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하하하! 아나긴 정말 네 녀석은 걸작이구나.”
“......”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베르닉 영주는 아나긴에게 다가가 기특하든 듯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나긴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충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에게조차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는 비정함과 냉혹함이 말이다. 특히나 그를 따르던 소녀를 맨 마지막에 남기고 검을 꽂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백미였다.
“정말 아서가 너의 반이라 닮았으면 좋겠어.”
“...그런 말은 마십시오.”
“아니. 진심이다. 그 녀석은 내 뒤를 이을 놈치고는 너무 유약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베르닉 영주는 아나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아서가 그의 성정을 반이라도 따라갔다면 자신의 고민거리를 덜었을 거라고 말이다.
상황의 흐름과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냉정함.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림에 있어 망설이지 않는 과감함과 그것을 감내하는 독기는 자유분방하고 유약한 자신의 아들이 갖추지 못한 것들이었다.
“못난 녀석이다. 그렇기에...!”
자질은 충분했건만 그것을 발휘할 성정이 터무니없이 모자란 아들놈을 떠올리며 베르닉 영주는 눈에 힘주어 아나긴을 바라보았다.
“너라는 검이 필요한 것이다.”
모자란다면 채워야 하는 법. 아나긴은 아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검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아나긴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운명이자 숙명이었으며 베르닉 영주가 끊임없이 아나긴을 몰아붙이는 이유였다.
“영주님의 기대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것이면 되었다. 오늘 고생했으니 시종을 통해 보상을 내리마.”
툭툭.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럼 가보마.”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아나긴을 격려하며 베르닉 영주는 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떠나려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참, 아나긴.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단다.”
“예?”
“말했잖느냐. 나는 네게 물어보러 온 것이라고 말이다. 걸음을 옮기는데 이거 꽤 거치적 스럽구나.”
“...!”
“하하하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남긴 베르닉 영주의 말에 아나긴은 침묵하며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
아이들을 베는 것에 그 누구보다 만족하는 사람이 베르닉 영주였고 굳이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기는 저의도 예상되었지만 베르닉 영주가 남긴 말이 가슴 속의 화인처럼 계속 맴돌아 울려 퍼져있었다.
“용서하지 마라.”
그 누구도 모를 조용한 속죄. 아나긴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걸음을 옮기고 감옥을 관리하는 꼽추노인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시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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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뒤.]
“미친...!”
“와! 돌았네.”
“......”
주르륵.
심야저녁. 미국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소파에 앉아 그곳에 걸려있는 TV를 바라보는 청년은 입가에 흐르는 맥주를 닦지도 못한 채. 넋을 잃고 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인상 좋았던 로빈 행크스의 광기어린 연기도, 부지불식간에 검으로 아이들을 베는 살벌한 동양인의 연기까지 그 무엇하나 예측을 뛰어넘었다.
“저, 동양인 존재감 정말 미쳤는데?”
“쉿! 조용해 봐. 아직 뭐가 더 나오려나 보다.”
“새로운 캐릭터 등장인가?”
꼽추노인이 무언가를 버리고 떠나간 자리. 포대자루로 쌓여져 있던 아이들의 시체를 뒷모습으로 바라보던 한 남성의 등장에 드라마를 보고 있던 이들은 좀전의 여운을 애써 떨궈내지만 안타깝게도 드라마는 새로 등장한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전에 검은색 화면으로 물들며 금박으로 입힌 자막이 떠올랐다.
[To be continue...]
“아! 뭐야 벌써 끝났어? 그래도 얼굴은 보여주고 끝내야 할거 아니야.”
“신 캐릭. 카이언인가 본데? 파란 눈빛으로 빛났잖아.”
“아니. 그것보다 이거 드라마 맞냐? 퀄이 뭐 이리 후덜덜해? 티져는 낚시용이 아니였어...! 맥 클라우드 감독 제대로 드라마 뽑았는데?”
“아~! 다음 주 언제 기다리냐? 이거 대박띵작이다. 오랜만에 커뮤니티에 난리 나겠는데?”
“테일러 멍하니 뭐해? 한 마디 해봐. 어떻게 봤어?”
“어, 어? 아니. 뭐라 할 말해. 그냥 미쳤는걸. 특히 각 영지의 캐릭터들이 매력적인 것 같아.”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캐릭터를 구축하는 디테일이 장난 아니더라.”
항상 애를 태우며 끝나는 드라마의 패턴은 낯선 게 아니건만 왕좌의 길을 봤던 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격하기 그지없었다.
완벽한 중세시대의 구현과 각자의 배경과 상황 속에서 리얼하게 숨 쉬어 살아가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들은 그 광활한 스케일과 디테일을 느끼게 해 드라마 매니아인 그들을 흥분케 하는데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연기 미치지 않았냐?”
“맞아. 숨도 못 쉬겠더라. 로빈 행크스야 그렇다 치고 그 동양인 배우 봤어? 1화 때부터 액션도 심상치 않더니 존재감 미쳤더라.”
“인정. 처음에 아나긴을 동양인으로 캐스팅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 정도면 왜 캐스팅 되었는지 알겠더라.”
“배우 이름이 뭐야?”
“잠깐만...”
서로 흥분하며 각자의 소감을 꺼내는 데 여념이 없던 중에 모두의 소감은 관심은 한 사람으로 모여져 간다.
“카일이라는데?”
“카일?”
“응. 신인인지 프로필은 별로 특별할게... 어?”
“응? 왜 그래?”
“이 녀석 본업이 가수인데?”
“가수?”
“그 너가 좋다던 노래 있잖아. 『Bad Blood』였나? 부른 애.”
“뭐? 진짜!? 봐봐.”
갑자기 나타나 미친 존재감을 선사하며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동양인 배우.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드러나는 커리어에 모두가 놀람의 표정을 지었다.
요즘 가수나 연기자나 서로의 커리어 영역에 대한 경계선이 옅어졌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기량으로서 분명 한계를 띠기 마련인데 이 카일이란 동양인은 노래로는 빌보드 상위차트에 올리고 연기로는 로빈 행크스와 맞먹는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야말로 요상하기 그지없는 존재에 모두들 드라마는 잠시 잊고 카일이란 존재에 대해서 파헤치기 시작한다.
“뭐야? 리아 그라테랑도 연관 되어 있잖아? Again? 영화도 찍었네. 애 뭐냐?”
“은근 관련 동영상들 많은데? 나, 이거 봤었네. 개 웃겼었는데 이 영상 뭔데? 드라마랑 이미지 완전 다르잖아? 동일인 맞아?”
“아니. 진짜 애 이상하잖아. 도대체 정체가 뭐야?”
파헤치고 파헤친다.
덕질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 그렇게 모두들 도경의 괴상한 커리어를 더듬어가며 카일이란 존재에 대해서 알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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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끝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반응들이 하나둘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HBA」 - SNS]
┗[파일럿 1화에 넉 다운. 2화부터 전율.]
┗[다시보기로 다시 보는 중. 두 번째도 숨을 못 쉬었음.]
┗[전에 자체 제작 드라마를 거하게 망했던 HBA가 이번에는 제대로 이를 갈았나 보네요.]
┗[명불허전 로빈 행크스. 이런 연기도 가능할지 처음 알았네요. 역시 최고의 배우다!]
┗[잭 스미스! 나의 왕자님 난 널 응원해~!]
┗[2화 마지막 나오는 인물 스캇 드바로로 예상! 증거 좌표 찍음!]
┗[카일이라는 동양인 존재감 미쳤다! 슈퍼루키!]
┗[제대로 된 중세시대의 판타지 드라마. HBA 고마워요!]
┗[이대로만 가자-!]
[HBA 전략본부팀.]
“반응들이 모두 하나같이 좋군요.”
“네. 모레츠 여사. 파일럿 방영을 했음에도 첫 화가 380만이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청률입니다.”
“2화는 아직 기다려야 하지만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성적이겠어요.”
“네. 분명 그럴 겁니다.”
드라마는 방영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방송국에서는 드라마에 대한 시청률을 확인하고 제작 여부와 전략을 어떻게 할지 논의하는데 특히나 프리미엄 케이블(유료채널)로서 미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HBA방송국은 더욱더 시정자 수 집계에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응해 나간다.
더군다나 왕좌의 길 전에 자체 제작한 드라마가 폭삭 망한 이후라 HBA 전략본부팀은 왕좌의 길 시청자 수 집계에 사활을 건 것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였는데 지금 회의실에 상석에 고위임원직을 맡고있는 모레츠 여사가 앉고 있는 것이 그 결과물이었다.
“티져때부터 사고가 터져서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났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게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릅니다. 동양인 신인배우임에도 미국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친구를 이용하면 재미난 현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밌는 현상이요?”
“잠시 이거 좀 보십시오.”
틱!
수백억 단위가 들어가는 프로젝트. 조그마한 현상이라도 놓칠 수 없는 입장. 모레츠 여사는 본부팀 팀장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가 가리키는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도경형 이거 실화냐? 아니 진짜 포스 오지잖아. 로빈 행크스랑 투샷 뭔데? 실감이 안나네.]
[우리 또갓도(또라이 갓도경) 일냈구나. 존재감 쩐다. 뭔가 눈물난다.]
[월드 클라스 등극 실화냐? 아니 애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놈인지 모르겠다. 어찌 조용하다 싶으면 굵직한 일들을 내냐?]
[내안에서 차오른다. 거한 국뽕이란 위험한 마약이 내 몸을 휘몰아 친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Do you know 도경!?]
[자막은 아직 안 나왔나요? 영상은 다운 받았는데 자막이 없어서... ㅠㅠ]
[우리형 진짜로 월드 스타되려나? 아직 마음에 준비 안됐는데... 또도로 조금만 더 있어줘.]
“이게 뭐죠?”
“카일 씨 국가인 한국에서의 왕좌의 길 반응입니다.”
한글로 적힌 수많은 코멘트.
바삐 만들었는지 한글 아래에는 어설픈 번역이 된 영어가 조악하게 쓰여 있어 읽기 힘들었지만 대충 보아도 심상치 않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에 모레츠 여사는 이 코멘트의 연유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카일씨. 한국에서 대단한 인지도를 구사하는 스타더군요. 제가 전해드린 자료를 한번 읽어 보시면 놀라실겁니다.”
모레츠 여사의 허락에 팀장은 안경을 곧추세우며 모레츠 여사에게 조사한 자료가 적혀있는 프린트를 건네며 도경에 대해서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의 설명을 들으며 찬찬히 프린트를 훑어보던 모레츠 여사는 이내 놀라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게 가능한가요? 커리어를 보니까 연예인으로 활동한 이력이 갓 일년 지난 신생아로 알고있는데 이 정도라니 믿을수가 없네요. 놀랍군요.”
“네. 저희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우연히 한글로 쓰인 코멘트를 보고 그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조사해보니 이 친구 잘하면 엄청난 노다지가 될 요소가 풍부합니다.”
“노다지라. 뭐 생각하고 계시는 거 있나요?”
“네 우선은...!”
HBA 전략본부팀 회의실.
모레츠 여사와 전략팀 팀장은 무언가 열띤 이야기를 나눠가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 나간다. 온갖 숫자와 통계. 돈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파헤치는 미국 기업인의 본능이 회의실 안에서 전격 발휘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