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아닙니다.”
거짓말이었다. 아나긴은 자신이 내뱉은 말과 달리 아주 많이 놀란 상태였다. 자신의 영주가 왜 이곳에 있고, 자신을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불길한 감정에 사로잡혀갔다. 그리고 그것은 아나긴의 명백한 실수였다.
“하하. 아니다 놀랬을 테지. 내가 갑자기 이런 곳에 나타났으니 말이야.”
흠칫!
베르닉 영주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아나긴은 안색은 더욱 좋지 못하였다. 베르닉 영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음을 아는 까닭이다. 베르닉은 영주가 진심으로 웃을 때는 상대방의 피를 보거나 굴복시킬 때밖에 없었다.
“용서하십시오!”
쿵!
웃음과 달리 베르닉 영주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감지한 아나긴은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했던 서약을 읊으며 용서를 구했다.
“제 몸과 영혼은 파이크 가문의 것. 잠시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
“그래. 그것이다. 아나긴 너는 파이크 가(家)를 위해 존재하는 검. 파이크 가문의 혈통을 따르고 복종해야 하는 존재다. 다시는 내 앞에서 딴생각을 품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나긴의 모습은 주군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불사하겠다는 충정과 절개가 넘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르닉 영주가 아나긴을 검이라 칭한 것은 비유가 아닌 정말로 물건으로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고 아나긴 또한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죽이며 검으로서 베르닉 영주를 따르고 있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뜨거운 충정과 신뢰 관계가 아닌, 절대적인 복종과 굴복. 그것이 아나긴과 베르닉 영주의 관계였다.
“아나긴.”
“예.”
베르닉 영주는 아나긴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그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가섰다.
“내가 이곳에 너를 부른 이유는 한 가지를 확인할 게 있어서이다.”
저벅저적.
스윽.
무릎을 꿇고 있는 아나긴의 머리에 손을 올린 베르닉 영주는 손을 떼지 않은 채로 그의 주변을 맴돌며 그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저 아이들은 뭐지?”
“저 아이들은 이번에 처분당한 불순분자들의 아이들입니다.”
“아니, 아니지. 그건 틀린 대답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덥석~ 홱!
우악스러운 손길로 아니긴의 머리를 잡아챈 베르닉 영주는 아나긴의 고개를 젖혀 올린 후 아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 들은 무엇이지?”
“...그저 관심조차 아까운 미천한 것들입니다. 무엇을 물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은 놈. 어찌 모른다는 거지?”
툭.
“영주님?”
아나긴의 모르겠다는 그 대답에 베르닉 영주는 비릿한 웃음 지으며 움켜쥔 아나긴의 머리를 놓으며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전부...”
저벅저벅.
아이들 뒤에 자리 잡은 베르닉 영주가 눈빛을 번들거리며 눈빛으로 아나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나긴 네가 멋대로 살려준 것들 아니더냐?”
“...!”
광기에 가득 찬 베르닉 영주의 말이 감옥 안에 울려 퍼지고 모두가 숨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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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숨 한 올조차 용납 안 되는 분위기. 촬영장의 모두가 로빈 행크스의 광기 어린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촬영 스태프들은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명연기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의 이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예상을 뛰어넘은 연기임이 분명했다.
“로빈 저 망할 녀석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지만 그런 명연기에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왕좌의 길 총감독이자 프로듀서인 맥 클라우드 감독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씬에 로빈 행크스의 연기력과 존재감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제멋대로 애드리브를 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발끈.
원래라면 대본대로라면 무릎 꿇은 도경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젖힌다거나, 아이들의 뒤로 걸어가 자리 잡아 도경과 대치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대본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애드리브(ad lib)」
즉흥적인 연기를 펼치는 애드리브에 대한 수많은 일화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애드리브가 연기에 능숙한 사람이 펼일 수 있는 멋있는 연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애드리브는 불화를 불러오는 개똥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애드리브 행위는 사전에 약속한 협약들을 전부 무시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것을 오랜 연기 생활을 한 로빈 또한 모르지 않을 터인데 왜 저런 연기를 펼치는지 맥 클라우드 감독으로선 쉬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연기라도 내 의도에 반하는 건 필요 없다네. 이 친구야.”
영화도 아니고 각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촬영감독과 연출자들이 달라붙어서 맡아서 만드는 드라마인 만큼 연기자들은 철저하게 자신이 의도하고 짜 맞춘 연출대로 따라와 줘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지금 로빈의 행동은 명백히 총감독인 그의 권한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역시 NG를 내야겠지.’
스윽.
모두가 넋 놓고 로빈의 연기를 보고 있을 때. 맥 클라우드 감독만큼은 NG 생각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씬의 수정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 애드리브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씬의 주인공은 베르닉 영주가 아닌 아나긴이다. 감옥 안에서 아이들을 죽이며 마지막에 자신을 따르던 소녀까지도 영주의 뜻에 죽여야 하는 비정한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아나긴에게 동정이 가게끔 연출한 것인데 지금 로빈의 애드리브에 베르닉 영주의 카리스마밖에 보이질 않았다.
“NG... 음!?”
멈칫.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누구나 불편해할 NG를 외치려는 그 순간. 맥 클라우드 감독이 자신의 행동을 멈추었다.
“......”
웅성웅성.
베르닉 영주와 아이들을 보던 도경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상황을 발견한 맥 클라우드 감독은 들어올렸던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무언가 나온다.’
도경을 보는 순간 그는 그리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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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길 E2 #57 스크립트]
아나긴: 영주님 그건...!
베르닉 영주: 검이란 무엇이든 베는 물건이지.
아나긴: .....
베르닉 영주: 베어라.
『표정이 굳은 아나긴을 향해 베르닉 영주가 아이들을 가리키며 명령한다.』
베르닉: 내게 베지 못하는 검은 쓸모없다. 무슨 의미인지 네가 잘 알 거라 믿는다.
아나긴: 영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아나긴을 스쳐 지나갈 때 의미심장한 소리와 함께 감옥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베르닉 영주. 아나긴은 남은 아이들을 보며 검을 뽑아 들어 올린다.』
아나긴: 용서하지 마라.
“......”
‘NG를 낼 생각인 건가? 아니, 그런 것 치고는 상태가 이상한데? ’
얼마 남지 않은 대사. 10초 될까 말까 한 아주 짧은 분량의 대사들이 도경의 기묘한 상태에 정체되고 있었다.
‘음?’
움찔.
처음에는 자신의 애드리브에 감정이 상해서 도경이 연기를 멈추는지 알았지만, 연기하면서 예민해진 로빈의 감각이 공기의 기묘한 질감을 감지하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건 위험하다.’
오싹.
잠깐의 틈 안에 도경이 소리를 죽이며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활시위가 겨눠진 방향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 순간은 로빈은 위험하다고 생각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한번 말해 보아라.”
“......”
이글거리는 눈빛. 묵직함이 실린 목소리로 도경을 내리 짓누른다. 그런데도 도경이 반응이 없자 로빈은 재차 다시 도경을 향해 대사를쳤다.
“대답해!”
“...!”
로빈은 이번에는 물음이란 수단이 아닌 호통을 내뱉었다.
한 치의 나약함과 불충을 용납하지 않는 베르닉 영주는 분노의 일갈. 그것으로 기묘한 침묵으로 자신에게 흐름을 끌어당기려 했던 도경의 시도를 끊어버렸고 극의 흐름을 주도해 나갔다.
“검이란 무엇이든 베는 도구. 베지 못하는 검은 쓸모가 없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로빈은 흐름을 주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대사를 진행하며 극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런 로빈의 행동은 석연치 않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게 로빈이 맥 클라우드 감독과 갈등을 빚으면서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애드리브를 쳤던 이유는 도경의 연기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도경의 연기를 제대로 보지 않고 마무리를 향해 달려나가려 하다니 그것은 명백히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베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음?”
예기치 못한 타이밍 도경이 입을 열었다. 덕분에 로빈의 내뱉던 대사가 끊겼지만, 도경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연기를 이어나갔다.
철컥!
“!?”
숙였던 고개가 들어 올려 보이며 서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로빈을 바라보며 도경은 비릿한 미소를 품으며 자신의 허리에 매여있는 검에 손을 올렸다.
“그저 벨 필요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스팟!
그 말과 함께 도경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검집에서 검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빈을 향해 쇄도해 나아갔다.
“...!”
그 순간 로빈은 깨달았다. 팽행하게 당겼던 활시위는 이미 쏘아져 있었고 자신이 주도
---
쇄 애액-!
은빛의 검이 쾌속함과 살벌한 소리를 머금으며 휘둘러 졌다. 눈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은빛의 궤적을 남긴 검은 감옥 안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스쳐 지나갔다.
휘익익! 서걱-!
“...!”
일말의 망설임과 자비가 없는 검격. 아이들을 검으로 베는 도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 같았다.
털썩! 털썩!
“......”
너무나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아이들은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검에 베여 쓰러져나갔다. 생명에 대한 가치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전에 아이들의 생명은 덧없이 바스라 졌지만, 도경은 그저 도축하듯이 베어나갈 뿐이었다.
“이 비루한 것들을 죽여서 거름으로 쓰는 것보다 광산에서 평생을 영주님께 봉사하게 하는 것이 더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베고 베어가며 마지막 한 소녀를 남긴 도경은 드디어 검을 멈추고는 로빈을 바라보았다.
“그저 그뿐입니다.”
철컥.
“아, 아...!”
푸욱!
“윽!”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소녀. 자신을 따랐던 소녀를 향해 검을 겨눈 후. 도경은 천천히 소녀의 몸에 천천히 검을 밀어 넣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들리지만, 도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심했다.
“그러니.”
“.....”
“영주님의 검을 의심하지 마시십시오.”
스르륵.
털썩.
소녀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도경의 시선은 오로지 로빈에게만 고정되어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로빈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맛 보았다.
‘저건 진짜다.’
오싹.
“하하...”
“!?”
그것은 충정이었을까? 경고였을까? 비정함의 끝을 보여주는 도경의 소름 돋는 연기. 오싹함과 동시에 뒤늦게 솟구치는 전율에 로빈 행크스는 큰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충동에 몸을 맡기었다.
“하하하하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