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아나긴이 죽었다. 악몽은 끝났다!』
검에 찔린 채 절벽 밑에 있는 강에 떨어진 아나긴의 소식은 윈터플 영지를 빠르게 퍼져 영지 안에 있던 카이언인들과 주먹패들의 환호성을 자아내었다. 치안과 질서를 담당한다는 명목하에 영지에서 악몽으로 군림했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모두가 기뻐하는 것이었다.
“개소리하지마! 아나긴이 죽었다고!? 어디서 그딴 헛소리를!”
“헛소리? 블루문의 수장에게 패해 비굴하게 빌다가 죽었다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만?”
“입 닥쳐! 아나긴이 그럴 리 없어.”
쿵!
영지로 돌아오는 길목에 자리 잡은 여관에서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백금 발의 미청년이 친구들과 건배를 올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중년인의 멱살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며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큭큭큭!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그 끔찍한 놈이 뒈져버렸다는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네 녀석 정체가 뭐지?”
윈터플 영지 내에서 아나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아나긴의 죽음에 건배를 올리며 축하하는 것이려만 이 금발 청년은 다른 듯싶었다.
“그놈의 죽음에 이렇게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은 이곳에선 아무도 없다고? 정체가 궁금해지는걸? 혹시 그놈의 숨겨놓은 애인라도 되는 건가?”
키득키득.
중년인은 조롱에 여관 내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웃음소리를 듣던 금발 청년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졌다.
“...내가 누구냐고? 좋아 알려주지.”
“아서 멈춰! 멍청한 짓 하지마...!”
“내 이름은 아서 파이크.”
“...!”
“윈터플 영지의 소영주이자, 너희들이 욕보이는 아나긴의 친구다.”
자신의 정체를 묻는 주정뱅이의 물음에 금발의 청년은 깊게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젖혀 올리며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고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청년의 정체는 놀랍게도 행방불명으로 생사 소식을 알 수 없는 윈터플 영지의 소영주 아서였다.
“성으로 도착할 때까지는 정체를 숨겨야 한다고 말했잖아. 겨우 살려 놨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미안 레이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말이야.”
“젠장!”
갑작스레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아서의 행동에 그의 옆에 있던 한 여성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려 트리며 아서를 향해 싸늘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도 그럴 게 블루문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는 아서는 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정체를 숨기며 조심해야 했건만 그는 어리석게도 충동에 몸을 맡겨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멋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고오오.
슬금슬금.
적막이 흐르는 공간. 여관 안에 있는 몇몇 사내들이 아서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심상치가 않았는데 그들은 기척을 죽이며 자신들의 무기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아서. 네가 벌인 일이니까 네가 수습하도록 해.”
끄덕.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스릉.
“...!”
표독스러운 음성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내는 사내들을 향해 검을 뽑아 올려 보이며 검을 까닥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올 거면 빨리 와. 시간 없으니까.”
“죽여-!”
와장창창!
그 말과 동시에 아서를 노려보고 있던 사내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를 향해 무기를 쥐고 쏘아져 나갔다. 죽이겠다는 흉악한 살기가 자신을 향해 덮쳐왔지만, 그들을 마주 보는 아서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죽긴 누가 죽어?”
까득.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아서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아는 아나긴은 그 누구보다 독하게 살아왔다. 그런 그가 죽었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바다도 보지 못했다고...!”
꾸우욱!
철컥!
이런 마지막은 절대로 용납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아서는 자신의 분노를 검에 담아 휘둘렀다.
‘아나긴!’
서걱!
---
“......”
꿈틀.
“어?”
아서가 검에 분노를 담아 아나긴의 이름을 외치고 있을 때. 어두운 동굴 안에 처참한 몰골로 너부러져 있는 남자가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으으음...!”
“어어!? 우와! 의식이 돌아왔다! 할매 말이 맞았다. 역시 할매는 대단하다!”
화들짝!
마침 그의 상태를 보러 갔던 소년이 그 광경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닥에 너부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할매-! 할매-! 이리 와요”
폴짝폴짝.
“으으...”
부르르.
온몸이 검상과 푸른 멍으로 뒤덮여 살아도 산 게 아닌 산 송장이를 보며 분명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식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흥분한 기색으로 자신의 할머니를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소년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치며 소음을 일으키자 신음성을 내뱉던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내 힘겹게 눈을 뜨는 데 성공 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여기? 여기는 드라프다.”
“드라프? 이곳은...”
“대단하다 할매! 나도 할매처럼 위대한 영매가 될거다!”
폴짝폴짝!
“.....”
처음 들어보는 지명에 남자는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폴짝폴짝 뛰며 이상한 음을 흥얼거리면서 정신 사납게 구는 모자란 소년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 녀석! 아픈 사람 앞에서 뛰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더냐”
“할매!”
타다닥.
소년의 외침을 듣고 뒤늦게 동굴로 들어온 한 노파. 소녀는 그 노파를 향해 달려가 안겼다.
저벅저벅.
“정신을 차렸는가 젊은이.”
“당신은...?”
잠깐 되찾은 의식. 몸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고열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는 사이. 걸걸하지만, 어딘가 포근한 목소리에 의식이 흩어지려는 것을 느꼈지만 남자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고 낯선 이의 정체를 물었다.
“오올라프라고 부르거라.”
“오올라프...”
눈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천 마스크를 쓴 괴상한 노파를 향해 바라보던 남자는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당신 카이언인인가? 이곳은 어디고 왜 나를 살려줬지?”
“클클. 고생해서 살려줬더니 왜 살려줬냐 물어봐? 고얀 녀석이구나.”
“대답해.”
“마치 상처 입은 짐승 같구나.”
다 죽어가는 상태임에도 경계심을 보이는 남자의 태도에 오올라프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겨 그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상대방의 이름을 들었으면 자기 이름을 대는 게 예의라는 거다.”
덥석!
“윽! 뭐 하는 짓이지?”
“좀 더 자라는 거다. 아직은 깨어날 때가 아닌데 젊은 놈이 육신을 너무 혹사하는구나.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해. 클클클!”
“그게 무슨...”
“아이야 한숨 자려무나.”
“그만... 둬... 으.....”
자신의 두 눈 위로 손을 올리는 노파의 행동에 남자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노파는 그저 나른한 목소리로 영문모를 소리와 함께 요상한 음으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런 기이한 노파의 행동에 남자는 노파를 향해 그만두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그의 몸은 노파가 안겨다 주는 어둠과 나른한 감각에 자신을 맡기었다.
“......”
새근새근.
편안한 기색으로 아이처럼 잠에드는 남자를 보며 오올라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혹한 운명을 이어받은 아이야. 이 순간만큼은 푹 쉬어라.”
노파의 눈빛에는 가련한 아이를 바라보듯 애잔함과 안타까운 감정으로 가득하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한 소년조차 노파의 그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보기 드물 게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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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포르 영지】
어스랜드 대륙 중부와 북부지역을 잇는 교차점. 뱀의 머리를 가문의 문장으로 쓰는 드포르 영지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자하드 영주님. 그 들이 찾아왔습니다.”
“오오! 우리의 영웅들이 찾아왔는가?”
으적으적.
“.....”
호화로운 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길쭉한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식탁 맨 끝에 앉아있는 중년인이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마침 식사 중이었는데 자네들도 앉아서 들게나.”
“됐소.”
멈칫.
자신들을 향해 음식을 권유하는 영주의 말에 망설임 없이 거부를 표시하는 청년. 그런 그의 행동에 자하드 영주는 먹던 것을 멈추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롭. 자네는 참 이기적이군. 자네야 그렇다 치지만 자네와 함께 이 먼 곳까지 함께 고생해 온 부하들은 보이지 않는 건가?”
“저 멀리 형제들이 굶고 있는데 자신의 배만 채울 형제는 우리 중에 없소.”
“자네는 좋은 지도자 격이 아니군. 너무 고지식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자하드 영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찾아온 무리의 리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프레드릭 가문의 가언에 【욕망에 관대하라】는 말이 있지. 숭고한 이상을 바라보며 무작정 욕망을 억누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욕망이란 녀석은 충족시켜주지 않고 관대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그 이상을 잡아먹으려 들 테니 말이야. 조직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다면 내 마을 유념해두는 게 좋을걸세 롭.”
“우리의 욕망은 파이크 가문에 대한 피의 복수와 윈터플에서 자유를 되찾는 것뿐이오.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소.”
“어리석군. 애써 키운 조직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니 말이야.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야.”
“그 점이 그대의 마음에 들어 우리와 거래를 한 게 아닌가?”
“그건 그렇지. 자네들만 한 파트너는 좀처럼 없거든.”
윈터플 영지의 레지스탕스 조직인 『블루문』 수장인 롭 라즐리온의 말에 자하드 영주가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롭 라즐리온이 이끄는 블루문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파이크 가문을 이 세상에 지우고 카이언인들의 자유를 되찾는 것. 그것 말고는 그 어떠한 욕망을 보이지 않았기에 자하드 영주는 이들과의 거래를 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 아주 만족스러운 일을 해주었어. 흑기사 아나긴은 처단하고 베르닉 파이크 영주의 아들은 행방불명 상태로 만들다니 말이야. 자네들과 거래에 응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자네들을 지원할 생각이야.”
“그 말은...!”
“그래 자네가 그토록 원하는 피의 복수가 다가온 거지.”
“...!”
카이언인들이 파이크 가문을 증오하며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처럼 【드포르】영지의 영주 자하드 또한 파이크 가문과 양립할 수 없는 배경과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 4대가 아닌, 5대 공작가 였을 시절.
『파이크』 가문과 『프레드릭』 가문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관계였고 『파이크』가문이 좌전 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가문이 바로 프레드릭 가문이었으며, 북부지역으로 좌천된 파이크 가문이 다시 중앙대륙을 진출하기 위해선 프레드릭 가문을 뚫고 나가야 하는 지리적 위치에 놓여있어서 그 두 가문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후후후.”
‘베르닉 영주. 모든 건 그대가 자초한 일이니 너무 원망 말게.’
자신의 선언에 눈동자에 푸른 귀화를 머금으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카이언인들을 바라보며 자하드 영주는 미소를 짓다가 잠시 내려놓았던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올려 다시 식사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윈터플 영지는 자신이 썰고 있는 스테이크처럼 갈기갈기 찢길 거란 생각에 그의 나이프는 경쾌하게 움직여 간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