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12화 (312/357)

312화

『빈 왕좌.

모두가 왕좌에 앉길 원한다.』

피로 물 들은 철의 왕좌가 보인다.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무거운 삭막함이 도사리는 자리지만 모두는 그 왕좌에 얽매이게 된다.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피를 기꺼히 흘리는 대영주들과 태어날 때부터 왕좌의 굴레 묶여 생사를 위협받으며 쫓기는 소년.』

투두두두!

『가문의 영광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악마도 되는 비정한 영주. 그리고 그 영주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가는 저주받은 한 명의 카어인인.』

화르륵~!

『모든 것을 버리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꾸는 청년과 자신이 주어진 짧은 온기에 매달려 한 자리만을 지키려는 흑기사.』

챙캉챙캉!

서걱, 푸슈슉-!

쫓고 쫓기는 말들의 거친 말발굽 소리는 심장을 뛰게 하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거세게 불타오르는 화마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는 검을 휘두르게 만든다.

휘둘러진 검에서 피어나는 붉은 피. 그 피는 광기와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왕좌」

그것은 바로 왕좌에 대한 힘의 갈망이었다.

각자가 품고 있는 숙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만능의 성배. 그것을 얻기 위해 모두는 피의 길을 주저 없이 택하였다.

서거걱-!

번뜩.

그 어떠한 것이라도 희생하고 그 어떠한 것을 받쳐서라도 얻고자 걸어가는 길.

그것이 바로 왕좌의 길이었다.

---

“...!”

[대박! 띵작 냄새 나는 드라마 하나 나오나?]

[역시 인성과 실력은 반대라는 맥 클라우드 퀄 지대로 뽑았네.]

[똥 같은 판타지 드라마판에 드디어 한 줄기 광명이 들어왔다!]

[이런 드라마를 기다려 왔다. 썩을 사골탕 같은 드라마들은 지금 보고 있냐? 반성해라-!]

영화 퀄러티에 견줘도 지지 않을 왕좌의 길 티저 영상에 미국 전역에 있는 드라마 매니아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흥분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드라마 하나 가지고 웬 난리냐고 여길 수 있지만, 미국은 넓은 땅덩어리와 다양한 인종만큼 수많은 취미가 존재하고 잦은 야근과 회식 문화가 있는 한국에 비해 여가 시간이 풍부한 미국 사람들에게는 드라마는 그들의 시간을 책임지는 훌륭한 콘텐츠와 동시에 수많은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는 너드 문화의 중축을 맡고있는 매체였다.

그러니 드라마 티저 영상 하나에도 한국과 달리 뜨겁기 그지없는 반응이 미국에선 튀어나오고 있었다.

[왕좌의길(Kin’s Raw) 공식 페이지]

[그런데 저 동양 배우 누구냐?]

[모름. 첨 보는데 누구지? 신인인가?]

[신인 중에 저런 애 있었나? 존재감 미쳤던데? 액션씬 보셨음?]

[배역은 아나긴으로 추정되는 거 같은데 이름 아시는 분들은 공유좀.]

[좀 이상함. 공식 페이지에는 아나긴은 스캇 드바로라고 뜨던데 뭐가 뭔지...]

[어, 그러게요.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 배우가 맡은 역할은 아나긴이 아닌가...?]

“이미 늦었군요. 지금 무마하기엔 이 배우가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요. 대체...!”

쿵!

“일 처리들을 어떻게 하는 거죠!?”

왕좌의 길 공식 페이지. 티저를 본 사람들의 기대감과 흥분이 담긴 글을 읽고 있던 중년 여성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 그녀의 거친 행동에도 모두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보다 숨을 죽이는 행동을 선택했다.

“모레츠 여사 죄송 합니다...”

“지금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입니까? 이건 전대미문의 대형 사고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인 회의실.

사과를 듣고 있는 모레츠 여사는 냉소적인 어조와 함께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인원을 향해 서슬퍼런 시선을 내보냈다.

“배우가 바뀐 티저 영상을 올리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레츠라고 불린 여성의 정체는 왕좌의 길을 자체제작 하는 HBA 방송국 주요 임원이었는데 그녀는 현재 드라마 제작팀에 직접 발걸음 와서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과 경위를 묻고 있었다.

“모레츠 여사. 관리가 소홀했던 내 책임입니다. 티저 영상을 두 개나 만들었던 제 과욕이 사고를 불러 일을 킬 줄은 나도 상상을 못 했어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 맥 감독님이야 그렇다 쳐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홍보관리팀 일 처리방식입니다. 티저 영상 올리기 전 영상 확인 안 한 건가요? 제 상식으로는 이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찌 된 거죠? 홍보 관리팀의 누가 영상을 올린 거죠?”

“조지라는 친구입니다.”

“누구죠?”

“홍보 관리팀의 신입 막낸데 그날 집안에 일이 생겨 확인을 제대로 못 하고 영상을 올린듯싶습니다.”

“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 친구도 여러분들 모두 다 어처구니가 없어요. 지금 우리가 소꿉장난 하는 겁니까?”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실수를 인정하는 맥 클라우드 감독의 사과에 HBA 고위임원은 화를 애써 가라앉히려 했지만, 드라마 제작팀의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다시 한번 들끓는 화를 느끼었다.

“집안에 황급한 일이 생겨 영상을 확인하지 않은 애송이 직원이나, 다음 날 점심이 되도록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놓은 제작팀이나 정말 제정신인가요? 지금 이 일 때문에 난감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

HBA를 대표해서 제작소까지 발걸음 한 모레츠 여사의 호된 질책에 모두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홍보관리팀 직원이 잘못된 티저 영상을 올린 것도, 그런 대형 사고를 뒤늦게 눈치챈 것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실수이며 프로답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공론화가 되면 주변에서 우리 HBA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드라마를 자체 제작한다고 가뜩이나 눈 여겨들 보고 있는데 참 볼만하겠습니다.”

HBA 방송국 에서는 많은 투자와 기대를 걸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 드라마 왕좌의 길. 그 누구도 드라마 첫 출발부터 소음이 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레츠 여사가 일을 보고받자마자 황급히 이곳에 들른 것이고 말이다.

“그래... 일단 문책은 뒤로 미루도록 하죠. 다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조치할지 논의들은 나눴나요? 좀 있으면 배우들하고 고든 작가님이 올 텐데 어떤 방안들은 나왔죠?”

“그건...”

해결방안을 요구하는 모레츠 여사의 말에 모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뭐죠? 설마 없다는 건 아니겠죠?”

“그게...”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이번 사태에 있어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 하고 고든 작가 잘못 올려진 티저 영상을 정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티저 영상은 이미 드라마를 고대하는 팬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화제가 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상태인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렀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사자들 끼리 서로 한 발짝식 양보해야 해결할 수 있는데 지금 여기서 순수히 양보할 당사자가 있을까?’

왕좌의 길 시나리오를 맡은 각본가는 말 못 할 속사정을 떠올리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 어느 쪽이든 양보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해가 없는 쪽으로 조용히 넘어가길 원하는 방송국과 어떤 선택이 되었든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될 배우. 그리고 고집을 굽히지 않으려는 왕좌의 길 원작자. 이 모든 걸 해결할 방안이라니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쩌실 겁니까 감독?’

힐끔.

“음?”

답이 보이질 않는 상황. 이런 상황에선 감독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각본가는 자신의 옆에 앉은 맥 클라우드 감독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감독 지금 웃을 때가...”

두터운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미세한 변화였지만 맥 클라우드 감독은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것일까?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의한 실소일까? 감독이 짓는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각본가는 조용히 그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그의 행동은 아쉽게도 이룰 수 없었다.

똑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벌컥!

적막으로 가득한 회의실을 울리는 노크 소리. 조심스러움과 정중함보다는 경쾌함이 섞여 있는 노크 소리와 함께 등장한 한 동양인 남성. 그를 보며 모레츠 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팅시간은 아직 인걸로 아는데 그쪽은 누구죠?”

“하하! 안녕하십니까. 카일이라고 합니다. 이번 실수로 나온 티져 영상에 나온 배우입니다.”

“...!”

그 말에 모레츠 여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에 등장한 도경을 바라보았다.

‘저 동양인이 이번 티져 영상의 아나긴이라고?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야.’

“무슨 용건이죠? 그쪽은 여기에 초대받은 사람이 아닐 텐데요.”

분장하지 않고 평범한 사복 차림 덕분일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영상의 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이미지와 분위기의 도경을 보며 모레츠는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 마음을 누르고

“지금 상황 곤란하시죠? 도움 드리러 왔습니다.”

씨익.

“도움이요?”

“네.”

싸늘한 분위기 쏘아붙이는 모레츠 여사의 말투에도 도경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잃을 수 없었다. 이 싸늘한 적막한 분위기를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 도경의 손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레츠 여사. 이미 제가 다 교통정리 끝내놨습니다.”

“뭐라구요?”

“일단 제 이야기 들어보시죠. 그러니까...”

“...!”

의아해하는 모레츠 여사를 향해 웃음짓는 도경은 자신이 가져온 해결책을 그녀에게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하고 도경의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웃긴 녀석. 교통정리는 무슨...”

활기를 띠는 회의실. 그 분위기 속에 맥 클라우드 감독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도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자신이 아는 한 교통정리라는 단어는 도경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되었다.

“교통사고를 잘못 말한 거겠지.”

소근.

조용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을 내뱉은 맥 클라우드 감독.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도경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길래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일까?

---

“허...”

스윽.

공원 벤치에 앉은 한 노인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작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어머니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이 제 가족을 살리신 거예요.)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군. 정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어.”

절레절레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손을 붙잡으며 울먹거렸던 청년의 체온. 그 체온이 아직도 손안에 머무르는 듯 선명하여 고든 작가의 마음은 그야말로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잘하셨어요. 여보.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렇지.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결국 배역을 그 녀석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어...”

“여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조지 청년이 그대로 젊은 나이에 파산해서 길바닥에 나 앉길 원하는 거예요? 그건 옥타비아의 이름을 모욕하는 일이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건 오히려 옥타비아의 이름을 더럽히는 거지. 다만...”

자신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노부인의 질책에 노인은 쓴 미소를 피어 올렸다. 이 이상은 고집을 피울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부아가 치밀어올라.”

“뭐가요?”

“카일이란 그 녀석 말이오! 조지 청년의 상황을 이용해 나를 압박한 거 보지 않았소.”

왕좌의 길 티져 영상을 잘못 올린 조지라는 한 흑인 청년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다.

원래라면 고든 작가는 그에게 호통을 치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도경에게서 조지가 처한 상황을 듣고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조지라는 청년. 그날 어머니가 쓰러졌다고 하네요. 그것도 안타깝게도 암이라고 하네요. 현재 처한 상황을 보니 회사의 면책을 피하기 어려울 거고, 지금 회사에 잘리면 가족보험도 날아갈 텐데 그렇게 되면 그 청년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미국의 살인적인 치료비를 생각하면 그 청년은 파산할 겁니다. 그걸 원하시나요?)

(...!)

도경은 고든 작가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이용해 그가 고집을 버리길 권하며 설득해 나갔다.

자신이 아나긴을 맡게 된다면 티져 영상건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수 있으며 그 이외의 나머지 일들은 그 스스로 나서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해 결국 고든 작가는 도경의 말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고집 때문에 자신과 같은 한 흑인 청년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그는 원치 않았고 이번 일에 그 청년을 구할 방법은 도경의 제시한 방법 이외에는 그로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해도 제대로 당했어. 분명 내가 거절 못 할걸 알고 내게 온 게 분명해. 아무리 생각해도 악독하기 그지없는 놈이오.”

“그럴까요? 그 덕분에 조지라는 청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잖아요. 만약, 카일 군이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조지라는 청년의 인생은 끝이 났을 거예요.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말이에요.”

“뭐요? 당신 지금 그 녀석을 편드는 거요? 애초에 문제는 그 녀석 때문에...!”

“애초에 당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겠죠. 사실 당신도 속으로는 카일 군이 아나긴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

“말이 안 되기는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리 깊이 고심했어요? 고민한 이유가 카일 군 때문이라는 거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

고든 작가는 부인의 말에 역정을 냈지만, 앨리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따스한 눈빛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티져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당신을 보았는걸요.’

피식.

자신의 남편은 고집불통이었지만 아이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해 얼굴에 모두 드러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날 티져 영상에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서 봤던 그를 떠올리면 정말로 서툴기 짝이 없는 남편이란 생각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앨리스 여사였다.

“뭐야? 왜 중간에 말을 하다 말고는 그리 웃어? 또 왜 그렇게 보고?”

“후후. 당신이 귀여워서요. 이젠 슬슬 일어날까요? 마침 배도 고프겠다 맛있는 식사나 해요.”

“귀, 귀엽다니 지금 무슨 소릴...!? 아니, 그리고 당신은 지금 내가 밥이 넘어갈 것 같아?”

“그럼 지금부터 계속 밥 안 먹을 생각이에요? 이미 지나간 일에 그만 좀 청승 부려요. 남자가 너무 쪼잔해 보이잖아요.”

“뭐, 쪼잔!? 당신 지금 내가 얼마나 복잡한 심경인지 당신이 잘 알잖아...!”

“네, 네. 일단 밥부터 먹어요.

“허, 이젠 당신까지 나를 머리 아프게 하는구려...”

“후후후. 우리같은 노인네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어요. 그냥 머리 아프게 살지 말고 편하게 살아요.”

“거, 말이나 못 하면...!”

피곤한 표정을 짓는 고든 작가를 뒤로하고 앨리스 여사는 벤치에 몸을 일으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심통난 고든 작가의 음성이 들려오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든 작가와 한평생을 살아온 그녀로서 현재 남편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중얼.

며칠 동안 아무 말 없이 무겁게 침묵을 지키며 씁쓸해하던 때에 비해서 지금 분통을 터트리는 남편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변화에 앨리스 여사는 그저 기꺼울 따름이었다.

‘내 남편의 고집을 꺾어줘서 고마워요. 카일 군.’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서 고집을 피우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남편을 꺾어준 도경을 향해 앨리스 여사는 고마운 마음을 떠올리며 그녀는 즐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고든과 앨리스. 두 노부부가 감정을 정리해 나가며 공원을 벗어나고 있을 때쯤. HBA 제작소 근처 여유를 즐기는 카페에서는 세 남녀가 회포를 풀고 있었다.

화사하게 웃는 두 청년은 도경과 조지였고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무표정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성은 도경의 에이전트 크리스틴이었다.

“많이 기다렸죠? 고마워요 조지. 덕분에 아나긴의 역할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카일 씨. 저도 그만큼 받은 게 많은걸요.”

“그렇겠죠. 그럼 마무리 계약을 해볼까요?”

피식.

무언가 원하는 눈빛을 띠는 조지의 모습에 도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발밑에 있던 백 팩의 가방을 들어 올려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 마지막 착수금 15만 달러에요. 확인해 봐요.”

“15만 달러라...! 떨리네요.”

지이익-!

흔하디흔한 검은색 백팩 가방이지만 그 가방을 받아들인 조지는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가방 안에 거금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보니까 세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100달러 지페로 마련했어요.”

“확실히 세기 쉽네요. 확인했습니다. 카일 씨.”

“그럼 계약서 작성하도록 하죠. 크리스틴 부탁할게.”

“네”

가방을 내려놓은 조지를 향해 조용히 둘 사이에 앉아있던 크리스틴은 한 장의 계약서를 건네며 간략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저희는 조지 씨에게 의뢰를 부탁. 선수금을 포함해 총 20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이일에 대해 비밀엄수를 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이 일을 파파라치나 기자에게 알렸다는게 발각될 시에는 10배의 위약금을 물게 됩니다.”

“10배라. 정말 입조심 해야겠네요.”

“뭐, 쓸데없는 옵션 같은 거죠. 조지 씨가 바보도 아니고 이 일을 발설할 일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무, 물론이죠. 그냥 거금이다 보니 조금 떨릴 뿐입니다.”

20만 달러와 규모가 큰 위약금에 대해서 조지가 떨린다는 표정을 짓자. 도경은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시작했다.

“에이~. 떨릴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 나쁜 일을 했나요? 원래대로 배역을 돌려놓은 거뿐인걸요. 모두가 만족하는 선에서 끝냈으니 자책도, 부담도 가질 필요 없어요.”

“그, 그렇죠?”

“그럼요. 왕좌의 길 티져 영상은 호평이고, 스캇은 이미 맥 클라우드 감독님의 추천으로 다음 차기작을 잡았는걸요? 조지 씨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잘못된 고집을 피우는 작가님의 고집을 꺾기 위해 연극을 했을 뿐이에요. 덕분에 작가님은 어려운 청년의 인생을 구했다는 큰 보람을 얻었죠. 그래도 정 찔린다면 작품을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제가 연기한 게 더 좋지 않았나요?”

도경의 말에 살짝 머뭇거리던 조지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동의를 표해왔다.

“맞아요! 티져 영상을 봤지만 스캇 씨보다 카일 씨가 나온 영상이 확실히 더 좋았습니다. 작품을 위해서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사실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었거든요.”

“그거 다행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 조지 씨도 원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방송국에 왔다면서요?”

“아... 네. 뭐, 잘 안됐지만요.”

“그럼 이번 기회에 다시 도전해보는 게 어때요? 돈도 두둑하겠다. 여유를 가지고 다시 글 써봐요.”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글을 써보라는 예상치 못한 도경의 말에 조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도경의 이어지는 말에 감동받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유종의 미를 좋아하거든요. 비록 이런 형태로 조지 씨에게 돈을 드렸지만 조지 씨가 꿈을 이루는데 제 돈이 쓰인다면 보람찰 거 같아서요.”

“카일 씨...”

감동한 표정을 짓는 조지를 바라보며 도경은 낯부끄러운 듯 자신의 콧잔등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는데 그런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진 조지는 속으로 도경에 대해서 감탄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도 대단해. 성공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더니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실력까지 뛰어난 데다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20만 달러를 쓰며 일을 벌일 줄 아는 대범함까지 지녔다.

도경을 보며 느낀 것이 많은 조지는 선망의 눈길로 도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희미해진 꿈을 떠올렸다.

손이 근질거리는 감각. 무언가 희망찬 에너지에 조지의 화색은 밝아졌다.

“이런 오래 붙잡았네요. 조지 씨는 먼저 일어나시죠. 저와 크리스틴은 다음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요.”

“아, 그럼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 고마웠습니다. 카일 씨가 말한 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후후. 행운을 빌게요. 조지 씨.”

“네. 그럼 이만”

훈훈한 웃음과 함께하는 작별 인사.

돈 가방을 멘 채로 희망찬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난 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도경의 옆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돈을 받고 저리 개운하게 떠날 줄이야. 도경 씨가 사람을 구슬리는 능력이 이리 탁월할 줄 몰랐네요. 대단하네요.”

“후후. 에프터서비스는 언제나 중요하니까. 그런데 칭찬하는 것 치고는 표정이 별로인걸? 비판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크리스틴 너도 조지처럼 죄책감을 덜 립 서비스가 필요한 건가?”

“둘 다 해당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니까요. 명분이야 좀 전에 두 분의 대화로 충분히 들었습니다. 『자책도, 부담도 가질 필요 없다』는 말. 그거 조지 씨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였죠?”

“이런,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네. 그 정도로 제가 어리진 않아서 말이죠. 오히려 제 쪽이 많이 놀랐습니다. 설마 도경 씨가 이런 계획을 짤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죠.”

“하하하 칭찬인가?”

“칭찬보다는 조금 소름 끼쳤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소름이 끼쳤다고? 왜?”

자신의 자신감과 재능. 그리고 실력으로 정면승부를 해왔던 도경이 설마 맥 클라우드 감독과 짜고 일부러 티져 영상을 잘못 내보내는 계획을 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계획이었으니까 말이에요.”

고든 작가와 같은 인종인 흑인 청년을 골라 뒷돈을 주며 잘못된 티져 영상을 유출하고, 없던 암도 만들어서 그를 난치병에 걸린 어머니를 가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고든 작가를 압박하고 설득하는 카드로 썼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사기극. 분명 도덕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일이건만 소름 끼치게도 비판을 할 수 없었다. 도경이 벌인 사기극에는 피해자가 없고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얻어갔기 때문이다.

“거짓말로 이루어진 뒷공작에 모두가 만족한 결과를 얻다니 직접 보는 저로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완벽한 사기극이었다.

고든 작가는 한 청년의 인생을 구제했다는 보상을 얻었고, 평소 커리어에 욕심이 많은 스콧은 맥 클라우드의 연줄을 통해 유명감독의 차기작 조주연급의 배역을 얻었고, 돈 받고 부정을 저지른 직원은 20만 달러와 함께 꿈을 얻어갔다.

‘게다가 이번 일을 해결한 대가로 HBA 방송국과 왕좌의 길 제작팀에게 호감까지 샀으니 정말 얻을 건 다 얻어갔어.’

힐끔.

원하는 배역도 따내고 함께 일할 사람들의 신뢰와 호감까지 샀으니 그야말로 20만 달러가 아깝지 않은 효과.

거짓말과 뒷공작으로 이 모든 것을 창출한 인물인 도경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렸고 그녀는 이내 머릿속에 도는 경고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경고하는데 저한테는 사기 칠 생각 하지 마십시오.”

“...뭐라고? 그게 비즈니스맨으로서 할 소리야? 이 나의 예술적인 설계에 감탄이라던가, 존경이라던가, 박수를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야?”

“전혀요.”

자신의 몸을 움츠리며 경고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도경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완벽한 설계에 보내는 반응이 불신과 의심이라니 이런 반응은 그로선 용납할 수 없었다.

“크리스틴. 전에 말했다시피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잖아. 난 그저 스스로를 도왔을 뿐이라고. 그러니 내게 흠모와 존경의 눈빛으로 보내주면 감사하겠다만?”

“...처음 알았습니다.”

“응? 뭐가?”

“스스로를 돕는 자 중에서 이렇게 정이 가지 않는 타입이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응원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랄까? 조금 불쌍할지도 모르겠네요.”

“응응. 크리스틴 지금 너 몹시 아픈 곳을 지금 사정없이 찌른 거야. 나는 이거 기억할 거야 그리고 언젠가 복수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감히 어딜! 내가 먼저 일어날 거야!”

“...”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클라이언트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에이전트. 두 남녀가 걸음을 옮기며 카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풀썩.

“헤에~” 이거 아무래도 재밌는 걸 본 거 같은데?”

도경과 크리스틴이 스쳐 지나간 자리.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던 한 백인 중년인이 얼굴 위까지 올렸던 신문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도경과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로빈 그 친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나?”

요즘 들어 수도승처럼 허허 웃음만 짓고 있는 자신의 친구이자 배우인 로빈 행크스에게 자극이 될만한 소재를 얻었다는 것에 닉은 활기를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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