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10화 (310/357)

저벅저벅.

흑기사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 숨을 죽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걸음걸이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와 절도. 걸음걸이와 함께 그의 존재감은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저게 악몽이라 불리는 흑기사 아나긴...!’

꿀꺽!

흑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세에 온몸의 솜털들이 곤두서는 감각에 그를 지켜보는 사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으..”

흑기사 아나긴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좀 있으면 벌어질 전투에 앞서 그런 행동은 사기를 떨어트리기에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건만, 그의 주변에 있던 동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침음성을 내뱉는 그의 심정을 모두가 이해하는 까닭이다.

전사로서 죽음을 각오하였건만 그를 눈앞에 마주하자 마음속 어딘가에 검은 잉크가 퍼지듯 두려움과 공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심연과도 같은 어둠을 품은 존재. 아나긴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공포를 안겨다 주는 어둠이자 악몽 그 자체였다

철컥! 스르릉.

“...!”

움찔

검집에서 검을 뽑아 올리는 아나긴의 모습에 모두가 움찔거렸다.

단순한 발검 동작뿐이지만 그 동작은 고고함이 느껴질 정도로 절제가 담겨있었으며 그의 검신에 서려 있는 견고함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절로 위축감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기 때문이다.

스윽.

걸음을 옮기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있던 검끝이 열댓 명의 전사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비켜라.”

너무나도 당연하듯이 내리는 명령.

흉흉한 무기를 가진 우락부락한 전사들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내뱉다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아나긴의 행동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꾸깆!

“비키라고? 네 녀석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야? 아무리 너라도 이 정도의 숫자라면...”

“비키라 했다.”

“이익!”

발끈.

그런 아나긴의 행동에 전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죽음을 각오했건만 자신들을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치우듯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나긴에게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자신들의 결사한 각오가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그리고 악몽이라 불리는 아나긴의 존재에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분노하였다.

“죽인다... 죽여주마...!”

빠드득!

“기필코 죽일 테다! 동지들이여 우리의 각오를! 우리의 분노를!!!”

“우오오오!”

쿵쿵쿵!

동료의 포효에 주변의 동료들이 하나둘 호응하며 무기들을 부딪치며 소음을 일으켜 올렸다.

아나긴을 향한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냄과 동시에 그를 향한 살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흔들렸던 결사의 각오를 되찾은 전사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아나긴을 노려보았다.

“오라. 더러운 짐승들이여...!”

철컥!

“죽여라!”

“우아아아-!”

쿠구구구!

자신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전사들을 바라보며 아나긴은 말없이 몸을 사선으로 살짝 기울이며 롱소드의 그립을 두 손으로 곧추 잡고는 검신을 느슨하게 땅끝으로 늘어트렸다.

꾸우우욱!

아나긴의 두 발은 나무뿌리처럼 굳건하게 땅을 파고들어 가며 몸을 받치고 그의 육체는 지탱한 힘을 끌어모으며 온몸의 근육을 수축 이완시켜 힘들을 분배하기 시작한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그의 몸 안에서는 거칠고 정교한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죽어라! 아나긴-!”

타 다다닥! 부우웅!

“후우...”

“!!?”

오싹!

자신에게 맨 먼저 도달하여 온 체중을 실어 도끼를 휘두르는 전사를 바라보며 아나긴은 자신의 호흡을 다듬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아나긴의 눈빛. 아나긴을 향해 도끼를 휘두른 전사는 온몸에서 이는 소름을 느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흡!”

번쩍!

날숨과 동시에 축적했던 힘을 터트린 아나긴의 육신이 빠르게 가속했고 그로부터 은빛의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아...!’

아래로 위로 사선으로 비스듬히 검을 세워 휘두른 단순한 횡 베기. 아나긴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던 전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죽음을 직감하고는 눈빛에 의지를 잃고 만다.

그 어떠한 감정조차 서려 있지 않은 무정한 검격에 자신이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거걱!

“...”

혼신의 일격을 가한 전사는 허공으로 핏물을 흩날리면 그렇게 덧없이 바스러졌다.

---

“...!”

무엇을 본 것일까? 아나긴의 휘두른 첫 검격에 촬영장에 있는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정말로 사람이 베어져 나간 것 같았다. 순간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 해 일어나는 오류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연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으아아아!”

타다닥.

첫 신호탄이 터짐과 동시에 전사로 분장한 스턴트맨들이 고함을 외치며 도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너무나도 리얼한 고함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지고 도경 또한 그 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여 나갔다.

휘익!

캉! 휘리릭 서걱!

카가강!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른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공수일체. 스턴트맨들의 가지각색 무기들 휘둘러지는 사이 속에서 도경은 신들린 연기와 액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저저...!”

“미친!”

도경의 그런 연기에 맥 클라우드 감독과 액션 연기를 담당하는 지미 버틀러 감독은 욕설과도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 못할 전율을 맛보고 있었다.

‘미쳤다! 저게 연기라고? 아니야 저건 그냥 아나긴 그 자체잖아!?’

‘상대역과의 액션에서 벌어지는 위화감 틈을 애드리브로 메꾸고 있어...! 저런 액션 연기가 가능할 줄이야...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 없군.’

액션씬에도 연기력이 필요하다

무작정 몸을 화려하게 움직이고 짜 맞춰놓은 동작을 구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소리였다. 액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동작과 타이밍을 연구해야 하며 상대방과 호흡을 맞추며 액션과 리액션을 실감나게 쳐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골 때리는 문제가 하나 발생하고 만다.

그런 완벽한 액션씬을 찍기 위해선 배우에게 내적이든 외적이든 모든 것을 제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엄청난 피지컬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팟! 카가각!

스윽~ 휙!

서거걱!

그렇기에 도경의 연기에 놀라울 수밖에 없다.

물 흐르듯이 공격들을 막아내고 피해내고 검을 휘두름에 있어 아나긴이 보일법한 절제와 절도를 담아 특유의 묵직함을 표현해낸다.

말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을 몸을 이용해 동작으로 시각화하는 작업. 그것을 도경은 신들린 경지로 보여주고 있었다.

“허어...!”

고든 작가는 놀람에 기함성을 내뱉고 말았다.

필사의 각오를 덤벼드는 전사들과 한없이 냉정한 흑기사 아나긴의 일련의 전투가 완벽하게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좀 전에 도경이 왜 그렇게 필사적이다시피 했는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긴...’

현장에서 단번에 만들어진 합과 동작들은 전부 아니긴을 위한 것이었다. 단순히 액션의 화려함과 난이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흑기사 아나긴을 표현하기 위해 짠 동작들이었던 것이다.

‘저건 절대 즉흥으로 나온 연기가 아니다!’

오싹.

그것을 깨달은 고든 작가는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저것이 즉흥으로 지어진다 해서 지어질 수 있는 것일까? 고든 작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것조차도 캐릭터에 대해서 숙고하고 동작을 표현하는데 직접 몸을 움직이는 연기는 오죽할까? 고든 작가는 자신의 눈앞에 아나긴을 연기하는 도경을 보며 불안함을 느끼고 말았다.

부우웅-휙!

서걱!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도경이 보인다. 그 모습은 정말 흑기사 아나긴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 그 자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분명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한국인이 틀림없건만 자꾸만 도경이 자신의 소설 속에 나오는 아나긴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든 작가를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나긴은 저밖에 연기 못합니다.』

꾸욱.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려던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 고든 작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도경이 펼치는 연기로부터 눈을 돌리며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후우.”

전투가 끝이 났다. 아나긴은 자신이 벌인 결과를 둘러보며 차분히 숨을 고르었는데 지금 막 피 튀기는 사투를 끝낸 것 치고는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그 어떠한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주변에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지만 아나긴은 그저 침묵을 유지하며 저 멀리 자신에게서 벗어난 이들이 향한 방향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다가 이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르릉~! 철컥!

저벅저벅.

아나긴의 공허한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좀 전에 자신이 바라보고 있었던 시선의 반대 방향.

그것은 그래도 열댓 명의 전사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가 너무나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철퍽철퍽.

시선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곳에는 숫자의 역순을 세듯이 시체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까닭에서였다.

“후우우~컷트!!!”

피 웅덩이를 밟고 걸음을 옮기는 소리를 내는 흑기사의 뒷모습이 담겨있는 카메라를 보는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촬영현장에 유일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맥 클라우드 감독이 크게 손을 들어 올려 큰소리로 두 글자를 외쳤다.

와아아!

짝짝짝짝!

숨조차 쉬기 아까운 도경의 액션 장면의 끝을 알리는 신호음과 동시에 주변 스태프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고난이도의 액션씬과 원 테이크로 한 번에 촬영을 끝낸 깜짝 결과물에 모두가 감탄과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와아! 너 최고잖아! 끝내줬다고 카일!”

“카일! 소름 돋았다! 진짜 칼에 베인 느낌이었어.”

“연기는 또 어떻고? 눈빛 보고 정말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려.”

우르르르.

그중에서도 도경과 합을 맡은 스턴트맨들의 반응이 가히 열광적이었는데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도경을 향해 하이파이브와 터치를 건네며 감탄과 찬사를 내뱉었다.

그들 모두가 직접 보면서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만큼 훌륭한 물건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스턴트맨으로서 진귀하고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순수하게 도경이란 존재를 향해 칭찬과 감사를 표하였다.

“대단해...”

울컥.

그 현장의 뜨거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틴은 놀람을 넘어서 울컥거리고 말았다.

좀 전에 도경을 바라보며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심했던 사람들이 환호하고 도경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도경의 짧은 커리어도, 아시아인이란 인종의 벽도, 알 수 없는 선입견조차 모두 말이다.

“크리스틴!”

“도경 씨!”

환호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뚫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경을 바라보며 크리스틴은 기쁨에 가득 찬 음성으로 그에게 칭찬 세례를 쏟아부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도경의 이어지는 말에 그 행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고든 작가님! 작가님은 어디 가셨어?”

“네? 어! 그러고 보니...!?”

두리번두리번!

조금은 어이없어하는 도경의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도경이 찾고있는 고든 작가는 촬영장 그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맥 클라우드 감독님! 고든 작가님이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도경 씨 연기에 어떤 반응이셨나요?”

“큼! 촬영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나? 그나저나 진짜 어디로 가신 거지? 분명 좀 전까지는 살벌한 표정으로 촬영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갸웃.

“뭐야? 다들 표정들이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게 나도 모르겠군.”

“음?”

드라마의 향후를 기약하는 내기의 결과를 알릴 고든 작가의 증발에 맥 클라우드 감독과 크리스틴이 당황해하는 모습에 액션 연기를 담당하는 지미 버틀러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물어왔지만 내기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는 두 사람에게 들려오는 대답은 미적지근한 반응뿐이었다.

‘설마 그 인간...!’

김빠진 사이다처럼 맥없어진 상황.

크리스틴은 서둘러 고든 작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연락도 닿지 않는 상황인 듯싶었는데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도경은 한가지의 결론을 도출하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 불리하다고 냅다 튄 거야?”

중얼.

도망, 도피, 도주, 책임회피, 나쁜 말로는 먹고 튄다고 해서 먹튀.

지금도 설마 싶지만, 지금의 상황은 딱 그 한 가지로밖에 설명이 되질 않기에 도경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와 내기를 해놓고 튀었다...?”

까득.

“거, 배짱 좋으시네.”

설마 나이도 먹은 양반이 자신이 불리하다고 냅다 튈 줄이야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결과다.

자신을 향한 놀람과 감탄 그리고 인정을 보내는 눈빛을 기다렸건만 그 대상은 상상 이상으로 고집불통인지 결과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도주라는 최악의 수를 택하고 말았다.

‘훈훈한 그림 한번 같이 그려보려 했는데 뭐, 어쩔 수가 없네요. 굳이 벌주를 원하신다면야 기꺼이 드리죠.’

“감독님! 잠깐 시간 되시나요?”

“응? 시간이야 있다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네.”

받은 만큼 일하는 주의인 도경에게 보상을 주지 않고 튀는 먹튀 행위는 그야말로 해선 안 될 행위. 도경은 고든 작가의 선택에 자신의 행동방침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맥 클라우드 감독을 향해 다가가며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잠깐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하실까요?”

“!?”

씨익.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