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트레일러』
촬영을 앞두고 배우가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는 이곳은 세트장에 마련된 배우 전용 트레일러 안.
그곳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배우와 에이전트가 한 가지의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출 사건이 자작 건이라고? 확실한 거야 닉? 또 생사람 잡는 거 아니고?”
“그렇다니까? 돈 가방을 건네주는 것은 내가 분명 봤어.”
“흐음. 그냥 그 청년의 힘든 상황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아니었을까? 그 청년 덕분에 아나긴의 배역을 다시 잡을 수 있었잖아. 듣자 하니 그 사건으로 몸값도 5만 달러 더 올려 받았다고 하던데 나라도 그 청년에게 감사 표시를 하고 싶어질걸?”
평소에도 온갖 찌라시를 자신에게 가져왔던 닉이기에 로빈 행크스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돈에 관련한 비즈니스 능력은 확실하지만 워낙에 행실이 가볍고 경솔한 면모를 가진 친구라 자작극이라는 그의 주장을 로빈은 쉽게 믿지 않았다.
“아니 이 친구야. 돕고 싶으면 수표나 계좌로 입금하면 되지. 무거운 돈 가방을 건네겠어? 이상하잖아!”
로빈의 반응에 닉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갑갑함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그 앞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는 로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거 가지고 어떻게 그리 확신하나? 혹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들은 거라면 몰라도 말이야.”
“내가 도청하는 것도 아니고 대화까지 어떻게 들어!? 그냥 멀리서 우연찮게 돈 가방을 건네준 걸 본 거라도?”
“그럼 심증뿐만이라는 거잖나. 또 저번처럼 생사람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내 친구가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고소당하는 모습은 한 번으로 족한데 말이야.”
“아우! 이 갑갑한 놈아. 이번엔 확실하다니까? 돈 받는 놈 표정을 봤는데 그건 누가 봐도 도움을 받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대도? 어느 누가 도움을 받는데 그렇게 당당히 돈을 받고 악수를 나눠!?”
“닉.”
“응?”
“계속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게. 대본 읽는 데 방해돼.”
“이익! 이 빌어먹을 자식! 대본 진즉에 다 외웠으면서 뭘 또 읽는다고! 됐다! 더러워서 말을 말지. 진짜 더럽게 재미없다니까. 앓느니 죽겠어.”
붉으락푸르락.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로빈을 보며 닉은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까지 자신하건만 자신의 친구는 시선조차 주지 않으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아, 그리고 닉.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 이야기를 주변에 꺼내서 시끄럽게 만들 생각은 하지 말게. 작품에 트러블이 생기는 건 사양이니 말이야.”
“허어, 아주~대인배 납셨네 납셨어!”
“응? 어디 가나 닉?”
심통이 잔뜩 난 닉이 발걸음을 옮기자 로빈이 드디어 대본에 눈을 떼며 그를 바라보자 닉은 로빈을 쏘아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속에 열불이 나서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려고 한다 왜? 어차피 촬영에 입 가벼운 소인배는 필요 없잖아? 대배우 로빈님이 알아서 척척 하니 말이야.”
쿵!
트레일러 문소리를 쿵 하고 닫는 닉의 뒷모습을 바랍며 로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친구 성격도 참 여전하단 말이야. 계약만 잘하지 챙겨주는 게 참 서툴러.”
피식.
애처럼 삐쳐 나간 닉을 향해 로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자극으로 되는 게 아니라네 이 친구야.”
중얼.
촬영 당일. 저런 자극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닉의 의도를 떠올리며 로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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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다른 놈들처럼 좀 단순한 성격이면 좋겠는데 그 녀석은 너무 생각이 많다니까.”
치익~딱!
조금 전 잔뜩 심통을 부리며 밖으로 나온 닉은 세트장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 공간 안에 있는 냉장고에 구비된 캔맥주들을 잔뜩 꺼내어 로빈을 안주 삼아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잘나가는 녀석은 코가 깨져도 유별나게 깨진다더니. 매너리즘이 지독해도 너무 지독하잖아.”
로빈 행크스.
폭넓은 명 연기력과 성실함과 선한 이미지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배우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에 대한 연기와 매너리즘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할 게 없어...”
부지런히 성공해 왔던 로빈 행크스. 그는 할 게 없었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아 배우로서 정점을 찍은 지 오래였고 젊을 때부터 온갖 배역을 맡아 연기한 그에게 지금 새로이 연기할 배역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게다가 58세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가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은 거기서 거기. 어찌 보면 그가 겪는 매너리즘은 당연한 것일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 성실한 성격이 독이라니까.”
배우가 성실한 것은 장점이면 장점이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만 닉이 봤을 때 로빈 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함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옥죄고 있어.’
연극판을 전전하고, 철학이나 인문학을 파고들며 공부하고, 자선과 봉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매너리즘을 어떻게든 극복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로빈은 더욱더 지독한 매너리즘을 얻어버렸다.
“차라리 티를 내던가 정말 갑갑해.”
얼마나 성실한지. 자신의 매너리즘 조차 평정으로 숨기는 갑갑한 배우를 떠올리며 닉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맥주를 씁쓸하게 들이켰다.
“이야~. 이야 트레일러도 그렇고 이런 휴식 공간도 있다니 정말 기가 막히네.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헐! 술까지 있네? 저래도 돼? 술 때문에 촬영에 지장이 가면 어쩌려고?”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없을 걸 아니까 술을 가져다 둔 거죠. 그나저나 목소리 좀 낮춰요. 도경 씨.”
“왜 창피해?”
“뭐... 그것도 그렇지만 너무 촌놈 티 내면 얕잡아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괜찮아. 얕보라지? 지나고 나면 큰코다치는 건 그쪽이 될 테니 말이야. 한국에서 그런 놈들이 한 트럭이었어.”
“안 봐도 상상이 되네요.”
“하하하.”
미국에서 이질적으로 들리는 한국어로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목소리에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닉의 고개가 돌아갔다.
힐끔.
‘저 녀석은...!’
닉은 웃으면서 휴식 장소를 둘러보는 도경과 크리스틴의 모습을 발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로빈과 말다툼을 벌였던 원흉들의 등장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법도 모르나? 미국에서 영어로 지껄이지 자기들 나랏말로 칭총칭총 거리나? 시끄럽게 말이야. 이러니 중국인이 욕을 먹는 거라니까.”
“...!”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소리. 하지만 심통이 잔뜩 난 닉의 입에선 볼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잣말치고는 큰 목소리. 휴식 공간 안엔 닉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 목소리는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와, 말 끝나기 무섭게 트럭에 담을 놈 한 놈이 나타나네...! 그쪽 멍청한 거 티 내? 중국어 같은 소리 하네. 이거 한국말이거든?”
“뭐야? 너 지금 나보고 멍청하다고 했냐?”
“그럼 똑똑하냐? 당신 사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흥! 그딴 거 알 게 뭐야? 보니까 너 같은 촌놈들이 사는 나라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당신한테 멍청하다는 소릴 하는 거야.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니까 말이야.”
“뭐야!? 이 건방진 애송이가! 말 다 했어?”
“자, 잠깐만요 도경 씨!”
한국말을 듣고 중국어로 오해하며 인종 차별적인 언사를 내뱉은 닉을 보며 도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가 한 소리 내뱉었다.
심기가 불편했던 닉은 옳다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도경과 말다툼을 벌였고 크리스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겁하며 도경을 말리기 시작했다.
“도경 씨. 그냥 참고 넘어가세요. 저 사람 로빈 행크스 매니저에요.”
‘정말 도경 씨에게 뭐 있는 건가? 하필이면 시비 붙은 사람이 또 이런 사람이야?!’
크리스틴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뒤늦게 도경과 말다툼을 벌이는 사람이 로빈 행크스의 매니저와 전속 에이전트를 맡고있는 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 어쩌라고? 로빈 행크스가 잘난 거지 저 사람이 잘났나?”
“허, 이 건방진 녀석이...!”
빠득.
다급한 마음에서일까? 크리스틴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도경에게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대화를 걸어버렸고 덕분에 영어로 나눈 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 고스란히 닉에게 전달되는 결과를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로빈과 함께한 세월이 수십 년인 나를 감히 네가 무시해? 진짜 한번 혼나보고 싶어!?”
“혼나긴 개뿔. 누가 무서워 할 줄 아나? 오히려 당신 같은 매니저를 수십 년 둔 로빈 그 사람이 불쌍해지려고 하는걸? 자기 배우 망신시키지 말고 술이나 얌전히 먹어. 추한 주사 부리지 말고 말이야. 내 에이전트 말로는 이곳에는 술 때문에 문제 일으킬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당신을 보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아.”
피식.
“이 새끼가...!”
도경이 괜히 도경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시비는 피하지 않고 도발엔 더한 도발로 갚아주는 성정의 도경에게 닉의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금방 도달했다.
빠득.
‘돈 가지고 배역을 산 주제에...!’
생각지도 못한 존재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은 쉽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신보다 여리고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부정을 저지른 존재라면 더욱 더 말이다.
“넌 사람 잘못 건드렸어.”
꾸욱.
오른손의 주먹을 꽉 움켜진 닉. 그는 꽉 움켜쥔 주먹을 그대로 도경을 향해 휘두르려 했다.
명분과 정의는 자신에게 있다 굳게 믿으며 그는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와 자신의 충동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닉! 그만하게! 프로답지 못하게 지금 그게 무슨 추태야!”
“로빈!?”
“...!”
분노가 가득한 음성이 휴식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일갈에 모두가 행동을 멈추었고 그렇게 상황을 순식간에 종결시킨 로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장내를 훑어보다가 이내 도경을 향해 시선을 머무르기 시작했다.
“카일 군.”
“네 로빈 씨.”
천천히 열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싸늘한 음성. 도경의 이름을 입에 담는 로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의도치 않게 좀 전에 카일군이 내 친구에게 했던 말들을 들었다네. 그런데 말이야. 그거 참...!”
성실하고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있던 로빈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차가운 인상을 하는 그가 도경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말이 좀 심하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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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을 쉬라고 만든 휴게실에 벌어진 헤프닝. 로빈과 닉은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도경과 크리스틴만은 휴게실에 남아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떡하죠? 어떡하죠!?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 걸까요?”
“...글쎄. 조지나 감독이 말했을 리 없고 어디서 멀리 본 모양인데? 음, 좀 더 은밀한 곳에서 봤어야 했나?”
“지금 그렇게 속 편하게 이야기를 하실 때입니까? 이게 알려지면 큰일입니다!”
도경이야 무덤덤하게 운이 없었다. 여기고 있었지만, 크리스틴은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못하며 반패닉에 빠져 있었다.
“진정해. 크리스틴. 증거도 없는데 아까처럼 잡아떼면 그만이야. 조지의 실수가 고맙기도 하고 그의 사정이 안타까워서 도왔다고 말이야.”
“그건 조금만 조사해 보면 불치병을 꾸민 게 들통날 겁니다.”
“그때는 조지의 자작극으로 해달라고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한번 받은 돈 두 번 받지 못하겠어? 미리 입 맞추고 상황을 대비하면 돼.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 그렇군요...”
“하하. 그나저나 크리스틴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보는 걸? 역시 로빈 행크스가 대단한 사람이긴 한가 봐.”
“진짜 심장이 멎을 뻔했습니다만? 웃지 마시죠.”
찌릿.
도경의 차분한 상황대처에 불안한 표정을 지은 크리스틴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놀란 가슴을 다독이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뒤에서 떳떳한 짓을 하면 안 되나 봅니다. 돈 가방을 준 걸 봤다고 이야기 듣고는 머리가 하얘지는데 정말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니까요.”
“이해해. 나도 좀 놀랐거든. 어련했을까? 그래도 표정 관리를 잘하던걸? 덕분에 나도 잘 둘러댈 수 있었어.”
“그렇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에요. 정말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 유지했거든요.”
“하하. 잘했어.”
피식.
‘안타깝게도 자작극이라건 이미 다 들통났지만 말이야.’
안도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도경이 남몰래 쓴 미소를 지었다.
분명 크리스틴이 표정관리는 훌륭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빈의 눈을 속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을 관찰하고 심리를 읽는데 능숙한 연기자. 그것도 로빈 정도의 대배우라면 크리스틴의 위화감을 읽는데 어렵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알리바이를 제시해도 그의 의심을 지울 순 없겠지.’
긴장으로 얼룩진 에이전트와 여유롭게 거짓말을 하며 둘러대는 자신을 본 이상. 모든 것을 조지의 자작극으로 돌려도 로빈 그 한 사람만큼은 의심을 지우지 않을 것이었다.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며 믿는 배우의 직감과 확신은 그 어떤 고집보다 질기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나?’
앞으로 오랜 시간 같이 연기할 파트너에게 의심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질책을 받으며 살 수 없는 노릇. 도경은 자신이 떠올린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다 이내 웃음 짓는다.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앞으로 조금 기다리면 시작될 왕좌의 길 드라마 촬영. 자신의 행동에 로빈 행크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도경은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