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백금발의 미청년이 흑발의 기사에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아나긴! 정말로 네가 이 아이들을 죽였어!?”
“그래. 내가 죽인 아이들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이들이잖아!”
“파이크 가문의 영지에서 반기를 준비했던 불순분자들의 아이들이었다. 애들이라도 해도 예외는 없어.”
“그게 무슨...!”
“비켜. 아서 지금은 서로 말다툼 벌일 때가 아니니까.”
탁!
윈터플 영지에서 예상치 못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아나긴이 자신의 충심을 증명하기 위해 죽였던 아이들의 시체가 성벽과 영지 내 곳곳에 전시되듯 놓여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우리가 굴복한 대가이다.
형제들이여 일어나라! 맞서 싸워라!
우리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외치자
우리는 저주받지 않았다고!】 -블루문 수장 『롭 라즐리온』
“벌레 같은 것들이 같잖은 짓을...”
덥석! 찌이익!
누리끼리한 낡은 천 위로 거칠게 피로 쓰인 글씨를 읽으며 아나긴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뻗어 벽보를 찢어 버렸다.
“아나긴! 진짜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저 아이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거냐고?”
“지금 그런 쓸데없는 거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다. 이 일을 영주님께 보고하러 가야 해.”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덥석 휙!
“...!”
아나긴의 대답에 아서가 화를 내며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자신의 친구가 냉정한 성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도대체 왜 이 어린아이들을 죽였어? 아나긴. 너 그런 녀석 아니잖아.”
“짜증 나는군. 그래 죽였다. 죽였어. 그래서 뭐? 뭐가 잘못됐지?”
“아나긴? 너...!”
“순진한 척도 정도껏 해.”
탁!
자꾸만 자기 일을 방해하는 아서의 행동에 아나긴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멋대로 이런 말을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죽음들로서 네 자리가 유지되는 거다. 언제까지 밝고 깨끗하게만 있을 생각이냐?”
“뭐?”
아나긴은 자신의 옷깃을 잡은 아서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자유롭고 밝은 성품을 지닌 그가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갑갑하기도 했다. 아나긴은 아서가 이제는 현실을 알았으면 했다. 아서 그가 있는 위치는 절대로 밝은 성품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도 몰라 서로 치고받는 저주받은 야만족들이다. 베르닉 영주님 아래에서 정착해서 사람답게 보이지만 아직도 야만성을 못 버려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영지를 탈주하거나 이를 드러내는 족속들이다. 힘을 보여 권한을 세우고 공포로 옭아매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짐승 같은 것들이야.”
어스랜드 척박한 북부지역에서 파이크 가문이 일궈낸 윈터플 영지는 항상 위태로웠다.
베르닉 영주가 윈터플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사냥을 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카이언인들을 잡아다가 농노로서 정착시켰고 그 과정에서 영지 내에 불어난 카이언인들의 관리에 부족했던 영주민 숫자를 늘리기 위해 외부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온갖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고 그 상황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힘으로 내리찍는 방법이었다.
“짐승이라니. 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야!”
“그래. 사람이지. 다만 부모와 닮지 않는 애가 태어나고, 문신을 새기지 않으면 자식을 못 알아보는 저주받은 족속이고 말이야. 아, 흥분하면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기도 하지. 참 재밌어.”
“아나긴 애초에 너도 저들과 같은...!”
“그만!”
“...!”
비아냥에 가까운 냉소를 내뱉는 아나긴의 태도에 아서는 순간 실수를 할 뻔하였다. 아나긴 그가 어떻게서든 숨기든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말로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나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카이언인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신 차려라.”
“나밖에 없다고?”
“저들을 봐. 저들이 너같이 생각하는 거 같아?”
“?”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영주민들을 가리키며 아나긴은 지독히도 쓴웃음을 지었다.
굴복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분노한 눈초리를 띠고 있는 카이언인들과 그런 카이언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영주민들. 그 두부류를 가리키며 아나긴은 아서에게 잔혹한 진실을 내뱉었다.
“영주민들은 카이언인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건 카이언인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야. 절대 서로가 동등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거야.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악순환은 영원히 이어지겠지.”
아무리 비밀로 숨긴다고 하더라도 아나긴이 카이언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그런데도 아나긴은 그 스스로가 카이언인은 절대 동등해질 수 없는 존재라 고한다.
“아나긴... 너 정말 그걸로 된 거야? 정말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냐고?”
“네가 이어받을 영지란 그런 곳이다.”
“!”
자학과도 같은 아나긴의 행동에 아서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정말로 그 현실을 받아들일 거냐 묻지만 아나긴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곳이야. 여긴...”
카이언인라는 최하층의 있어야 유지되는 사회를 구성한 영지가 윈터플 영지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나긴은 자신의 친구를 뒤로하고 대기시켜놓았던 말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위험해! 아나긴-!”
파앗!
“음?”
쐐애액!
다급한 아서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에 아나긴은 불길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푹!
“컥!”
철푸덕!
몸을 날리며 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은 아서. 그를 바라보며 아나긴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아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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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몸을 날리면 안 되잖아아아아~! 왜? 왜!? 그랬어!?”
“...아...! 이 미친 새끼...!”
자신의 몸을 붙잡으며 이리저리 과좡되게 흔들면서 Why와 No라는 비명을 외치는 도경의 행동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잭 스미스의 얼굴이 결국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벌떡!
“왜 좋았잖아! 뭔데 이번엔 뭐가 문제인데?”
자리에 벌떡 일어나 도경을 향해 따지듯 불만을 터트리는 잭 스미스. 하지만 도경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 타이밍이 미묘하게 빨랐어. 다급한 느낌보다는 뭔가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뭐, 편집으로 타이밍 조절하면 그냥 넘어가도 되는 문제니까 넘어가고 싶으면 넘어가도 돼.”
“이익...!”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런 말을 꺼내면 그 누가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저건 말만 그런 것이지 다시 한번 촬영하자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싸이코같은 새끼.’
부르르.
자신이 캐릭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도경에 잭은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분명 잘 받쳐주고 실력 좋은 쿨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모든 게 때를 기다리며 본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듣고 보니 도경 씨 말처럼 그런 느낌이 있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미스 군?”
“......”
“그렇다면 해야죠.”
도경의 말을 듣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잭에게 어떠할지 의사를 묻는다. 모든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잭의 표정은 그리 좋지는 못했다.
‘왜 이렇게 됐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분명 실력 좋은 신인 연기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도경의 중심으로 맞춰 돌아가게 되었다.
“잭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한다니까! 해!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거든!?”
“깜짝이야. 그럼 그런 거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잭?”
“몰라! 그냥 지르고 싶어서 그런데? 나 소리 지르는 거 좋아해. 몰랐어?”
“그래 좋아하는구나. 나 메이크업 점검받으러 갈게. 좀 이따 봐”
“으아악! 앓으니 죽지!”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다고 이일의 원흉이면서 신경 써주는 척하는 도경을 보며 잭이 해괴망측한 괴성을 지르며 도끼눈을 치켜떴지만, 도경은 사뿐히 그를 무시하며 자신의 볼일을 보러 사라진다. 그리고 또다시 터져 나오는 괴성에 스태프들의 입가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하하. 잭 진정하라고 카일이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분하면 실력으로 보여주라고.”
“으으! 너무 카일 편만 들어주는 거 아니에요?”
“어쩌겠어? 솔직히 오늘도 끝내줬잖아.”
“젠장. 뭐, 악마의 재능도 아니고 도대체 저 자식 뭐가 뭔지 모르겠다니까요. 저 녀석하고 있으면 제 상식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그 말에 잭이 분함과 체념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메이크업을 재정비받는 도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촬영감독이 그 시선을 따라 도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재능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어. 오늘따라 비실거리는 스태프들이 많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어제도 카일이 스태프들 데리고 가라오케 바에서 술 마시며 놀았더라고 하더라.”
“그러니까요! 정말 말이 안 되잖아요. 다음 날 아침부터 촬영인데 밤새워서 술 마시며 노는 거 하며, 스태프들이 나가떨어지고 저 녀석은 저렇게 쌩쌩한 거 하며 다 이상하다고요. 솔직히 대본 붙잡는 시간보다 기타 가지고 노는 시간이 많은 놈인데 진짜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P맨 아니냐. 그냥 그러려니 해라.”
“그렇죠 P맨 이었죠. 그 빌어먹을 P맨...!”
“하하하. 덕분에 촬영현장이 활기로 넘치잖아. 잭 너도 즐겨.”
“네네. 아주 제대로 겪고 있지요.”리테이크
“하하하. 어서 가서 너도 준비해. 또다시 재촬영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됐거든요!?”
농담 우스개로 도경이 먼저 이야기했던 P맨.
그것이 어느새 하나의 현상과 하나의 감탄사를 나타내는 총괄적인 무언가(Thing)를 가리키는 언어가 되어있었다. 모두가 그 영향력에 놓여있었고
“저기 실례합니다.”
“음?”
“아, 저희는 이번 한국에서 왕좌의 길을 방영할 TBN에서 온 취재프로그램 팀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잭 스미스를 보내고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촬영감독의 근처로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는데 그는 좀 전에 도경과 인터뷰를 했던 리포터였다.
“아아. 우리 카일 군 인터뷰랑 드라마 메이킹 영상을 찍으러 오셨다는 분들이군요. 위에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다들 친절하게 맞이해주신 덕분에 별문제 없이 잘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물어볼 게 있다고요? 그게 뭐죠? ”
“아, 감사합니다.”
‘뭐가 뭔지 몰라도 역시 이곳 스태프들 도경 씨에게 우호적이야.’
TBN에서 온 『연예계[S]가십』팀은 솔직히 지금 매우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들 때문에 일정이 늦어 졌음에도 자신들에게 친절한 왕좌의 길 드라마 스태프들의 행동와 도경을 향해 매우 우호적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인상 깊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한국에서 유명하다 하더라도 미국에서는 젊은 무명의 신인에 불과한데 그들이 도경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 촬영감독과 이야기를 하며 떠난 미국의 잭 스미스란 하이틴 스타보다 더욱 대우해주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리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는 것이리라.
“다들 도경 씨를 향해 P맨이라고 하던데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하하! 난 또 뭐라고. 또라이(psycho)란 뜻입니다.”
“네?”
“아아. 오해하지 말아요. 나쁜 뜻으로 그리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럼?”
웃음을 터트리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리포터의 표정이 벙찌었는데 그런 리포터를 향해 감독이 서둘러 손을 올리며 오해하지 말라고 제스쳐를 취했다.
“Perfcet ‘P’ man.”
“네?”
자신이 귀를 의심하는 리포터를 향해 유쾌하다는 듯 감독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일에 대한 우리들의 최고의 찬사입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