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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30화 (330/357)

330화

“드로프 마을?”

아나긴이 돌아왔다. 죽음을 딛고 윈터플 영지를 복귀한 아나긴이 제일 먼저 들어선 곳은 삭막하고 알 수 없는 황량함으로 가득한 베르닉 영주실. 행방불명 되고 죽었다고 알려진 자신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에게 상황보고를 위해서였다.

“네.”

“처음 들어보는 마을이군. 내 영지에 그런 마을이 있던가?”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 마을은 카이언인들에게 버림받은 존재들이 사는 촌락이니까요.”

“버림받은 존재라고?”

아나긴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당도한 곳은 드로프 불리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졌거나, 명예를 저버렸거나, 불길함을 상징하는 특징을 가진 카이언인들이 절벽 밑 강줄기에 버림받은 끝에 모여 사는 장소로 삼면이 높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은 카이언인들에게 숨겨진 일종의 유배지 같은 곳이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아나긴에게 듣고있던 베르닉 영주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혈육에 대한 애착이 강한 카이언인들도 하자가 있는 자식은 참지 못하는가 보군. 그나저나 참, 아이러니하구나. 아나긴 네가 그들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말이야.”

피식.

“너에게 문신을 새기지 않은 부모에게 고마워해야겠어.”

“…….”

“후후. 농이다만 표정을 보아하니 유쾌하지는 못한가 보구나.”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부정할 것 없다. 그만큼 뿌리라는 건 중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자신과 생김새가 전혀 다른 자식이 나왔음에도 카이언인들의 자식에 대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김새가 다르지만, 자신과 같은 문신을 새겨 자신의 혈육임을 각인하고 같은 문신 아래에 뭉친 혈족은 수세대의 생존해 나가며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몸에 새긴 문신은 자신들의 생존과 역사가 담긴 표식이었으며 그 표식을 이어받은 자신의 자식은 미래를 써 내려갈 새로운 역사였기에 그들은 자식을 사랑할 수 있었다.

“아나긴 너에게는 카이언인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가 없다.”

“가질 생각 없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과 가지지 않는 것은 다르지. 그 차이를 알 텐데?”

“그건…….”

꾹.

베르닉 영주의 말에 아나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나긴. 그에겐 뿌리가 없었다. 기억이 존재하는 어릴 적부터 그에겐 부모란 존재가 없었으며, 카이언인들 모두가 지니는 문신 또한 없었다. 그 덕분에 배척당해왔고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경험을 얻었다. 그렇기에 그는 카이언인들을 그리도 경멸하고 증오했다.

“그리 화내지 않아도 된다. 결국엔 너의 열등감은 곧 사라질 터이니.”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노하는 와중에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베르닉 영주의 말에 아나긴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너희들의 뿌리를 뽑아버릴 생각이다.”

“……!”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르닉 영주를 보며 아나긴은 오싹이는 감각을 맛보았다. 냉정해 보이지만 베르닉 영주의 두 눈에 뜨거운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선두엔 아나긴 네가 서 있을 것이다.”

베르닉 영주는 자신의 계획을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나긴의 두 눈동자는 큰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 * *

“아나긴!”

“아서. 네가 여길 왜?”

무거운 이야기가 끝이 나고 영주실 밖으로 나와 베르닉 영주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던 자신의 발걸음을 붙잡은 목소리에 아나긴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저벅저벅.

“왜긴 지금처럼 나 안 보고 가려는 거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지. 아나긴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안. 영주님의 명령이 있었다.”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뒤로하고 아버지부터 찾아가더니 이제는 바로 일을 하러 가려는 아나긴을 향해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렇지. 말 한마디도 안 하고 가려고 하다니. 내가 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면 그러면 안 되거든?”

“그랬냐? 미안하다.”

“참 내.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변한다고 하는데 아나긴 넌 어찌 된 게 여전히 딱딱하냐.”

“너야말로 물렁한 건 여전하네.”

“하하하.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실감이 간다. 네가 진짜 살아 돌아왔다는 게 말이야.”

“아아. 살아 돌아왔다.”

피식.

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친구가 뭐가 좋다고 그리 걱정하고 상심했는지 손해 막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서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 그 성격이 어떻든 아무렴 좋은 것이었다.

아서의 그런 진심이 느껴졌는지 아나긴의 표정이 온화해 졌다. 한없이 물렁하고 우유부단한 녀석인데 이 삭막한 곳에서 저런 따스함에 위로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나긴은 이런 따스함에 가까워 지면 안 됐기에 서둘러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 여자는 누구지?”

까닥.

마침 분위기 전환에 마침 좋은 소재가 있었다. 아서의 뒤에서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있었기에 아나긴은 그녀에 관해 물었다.

“아, 소개해줄게. 이쪽은 레이나라고 해. 그날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

“레이나?”

“응.”

힐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의 머릿결을 가지고 있는 건강미 넘치는 여인을 보며 아나긴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낯익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아나긴은 그 느낌을 무시하고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서에게 신경 쓰느라 몰랐었는데 이 여자 자세히 살펴보니 평범한 여자가 아닌 듯싶었다. 건강미 치고는 거친 기질이랄까? 레이나란 여성은 마치 사냥꾼이나 용병에 어울릴법한 기질을 띠고 있었다.

“…당신 카이언인?”

“맞아요. 역시 티가 나는가 보죠? 이리 단박에 맞추는 걸 보니 말이에요.”

“미묘하게 다르니까. 그나저나 문신은 어찌 된 거지?”

“저희 부족은 문신을 등에 새겨서 말이에요. 아쉽지만 보여줄 수는 없겠군요.”

“등에? 특이한 곳에 문신을 새기는 군. 어디 부족 출신이지?”

카이언인들이 문신을 새기는 부위는 보통 어깨나, 손목이나 손등같이 눈에 잘 드러나는 부위에다 하는데 레이나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카이언인은 처음 만나 보았다. 아나긴은 그답지 않게 카이언인데 대해 관심을 보여오기 시작하는데 레이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작은 부족이었던데다가 이젠 멸족해서 없어졌으니까.”

“그렇군. 혹시…….”

“아나긴!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실례야!”

“음. 그런가? 평범한 출신은 아니 보여서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레이나 내가 대신 사과할게. 원래 이 친구가 좀 딱딱한 친구라서 말이야 이해해줘.”

“그 흑기사잖아? 칼 안 뽑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

“…농담이지?”

“진심인데?”

“하하…….”

격식 없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서와 레이나를 바라보며 아나긴은 놀란 눈빛을 지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지금의 행동들은 과한 감이 있었다.

“좋지 않아. 두 사람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둬.”

“응? 아나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네가 저 여자를 은인이라 생각한다면 끝내라. 영주님 성격상 그냥 두고 볼 리 없어.”

“아나긴 너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뭐?”

아나긴의 말에 아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이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데 초를 치는 아나긴의 행동에 조금 부아가 치밀어 오른 까닭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굳이 끄집어내는 그 행동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아나긴 나는 아버지 눈치를 보는데 급급한 어린아이가 아니야. 다 내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

“생각이라고? 영주님께 네가 내놓은 카이언인 친화 정책을 믿고 그러는 거야?”

“오해하지마. 그 정책은 레이나 때문에 내놓은 게 아니야. 오히려 아나긴 너를 보고 생각했던 거지.”

“나를 보고?”

아나긴이 자신과 레이나를 바라보며 무언가 오해한 듯싶어 아서는 해명했지만, 오히려 아나긴의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그래. 카이언인들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다면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차별과 분노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단 말이야.”

“자리를 만들어? 잘도 그런 말을 쉽게 내뱉는구나… 아니,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내 책임도 있는 건가? 정말 지독한 일이야.”

“지독한 일이니라니… 아나긴 너 도대체 왜 그리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려 하는 거야?”

“하하. 부정적이라고? 곧 알게 될 거야. 아서.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지 말이야.”

“뭐?”

가벼워도 한없이 가벼운 그 어린 생각에 아나긴은 냉소적인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웃음에 아서의 표정이 일그러트렸지만, 아나긴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설마 이 모든 일이 사실은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니 정말로 얄궂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친구는 알까?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모르고 한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아서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의 어린 생각으로 내놓은 정책 때문에 흘릴 피를 생각하면

“오랜만에 봤는데 별로 좋지 못한 이야기만 나눴군. 이만 가보도록 할게.”

“아나긴. 이야기하다가 어디가?”

“서로 피곤해질 뿐이야. 그리고 저 여자와의 관계는 잘 생각해 보도록 해. 친구로서의 충고야.”

툭.

“아나긴…….”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며 스쳐 지나가는 아나긴을 아서는 결국 붙잡지 못했다. 이 이상 깊게 파고들면 왠지 모르게 후회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는데 심경이 복잡한지 아서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이젠 더는 순수하게 있지 못하겠구나 아서.”

중얼.

자신의 친구가 더는 순수하게 있을 수 없게 되었음에 아나긴은 입맛이 쓰기 그지없었다. 서로가 죽음을 딛고 돌아왔음에도 주변을 둘러싸는 현실은 더욱더 잔학한 상황으로 모는 느낌이 들었다.

저벅저벅.

* * *

컷!

“휴우~.”

표정 연기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잭 스미스가 컷 신호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번에는 괜찮았나 보지? 그냥 넘어가니 말이야.”

“하하. 뭐 이제는 그럭저럭하던데?”

“쳇. 잘난 척은……!”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겠지. 난 그럼 다음 촬영장 가본다. 남은 촬영도 잘 맞춰.”

“네네. ”

피식.

도경의 말에 잭 스미스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잭 스므시는 남몰래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 도경이 말한 대로 자신의 연기가 점점 늘고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성장이 가능한 거였구나.’

도경과 스캇의 활약. 그 안에 껴서 토할 것 같은 심한 부담감과 쫓기듯 조바심을 느끼는 나날들이 이어갔지만 희한하게도 그 와중에 연기가 늘고 있는 자신의 상태에 잭은 쓴웃음을 내지였다.

“저 녀석 때문인가?”

힐끔.

실력 상승에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도경 때문이라 잭은 생각했다. 분명 싸이코 같은 녀석인데 그와 연기를 맞출 때마다 기분 좋은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긴장감과 부담감은 도경과 연기하다 보면 실타래처럼 풀어헤쳐 지고 어느샌가 연기에 몸을 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한한 놈.’

도경은 정말로 특이했다. 종잡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 옆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기대게 되었다. 편안하고 듬직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잭은 잘 알 수 있었다.

“카일 좀 이따 봐!”

“참, 사인 좀 해줄 수 있겠어?”

“다음엔 기타 꼭 가져와. 노래 못 들으니까 허전하다.”

하하하.

보통이라면 아무 말 없이 다음 촬영장으로 배우를 보내는 사람들이 도경이 떠날 때는

짧아도 꼭 한마디씩 말을 던졌다.

“스태프들에게 인기가 많다더니. 그 소문이 정말이었네요. 다들 그를 좋아하는 게 표정에서 느껴져요.”

“뭐, 그렇죠. 묘하게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 녀석이 독특한 매력이 있는 거겠죠.”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거짓이 없달까? 본연 모습 그대로 사는 것 같아서 자연스레 눈이 가는 거 같아요.”

레이나의 역할을 연기했던 여배우 리즈가 잭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해 왔다. 오늘 촬영장에서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 자꾸만 눈이 갔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매우 부러운 일이네요.”

“네? 부러워요?”

“본연 그대로 산다는 건 마음 가는 대로 편히 산다는 거잖아요? 아마도 저 녀석은 고민 같은 거 안 하는 게 분명해요.”

“그래도 그렇지 고민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피식.

“글쎄요. 저 녀석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 녀석이 고민할 정도로 곤경에 처하는게 상상이 되요?”

“호호호.”

잭의 엉뚱한 말에 리즈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잭은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 완벽한 능력을 갖춘 사이코가 곤란에 처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봤으면 좋겠네.”

중얼.

* * *

Rrrrr!

“음? 사장님이네? 한국에서는 새벽인 시간인데 웬일이지?”

갸웃.

잭의 염원이 통한 것일까? 전동카트에 몸을 싣고 있던 도경을 향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왠지 받기 싫은 꺼림칙한 감각에 도경은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하기엔 오랫동안 전화가 울리고 있었기에 결국은 스마트폰을 받아들여 올렸다.

“여보세요?”

“박도경. 너 이게 진짜야!?”

“윽! 무슨 일이에요?”

“지금 난리 났어.”

“네?”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도경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이어지는 심각한 목소리에 도경의 표정 천천히 굳어져 간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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