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Ready~ Action!”
딱!
액션이라 외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국적을 불문하고 영상을 찍는 종사자들이 외치는 상징적인 외침은 혼란스러운 현장의 어수선함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현장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압!”
탁!
12세 내외 될까? 어린 나이로 보이는 두 소년이 낭랑한 기합성을 내며 서로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며 대련을 나누고 있었다.
“이거 애들이라고 얕보면 안 되겠는걸? 안 그래 카일?”
“맞아. 얕볼 수 없지.”
자신들의 배역인 유년시절을 연기하는 두 아역배우를 조용히 구경하며 감탄사를 내뱉는 잭의 말에 도경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재력만큼 종잡을 수 없는 게 아이들이니까.”
“동감. 어떨 때 보면 정말 부럽기 그지없다니까.”
“부러워?”
“아무 걱정 없이 성장하는 저 순수함이 말이야. 나도 분명 저런 때가 있었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피식.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란 신비한 존재였다. 어수룩함 속에 한편으로는 무한한 잠재력과 성장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촬영하는 테이크가 거듭될수록 연기가 좋아지고 있었다.
잡념과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함의 결정체. 모두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으로 쑥쑥 성장해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존재는 어찌 보면 경이로운 생물체나 다름없었다.
“잭. 너도 충분히 젊디젊거든? 그런 푸석푸석한 발언은 아직 이른 거 같은데?”
“글쎄. 이래 봬도 생각이 많아서 말이야.”
“뭐, 신경 쓰는 것들이 많나 봐?”
“그냥. 뭐, 여러 가지. 인기가 꼭 좋은 건 아니더라고. 늘어나는 건 걱정과 고민밖에 없더라.”
“고민이라... 그거 좋은 일이잖아?”
잭 스미스는 자신의 어깨를 으쓱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잭을 보며 도경은 웃음 지었다.
“뭐라고? 좋은 일이라고?”
“좋은 일이지.”
도경의 의외의 말에 잭 스미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자신의 상황을 위로하거나 자랑하냐며 야유를 보내는 반응은 예상했지만 좋은 일이라고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잭은 도경이 그런 말을 한 연유를 듣고 싶었다.
“청년은 고민과 방황 속에서 성장하고 가능성을 만들어 간다고 했어. 그러니까 좋은 일.”
“하하. 그거 꽤 재밌는 역발상이네. 뭐, 어디 명언이나 어록 같은 건가?”
“박도경이라고 우리나라에 유명한 가수가 한 말이야..”
“그래? 마음에 드는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응. 꼭 찾아봐. 마음에 들거야.”
피식.
잭 스미스를 향해 도경이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었다. 박도경이 자신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면 그는 분명 재밌는 반응을 보여올 것이었다.
『그만~!』
쩌렁.
웃음 짓는 그 순간. 연무장 위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도경이 놀란 눈빛을 띠었다.
만년설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안에 서려 있는 묵직한 무게감에 의해 촬영장 안의 공기 질감이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것을 느껴서였다.
저벅저벅.
연무장으로 다가오는 중년인의 등장에 모두가 숨을 죽이었다. 평범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위압감에 모두가 위축되었다.
“아...!”
주춤.
“NG! 브라이언 거기서 멍하니 있으면 안 되지.”
“아...! 죄송합니다!”
그중에서도 서로에게 집중하며 열연을 펼쳤던 두 아역배우가 그 정도가 심하였는데 결국 아나긴의 역할을 연기하던 소년이 자신의 대사를 까먹고 NG를 내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니 저건 아무래도 NG를 낼 수밖에 없지...”
절레절레.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무게감이었다. 로빈 행크스의 진노한 연기는 연기가 아닌 진짜로 느껴질 만큼 사실감이 넘쳐나는 까닭이다. 아역 배우가 NG를 내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로빈 행크스.”
잭은 NG를 낸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기를 지도하고 있는 로빈 행크스가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잭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수많은 연기자와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사람을 보았지만, 로빈 행크스의 연기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숨 쉬듯이 연기를 펼치는 게 저런 건가? 어떻게 저런 연기가 가능하지?”
앞서 아이들의 열연을 보았기에 로빈 행크스의 연기가 더욱더 와닿았다.
로빈 행크스는 아이들처럼 열연을 펼치지 않았다. 아니 열연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저 평소 하던 대로 자신이 준비해온 연기를 풀어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연기는 너무나 완벽하기 이를데 없었다.
「베르닉 파이크」.
냉혹하고 사나운 기질을 지닌 폭군. 불혹의 나이가 훌쩍 넘은 나이지만 그의 기세는 마치 야성으로 가득 찬 맹수 못지않았다.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열기를 지닌 눈빛, 평범한 몸가짐에서도 드러나는 대영주다운 품격과 위엄은 파이크가(家)를 이끄는 대영주가 어떤 존재며 어떤 성정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단해도 너무 단단하다...”
첫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완벽이라 불릴 만큼 자신의 배역을 표현한 로빈 행크스를 보며 잭은 경이롭다는 시선을 띠었다. 로빈 행크스. 그는 단단한 암석이었다. 온갖 풍파 속에서도 모양새를 잃지 않고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암석 말이다.
그의 연기는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었으며 단단하고 그 이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서려 있었다. 그것을 본 잭은 문득 도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일. 아까 네가 말했었잖아. 아이는 순수함에 청년은 고민과 방황 속에서 성장하고 가능성을 만든다고 말이야.”
“뭐, 그랬었지.”
“그렇다면 로빈 씨 같은 사람은 어디서 성장할 가능성을 만드는 걸까?”
로빈 행크스는 성장을 다 마친 어른이다. 그것도 한 분야의 대가를 이룬 거인(巨人). 하지만 그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그게 끝이 아닌듯싶었다. 매 테이크마다 그의 연기는 미묘하게 달랐다. 성장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변화하고 나아가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자기도 모르게 도경에게 물었다. 로빈 행크스 그의 경우는 어디에서 성장 가능성을 만들것인가 하고 말이다.
“저건 고집이지.”
“고집?”
“...아주 질기고 질긴 고집. 타협이란 일절 용납하지 않고 정상만을 바라보는 옹고집.”
다시 촬영되는 현장. 좀 전까지 아역배우들에게 상냥하게 연기 지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다시 아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결국 또다시 NG를 내버리는 그를 바라보며 도경은 웃음 지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로빈 행크스는 끝없는 탐구와 향상심을 바탕으로 순수하게 연기의 끝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도경은 자신도 모르게 상기된 얼굴로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그가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액션!”
액션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되는 촬영현장. 로빈 행크스와 그를 따라가려는 소년들의 연기로 조그마한 카메라 모니터에서 가상의 세계가 현실로서 구현화 되어 펼쳐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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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한 중년남성이 진노한 표정으로 어린 소년을 향해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며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촤악!
“아악!”
우당탕탕!
고통으로 얼룩진 단말마와 함께 피가 흩날리고 금발의 소년은 결국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가녀린 모습에 동정이 들려만 중년남성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진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얕게 베었다. 엄살 피지 말거라.”
“아버지...!”
부르르
소년이 중년남성을 바라보며 내뱉은 단어는 그야말로 놀라운 단어였다. 검으로 소년의 몸을 베고 차가운 바닥을 나뒹굴게 한 존재가 그의 아버지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을 집어라.”
“...!”
“너는 내 뒤를 이어 가문을 이을 자다.”
스윽.
자신이 휘두른 검에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을 떨고 있는 아들을 향해 그는 차가운 검날로 아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약함은 무능이자. 죄악. 그 단어는 우리 『파이크』 가문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
대륙전쟁이 일어나기 25년 전.
어스랜드 북부에 있는 미개척 지역 [윈터플]에 한 가문이 좌천되어 내려오게 되는데 그 가문이 바로 『파이크』 가문이다.
파이크 가문은 킹스랜드의 바티스 왕가를 지탱하는 5번째 공작가로서 바티스 왕가에 대한 충정과 절개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그 덕분에 기존에 존재하던 4대 공작가에게 밉보여 결국 그들의 간계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비운의 가문이었다.
“아서. 우리 가문의 가언이 뭐지?”
“...얼어붙은 심장은 온기를 모르며 고통을 모른다.”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파이크 가문의 현 가주. 베르닉 파이크는 자기 아들 아서 파이크를 향해 파이크가(家)의 가언을 물었다.
“그렇다. 그 두 가지를 아는 순간 사람은 나약해지지. 그리고 나약함은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온정을 베푼 네 어미처럼 말이야.”
“그건!”
“묻겠다. 아서.”
쿡!
“윽!”
주르륵.
성인식이 한참이나 남은 아이에게 할 말 치고 지독하기 그지없는 말.
어린 소년은 그 말에 자신의 아버지에게 무언가 반항하려 하지만 베르닉 영주는 그 반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넌 죽고 싶은 것이냐?”
오싹.
목덜미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그와 함께 흘러내리는 핏줄기에 소년은 침묵한다. 정말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기세를 띠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를 바라본 베르닉 영주는 웃음 지었다.
“그래. 죽기 싫은 거지. 그렇다면 너 또한 변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꾸욱.
척박한 환경과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윈터플에서 파이크 가문은 많은 피와 희생을 치렀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 가족을 잃었고, 흉포한 짐승들과 야만족들에게 형제와도 같았던 이들도 잃었다. 그런 생존의 극한 속에서 파이크 가문의 사람들은 변해나갔다.
『얼어붙은 심장』 파이크 가(家).
충정과 절개로 유명했던 기사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파이크 가(家)의 사람들의 성정은 윈터플의 기후처럼 냉혹하고 비정하게 바뀌었고 힘이 곧 정의라는 약육강식의 법도를 따르며 생존과 번영을 위해 그 어떠한 일도 다 저질렀다. 영지에 노예와 범죄자들을 병사로 받아들여 무력을 키웠고 야만족 카이언인들을 노예로 삼으며 영지를 개척하고 부를 쌓았다.
“검을 쥐어라.”
“으...”
그런 환경 속에 우뚝 솟을 존재가 나약한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베르닉 는 자신의 아들이 강한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아니, 되어야 한다 여겼다.
“쥐어!”
“으아악!”
휘익!
서릿발과도 같은 노성에 소년은 검을 쥐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아버지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치밀어 오는 분노와 엄습하는 공포를 떨치기 위해서였지만 소년의 검은 베르닉 영주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한심한 놈.”
챙!
독기와 살심을 품을 검을 기대했건만 투정이나 다름없는 물렁물렁한 검에 베르닉 영주는 인상을 찌그러트리며 손에 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는 죽기 살기로 휘두르란 말이다.”
퍼억!
“컥!”
우당탕.
머리를 강타하는 검. 검면으로 쳤지만 무자비한 일격에 아서는 바닥에 내리꽂히듯 곤두박질치며 의식을 잃었다.
“후우...”
흠칫.
바닥에 의식을 잃고 너부러진 자신의 아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베르닉 영주. 그 모습엔 아버지로서의 정은 한 톨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래 거기 시종. 이름이 뭐지?”
“...!”
베르닉 영주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보았다.
“아나긴이라고 합니다.”
“아나긴. 제법 쓸만한 재주더구나. 검술을 배웠더냐?”
“아닙니다. 그저 주인님의 연습 상대로 검을 쥐어봤을 뿐입니다.”
“흐음. 야만족에게 내 아들이 검을 놓쳤다라...”
베르닉 영주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아들의 시종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들이 아무리 물러터진 놈이라도 검을 쥘 수 있는 나이 때부터 검술을 가르치고 혹독하게 훈련 시켰다. 그런데도 검을 놓쳤다는 것은 이 소년이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죽일까요?”
“글쎄. 그러기엔 조금 아깝군.”
주군의 말 없는 시선에 그의 옆에있던 기사가 아나긴을 노려보며 검에 손을 올렸다.
명만 떨어진다면 당장에 소영주에게 치욕을 준 야만족을 단숨에 벨 생각이었지만 베르닉 영주는 다른 생각을 지닌 듯싶었다.
“아나긴. 너는 어찌 생각하지? 소영주에게 수치를 안겨준 야만족인 너에게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스윽.
베르닉 영주는 피 묻은 검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나긴의 들어 올린 후. 검날을 목 끝을 겨누며 물음을 던졌다. 자신을 앞을 보고도, 죽음을 앞둔 가운데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이 야만족 소년이 개인적으로 흥미가 동한 까닭에서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재미없는 대답이군.”
꾸욱.
소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베르닉 영주는 검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검날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의지에 야만족 아나긴은 눈을 감는다.
“다만...!”
“음?”
자신의 목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올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아나긴은 소원을 빌듯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다라... 그것 또한 재미없는 대답이구나.”
“......”
피식.
살고 싶다는 소년의 간절한 의지에도 베르닉 영주는 잔인하게도 재미없다고 답했다. 부질없는 소망이었을까 싶었던 그때 아긴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음엔 든다.”
툭.
“쥐어라.”
“!?”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아나긴의 앞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검을 던진 베르닉 영주는 그에게 검을 쥐라고 고하였다.
“네 녀석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덥석.
“무엇을 하면 됩니까?”
“훗.”
좀 전의 아서와 달리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쥐는 소년을 보며 베르닉 영주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음 지어 보였다.
힐끔.
‘주제에 그래도 쓸만한 녀석을 주어 왔구나. 아서.’
자신의 아들은 나약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인복은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수족을 밖에서 주워 왔으니 말이다.
베르닉 영주는 사나운 미소를 피어 올리며 앞의 있는 소년을 향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부우웅!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