯 노골적으로 점검하는 맥 클라우드 감독의 행동에 왕좌의 길 주연 배우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눈길을 피하는 서투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 하지만 그 안에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품을 위해 몰두하는 뜨거움이 서려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 배우들이 불편해하지 않나. 처음부터 너무 무게 잡는 것 같군.”
“크흠! 대본리딩에도 참여하지 않은 주제에 뻔뻔한 말을 지껄이는군.”
“하하! 아들이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어떡하나? 맥 너도 자식을 가져보면 그런 소리 못 할 거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결혼을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점점 성격이 까칠해지는 게 역시 너에겐 가족이 필요하다니까?”
“흥! 로빈 끔찍한 소리를 하는구나. 오토바이 타고 쇼하다 두 다리 분질러 먹은 멍청한 자식놈을 가질바에 혀 깨물고 자살하는 게 낫겠지.”
“이런... 아픈 곳을 때리는군.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 하하하.”
“흥!”
모두가 불편해하는 정적을 깨는 너털웃음 소리를 내며 등장한 한 중년인.
그는 신경이 곤두선 맥 클라우드 감독에게 편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맥 클라우드 감독이 그의 농을 순순히 받아주며 배우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기색을 누그러트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앞에 사람 좋은 인상을 지으며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는 맥 클라우드 감독의 몇 없는 지기이자 막대할 수 없는 거물 배우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로빈 행크스.”
중얼.
옆집 아저씨처럼 평범한 인상의 중년 배우의 이름은 로빈 행크스(58).
하지만 그의 이력은 괴랄하기 짝이 없었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수상자이며 장르 불문 폭넓은 명 연기력과 오랫동안 수많은 명작으로 경력을 쌓은 전설적인 배우로 성실한 이미지만큼 인품까지 뛰어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존경받는 국민배우가 바로 그였다.
‘어렸을 때 영화에 자주 봤던 배우라 그럴까? 되게 친숙하게 느껴지네...’
전설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배우임은 틀림없지만, 도경은 그의 대단함보다는 어렸을 적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친숙함에 묘한 향수에 젖어 들었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보았던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랄까? 로빈을 바라보는 도경의 눈빛은 어느새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는지 오래였다.
힐끔.
“그나저나 여기에 인사를 못 한 배우가 있었군.”
역시 시선에 민감한 배우라고 할까? 초롱초롱한 반짝이고 있는 도경의 눈빛을 느낀 것인지 그는 자신의 뺨을 한번 쓸며 도경을 향해 곁눈질하며 물었고
“아아. 저 녀석?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 아는 척하면 피곤해져. 상당히 건방진 녀석이거든.”
“하하. 그럴 수 없지. 대단한 원석을 발견한 것 같다고 나에게 침 튀기며 설명했잖나. 저 청년이 그 배우지?”
“뭐, 뭐!? 내가 언제? 기억 안 나는데?”
“쯧쯧...! 자넨 좀 나잇값 좀 해야 해.”
“뭐라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친구를 뒤로하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로빈 행크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반갑군. 내 이름은 로빈 행크스라네.”
“카일 입니다.”
“허허허.”
‘소문을 듣고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군.’
자신이 건넨 악수를 받으며 자기의 이름을 말하는 도경을 바라보며 로빈 행크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려오는 행적을 봐서는 야심이 가득한 청년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왕좌의 길] 제작진과 배우들 사이에서 한 번씩 거론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주인공.
당연히 로빈 행크스또한 도경의 행적을 들으면서 그에 관해서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두 눈으로 본 소문의 주인공은 생각한 거와 달리 너무 평범해 보였다.
“정말 자신 있나?”
“네?”
그렇기에 로빈 행크스는 도경에게 한 가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을 세상에 새긴다는 그 말!”
무명의 신인이 맥 클라우드 감독을 도발하여 오디션을 본 것보다 더 흥미롭고 배우가 정해진 주연의 역할을 빼앗은 것보다 더 놀라웠던 도경의 한 가지의 발언.
“자신 있느냐고 물었네.”
로빈 행크스는 그것을 도경에게 직접 묻는 중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