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로빈 미안하다.”
“됐네. 별다른 사고는 없었으니 넘어가지. 그래도 반성은 좀 해. 들어보니 시비는 닉 자네가 먼저 걸었더군. 그것도 인종 차별적인 발언으로 말이야. 그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야.”
“면목 없어. 평소라면 안 그랬을 텐데 그때 심사가 좀 많이 꼬여있었나 봐...”
트레일러 안으로 돌아온 로빈과 닉.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 중 닉이 먼저 침묵을 깨며 로빈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프로답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친구에게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통이 꼬인 게 나 때문 아니었나? 그럼 내 탓이 되는 건가?”
“아니, 아니!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지 않은 거 알잖아. 왜 그렇게 되는 거야?”
“농담일세. 후후. 그래도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미안하긴 하나 보군.”
“그래. 아주 미안해 죽겠다. 친구 망신 다 시켰으니 말이야.”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힐끔.
“그래 뭘 원해?”
“맥도날드 치즈버거 세트.”
로빈의 익숙한 눈짓에 닉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로가 상대에게 잘못할 때마다 상대방에게 한 가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오랫동안 두 사람만의 규칙이었다.
“응? 치즈버거 세트? 그거야 쉽지. 정말 그걸로 되겠어?”
“단. 걸어서 직접 사 오는 거로 부탁하지.”
“그럼 그렇지...! 야!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 줄 알아?”
“그래서 안 할 생각?”
“누, 누가 안 한대? 그냥 멀다는 거지... 안 먹기만 해 봐!”
뛰쳐나가다시피 트레일러 밖으로 나간 친구를 배웅한 로빈은 조용히 자리에 와서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피곤하군. 차나 한잔이나 할까?”
꽤나 신경을 썼던 것일까? 조금 피로함을 느낀 로빈은 자신이 즐겨 마시던 차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끓이기 시작했다.
“돈 가방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었는데 조금 어른스럽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
돈 가방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저 자신의 친구에게 모욕을 준 젊은이를 향한 조그마한 심술이었다.
“그런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단 말이지. 아니...”
조금은 당황하길 바라고 꺼낸 이야기였건만 당황하거나 동요를 보인 것은 그의 옆에 있던 여성 에이전트일 뿐 도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지.”
자신을 바라보았던 도경의 독특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로빈 행크스란 배우를 앞둔 것에 대한 긴장감이나 부담도, 돈 가방이라는 단어에 관한 초조함이나 불안함도 내비치지 않은 채 여유롭게 자신의 반응을 살피던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 눈빛. 분명 무언갈 기대하는 느낌이었지.”
모든 것을 파악한 눈이었다. 자기의 에이전트와 자신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던 도경을 보면 그것은 확실했다. 사실 그것까지는 로빈의 심경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에 도경이 보였던 눈빛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삐이이-!
부글부글.
찰나였지만 설렘이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눈빛을 띠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무의식 속에서 표출된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로빈의 잔잔했던 평정심의 수면을 흔들어 놓았다.
“얕보인 거 같지?”
피식.
물이 끓으며 김을 토해내는 주전자를 보며 로빈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도경에게 자극을 받은 듯싶었는데 문제는 로빈이 받은 자극은 발전할 수 있는 건실한 자극이 아닌 인스턴트 같이 더부룩한 언짢은 자극이라는 게 문제였다.
똑똑똑!
“음? 닉이 벌써 돌아왔나? 아니... 닉이라면 그냥 들어왔겠지. 누구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트레일러 문을 열었다.
“누구...”
“안녕하세요. 로빈 씨.”
문을 연 로빈은 예상치 못한 손님에 말을 흐렸다. 찾아온 손님의 정체는 자신의 평정심을 흐트린 존재인 까닭이다.
“카일 군. 자네가 여기에 웬일인가?”
“좀 전의 일도 있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로빈 씨.”
“할 이야기라... 일단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씨익.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편한 기분이 들지 않는 미소라 생각하며 로빈은 도경을 자신의 트레일러 안으로 들였다.
“차를 마시려는 중이었는데 한잔하겠나?”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
넉살 좋게 차를 받아들이는 도경을 보며 로빈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껄끄럽군.’
첫인상과 달리 왠지 모르게 점점 이 청년이 자신에게 껄끄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이상한 현상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도경을 좋게 본 기억이 있는 까닭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던 차에 로빈은 도경과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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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널널하네.”
“널널하다고요? 다들 바삐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나요?”
잠깐의 헤프닝 이후. 촬영을 위해 아나긴의 분장을 마친 도경은 자신이 촬영할 장소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촬영이 들어갔는지 스태프의 통제하에 분주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며 도경은 널널하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피곤함이 없잖아. 널널하지.”
“그런 겁니까?”
갸웃.
그의 옆에서 있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항상 느낀 거지만 도경이 감탄하는 부분은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한국에선 스태프들의 얼굴은 좀비처럼 피곤함으로 찌들어 있거든. 이곳 현장을 보면 다들 여기가 낙원이라고 할걸?”
“그 정도인가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평범함이 대단한 거야. 오전 10시에 일하고 7시에 퇴근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아? 게다가 주말에는 일을 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기적이라고?”
“도대체... 한국은 어떤 환경 속에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겁니까?”
“전우애가 싹트는 전장이랄까?”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촬영 강행군. 벤 안에서 잠을 자는 연기자들과 피곤함에 찌들어 너부러져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경의 얼굴에 쓴 미소가 지어졌다.
“좀 더 잘해줄 걸 그랬어.”
도경은 괜스레 임꺽쩡 스태프들을 떠올리며 미안함을 느꼈다.
연속된 철야 촬영으로 피곤한 것을 빼면 분위기도 괜찮았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이곳을 보니 자신들이 일했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곳인지 알게 되었다.
“도경 씨가 동정할 정도라니 엄청 열악한가 보군요.”
도경의 혼잣말을 들은 크리스틴이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도경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크리스틴 너 말이 조금 이상하다? 나 이래 봬도 정 많고 배려 높은...”
“카일!”
“응? 너는...? 잭이던가?”
“하하. 스미스라고 불러줘. 잭은 좀 거리감 있다.”
골프장에서 주로 애용하는 전동카트에서 금발의 미청년이 얼굴을 드러내며 도경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네었다.
“걸어가는 거야? 꽤 거리가 될 텐데 전동카트 지원 안 받았어?”
“받긴 했는데 먼 거리는 아니고 구경도 할까 해서 말이야.”
도경의 말에 미청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의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화책에서 나올법한 왕자님의 웃음. 도경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내의 이름은 왕좌의 길의 주연을 맡은 잭 스미스였다.
“그래? 뭐, 첫날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중에는 카트를 타고 다니는 게 편할 거야. 나중 가면 이리저리 정신없이 촬영장을 옮길 텐데 일일이 걸어 다닐 수 없잖아. 그리고...”
힐끔.
“음?”
“저기 구두를 신은 아름다운 숙녀도 배려해줘야지. 크리스틴이라고 했나요? 힘드시면 제 전동카트에 타시겠어요?”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잭 스미스의 낯부끄러운 말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며 그의 권유를 사양했다. 낯부끄러운 묘한 남녀의 기류에 도경이 혀를 찼다.
“잘도 그런 느끼한 말을 하는구나.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하하하. 그저 숙녀에게 친절한 거뿐이야. 혹시 불편했어?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줘.”
“평소 많이 오해받았나 보다? 그런 말을 꺼내는 거 보니 말이야.”
“조금. 왜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너. 입 열면 재수 없다는 소리 듣지 않냐?”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왕자님은 동화책에서나 있어야지. 현실에 튀어나오니. 현실에 있는 남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민폐나 그지없었다. 그런 도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잭 스미스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나에 대해서 이리 잘 알 줄이야. 감동인걸? 그런 의미에서 오늘 촬영 마치고 같이 저녁밥 어때? 사실 카일 너와 친해지고 싶었거든.”
“생각해볼게. 다만... 네가 밥이 넘어갈 기분이라면 말이야.”
“응? 무슨 말이야?”
“네가 조금 불편할 예정이거든.”
“뭐가?”
“촬영이 말이야.”
호감을 솔직히 드러내는 권유. 하지만 도경은 잭에게 아리송한 대답을 남기었다. 촬영이 불편할 예정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 싸움이랄까? 이걸 영어로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신경전을 벌인다는 거야?”
“그래. 그거 그게 벌어질 예정이거든?”
“뭐? 카일 너 이곳에서 척진 사람이라도 생겼어?”
“어. 조금?”
“누군데?”
도경의 대답에 잭 스미스는 더욱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신경전이라는 건 상대가 어느 정도 레벨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벌일 수 있는 것인데 갓 데뷔한 신인배우의 위치인 도경과 신경전을 벌일 만큼 이곳에는 풋풋한 배우는 없었다.
“로빈 씨.”
“로빈 씨!!? 카일 대체 무슨 헛소리야? 로빈 씨와 신경전을 벌인다니!?”
예상치 못한 거물의 이름에 잭 스미스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신경전 벌일 사람이 따로 있지 무명배우나 다름없는 이가 대배우인 로빈 행크스와 신경전을 벌이다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다니. 자세히 이야기 해봐. 앞으로 함께 연기할 텐데 남 얘기가 아니잖아.”
잭 스미스가 우려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맡은 배역은 로빈 행크스가 맡은 『베르닉 파이크』의 아들인 『아서 파이크』였기 때문이다.
“음... 그렇긴 하네. 잭 네가 맡은 배역이 우리 둘 사이에 껴있으니 영향이 가긴 하겠네.”
“내 말이! 그러니까. 얼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줘.”
「아서 파이크」
왕좌의 길에 나오는 윈터플 영지를 이어받는 소영주로 아나긴의 주군이자 막역지우인 캐릭터.
도경의 말대로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인다면 자신에게 또한 피해의 여파가 올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에 잭 스미스는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뭐, 별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미스 네가 연기만 잘하면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 카일 얘기하다 말고 어딜 가는 거야?”
“슬슬 시간 됐잖아. 얼른 가자고 친구.”
“기다리래도!”
뒤돌아 먼저 걸음을 옮기는 도경을 보며 잭 스미스가 갑갑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동카트에 몸을 실어 그의 뒤를 뒤쫓았다.
“로빈 씨와 신경전이라니 좀 전에 있던 일 때문에 그런 건가요? 서로 사과하면서 잘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사람이라는 게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그 반응... 수상하군요. 혹시 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저지르셨습니까?”
“아니 없어. 내가 무슨 망나니인가? 사고만 치게?”
“정말이죠?”
의심된다는 눈초리에 도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말에 부정을 보였지만 크리스틴은 의심의 눈초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 일 없대도? 좀 전에 일이 전부 다야. 좀 믿어라. 안 그러면 섭섭해지려고 하는걸?”
“아...! 죄송합니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네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후후. 뭘 사과까지야.”
‘미안 크리스틴. 사실은 말이야. 사고 쳤어.’
크리스틴의 사과를 받는 도경. 그건 정말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크리스틴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 것들은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간에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거죠. 연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로빈을 찾아간 도경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리 말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망언과도 같은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2회 연속 오스카 수상을 한 최고로 뽑히는 배우에게 연기를 논하다니 미치지 않고선 그럴 수 없었다.
그것도 인생으로도 이력으로 한참이나 어린 새파란 후학이 말이다. 한국에선 있을 수도,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도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어때? 미국이니까 괜찮지 않겠어?’
크리스틴이 들었으면 극대노할 생각을 아무렇지 늘어놓는 도경은 이내 그에 대한 신경을 끄고는 태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미 저질러 놓은 일보다는 조금 있으면 시작할 첫 촬영. 로빈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그에게 있어 더욱 중요하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