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아나긴이 돌아온 윈터플 영지. 모두를 들썩이게 만드는 하나의 벽보가 붙었다.
『파이크 가(家)의 문장을 새기는 자. 농노가 아닌 영주민으로 받아들이리라.』
카이언인이 자기 부족의 문신을 버리고 파이크 가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면 그들을 정당한 영주민으로서, 파이크 가에서 공증하고 받아들이겠다는 파격적인 공지였는데 그 내용이 그야말로 파격적이기 그지없었다.
파이크 가문의 문양을 새긴 카이언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며, 높았던 세율을 감면하고, 능력에 따라 병사나 기사로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카이언인들 사이에 많은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녀석! 어떻게 부족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는 거냐! 미쳐버린 게야!?”
퍼억!
“윽! 아버지…….”
“여보! 진정해요. 몬티는 아직 어리잖아요. 충동에 저지른 실수 같은 걸 거예요. 본 사람도 많이 없을 테니 다시 부족의 문신을 덮으면…….”
“아니요! 어머니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몬티?”
“충동에 저지른 일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전 농노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아버지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말에 몬티는 반항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았다.
그저 몸에 새겨진 문신을 지우면 편히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분노하는 부모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몬티! 너만 편해지겠다고 형제들을 저버리겠다는 거냐?”
“저만 파이크 문양을 새겼다 생각하세요?”
“뭐?”
“잭, 블레이크, 타미, 조던, 머피. 모두들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아들 몬티의 말에 두 부모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들의 부족을 이끌어갈 유망한 젊은이들이 부족을 저버린 선택을 내리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동요를 할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결과가 일어날지는 생각도 못 했다.
“너희들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거냐? 베르닉 영주는 형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약속을 지킬 리 없단 말이다!”
“아버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요.”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번에 파이크 가문에서 영지 병사와 기사를 모집한대요. 그리고 이번에 카이언인들도 지원할 수 있고요.”
“설마 너희들……?”
“네. 우리는 그곳에 지원할 생각이에요.”
“그게 될성싶으냐? 그들이 정말로 너희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베르닉 영주가 자신들의 형제를 죽였던 괴로운 기억을 떠올린 몬티의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질책했지만, 자신의 아들 몬티는 흔들림 없었다.
“받아야 할 겁니다. 베르닉 영주는 우리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블루문의 등장으로 영지의 흔들리는 치안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영지 밖의 불안한 전운이 도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말이에요.”
“필요한 게 아니라. 너희들을 써먹겠다는 거다. 이용만 하다가 버려질 거야.”
“아버지 저희는 바보가 아니에요. 베르닉 영주가 순수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도 알고 그에게 의도가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이게 기회임은 틀림없어요. 저희가 바로 서서 힘을 얻을 기회 말이에요. 그가 우릴 이용한 만큼 우리도 대가를 얻어갈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무력으로서 영지에서 자리 잡아간다면 베르닉 영주도 우리를 그리 쉽게 버릴 수 없을거라고요.”
“몬티 너…….”
많은 생각이 담겨 있는 아들의 말에 몬티의 부모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들이 짧은 생각으로 저지른 충동이 아니라 충분히 숙고하고 고려해서 내린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몬티의 선택을 순수히 지지할 수는 없었다.
“몬티. 그래도 안 된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조상을, 명예를 저버리는 일은 무엇이 되었든 정당화할 수 없어.”
“아버지!”
뿌리를 중시하는 그들로선 몬티같은 청년들의 선택은 절대로 용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너무나 완고한 태도에 몬티가 갑갑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더욱더 큰 호통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얻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차라리 블루문에 투신하거라. 듣자하니 그들의 세력은……!”
“그만 좀 하세요! 그래 봤자 그들은 과거의 헛된 명예를 쫓는 레지스탕스일 뿐이에요! 그들이 정말로 베르닉 영주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만에 하나 쓰러트린다고 해도 그들이 가져오는 상황이 우리에게 더 좋을 거라 확신하냔 말이에요. 우리처럼 작은 부족 출신에게 말이에요!”
울분에 가득 찬 아들의 목소리에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같은 카이언인이라도 부족의 규모와 역사에 따라 은연중에 서열 같은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베르닉 영주가 나아요. 자기 아들을 죽을 뻔했음에도 카이언인들을 수용하려 하니까요.”
“몬티. 어떻게 그런 말을…….”
벌떡!
“됐어요. 애초에 아버지처럼 고리타분한 분이 저를 이해해 줄 거라고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꼴도 보기 싫은 자식 이만 나가 드리죠.”
“자, 잠깐! 몬티 어딜 가려는 게냐? 난 허락 못한다.”
“언젠가는 이해하실 거예요. 두 분 다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몬티!!”
그렇게 몬티는 부모의 곁을 떠나 파이크 성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벅저벅.
복잡한 제약이 존재하는 현실과 세대 간의 격차 속에 발생하는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부모와 자식이 찢어지는 가슴 아픈 광경이 펼쳐졌다.
문제는 광경은 몬티 집안의 한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힘과 기회를 잡으러 파이크 성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 카이언인 청년들이 부족을 등지고 떠나 파이크 성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 *
웅성웅성.
윈터플 영지의 주변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높은 지형에 자리 잡은 파이크 성. 그곳에 달린 깃발의 문양과 같은 문신을 새긴 수많은 청년들이 성문 앞에 모여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왔군…….”
“대단해……!”
무표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나긴과 그 반대로 고양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아서. 두 청년의 등장에 성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기 시작했다.
“후…….”
저벅저벅.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 그 가운데 아나긴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성문 가운데 놓여 있는 단상에 올라서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들을 말없이 맞이했다.
수많은 눈동자 다양한 감정들이 깃들어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비장함이 섞인 각오가, 어떤 이에게는 성공하겠다는 뜨거운 열망과 야망이, 어떤 이는 부족을 저버리고 왔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씁쓸함이 한데 공존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쉽지 않은 선택 다양한 사연을 품은 이들을 향해 아나긴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깟 문신을 지우고 덮었다고 진정 야만족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있다고 믿나?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신을 새긴다 해서 너희들이 더러운 야만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
발끈.
더러운 야만인. 크게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지만 성문 앞에 서있던 카이언인들 사이로 아나긴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악마 같은 새끼! 신은 왜 저 새끼를 살려 보낸 거지?’
‘역시 처음부터 욕 나오게 하는구나.’
까드득.
여기저기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카이언인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환영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어려운 선택을 한 모두를 모아놓고 일부러 모욕을 가하는 아나긴의 행동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너희 카이언인들은 야만족이다. 너희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부족의 역사와 전통은 그저 살인과 약탈을 통해 이룩한 것이며 베르닉 영주님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너희들끼리 이렇게 뭉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며 허울 뻔한 명예를 위해 아무런 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너희들의 본질이다.”
“당신이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우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흉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카이언인의 비판을 이어가는 아나긴의 말을 결국 참지 못했던 카이언인 한 명이 아나긴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던졌다.
“야만인이 아니라고? 너희들 역사상 평화 아래에서 하나로 묶인 적이 있는가? 너희들만의 왕국과 역사를 지은 적은? 누구한테나 자랑스럽게 내세울 문화를 향유한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말해봐라.”
“그건…….”
“단언컨대 없다.”
말문이 막혔다. 부족생활을 영위했던 카이언인들은 하나로 뭉쳐서 국가를 지은 적도 없었고 문화라는 고차원적인 적인 것을 가질 만큼 평화로운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모른다 생각하나?”
피식.
“이익!”
명백한 비웃음에 성벽 아래에 놓여진 카인언인들의 얼굴엔 모멸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분할뿐이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분노로 가득한 눈빛으로 아나긴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 눈빛 하나하나가 무겁고 살벌해서 심장이 떨리려 하지만 아나긴은 너무나 평온히 그들의 분노를 받아들였다.
“왜 나를 증오하지? 왜 너희는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지?”
“……!”
“왜!?”
무감정하고 냉정했던 목소리가 흐트러지며 감정을 띠기 시작한다. 차갑기만 했던 얼굴에 기이한 열기가 도사리기 시작했다.
“왜 너희는 무능한 조상을 욕을 하지 않는 거냐!!?”
쩌렁!
저들의 분노에 아무런 무게와 깊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누리지 못한 분노는 아나긴에게 있어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었다. 그것이 아나긴을 견딜 수 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너희 카인언인들을 뼛속 깊이 경멸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 너희들을 증오하며 미워한다. 그리고 그런 너희들에게 버림받은 내 자신을 끊임없이 혐오한다!”
스윽!
“헉!!?”
“저, 저건!”
술렁!
지독하기 그지없는 증오와 경멸을 내뱉으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아나긴이 자신의 두 눈을 쓸어 올리자 카이언인 들은 술렁이기 시작하며 큰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나긴의 두 눈에 푸른색의 광망이 강렬하게 일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보아라”
“……!”
“너희가 나를 버렸고 너희 스스로가 악몽이라 부르는 공포의 흑기사를 만들었다!”
자신의 상의를 거칠게 뜯어내는 아나긴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자신의 몸을 카이언인들에게 드러내며 외쳤다. 카이언인이 문신이 없는 자신을 몸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장애를 직접 선보이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 그런 아나긴의 행동에 카이언인들은 숨을 죽였다. 설마 그가 자신과 같은 카이언이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희들은 미개하다! 문신이 하나에 서로를 차별하고 믿지 못해 반목하며 그렇기에 부족이란 조그마한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지금의 윈터플을 지배하는 파이크 가문을 만들어 냈다.”
아나긴은 자신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며 그들이 생각한 만큼 자신들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가 말한 대로 미개한 야만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버림받은 내가 너희들의 위에 서 있고 나를 버렸던 너희가 내 아래에 놓여 있다! 인정하라! 너희들의 무능과 미개함을! 그리고 느끼어라! 너희들에게 버림받은 나를 품은 파이크 가문의 관용과 위대함을! 그러고 붙잡아라!”
휘익~ 꽉!
“너희들에게 앞에 놓여 있는 이 기회를!”
“……!”
두근!
아나긴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강하게 움켜쥐며 좌중을 향해 포효하듯 외쳤다.
“기회를 붙잡을 자! 미개한 야만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은 자! 스스로의 변화를 도모할 자들은 손을 높이 들어 올려라! 그리고 파이크 가(家)의 얼어붙은 심장을 뛰게 할 자는 소리 질러 증명하라!”
“……!”
두근두근!
그 누구보다 차가웠던 이가 지금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외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외침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열기로 후끈해지고 가슴안에 놓인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우……!”
꿈틀!
모두가 그 열기에 하나 되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수십 년을 지낸 지기인 아서도,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주변의 기사와 병사들도, 야만인이라 모욕당한 카이언인까지 빠짐없이 전부 아나긴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큰 소리를 내질렀다.
“우아아아아―!”
그것은 포효였다. 변화를 바라는 욕망이었으며 자신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힘찬 포효. 그 가운데에 아나긴은 어느새 평상시의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좌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아나긴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베르닉 영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나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구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나긴과 그 뒤에서 고양감에 소리를 내지르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베르닉 영주는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보인 후에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그 행동은 경의를 담은 의미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담긴 행동인지 그것은 오직 베르닉 영주만이 알 뿐이었다.
* * *
[왕좌의 길 최고의 명장면 탄생! 시청률 500만 돌파! 멈추지 않는 시청률의 행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고 미친 듯이 심장을 뛰게 했던 최고 명장면의 탄생은 왕좌의 길이 성공을 향해 다가섰다는 청신호였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왕좌의 길을 본 사람들은 이 장면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인터넷상에는 5분 남짓한 이 군중 신만을 짤라 여기저기 퍼 나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호기로 가득한 상황이었지만 고약하게도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행이 굴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성공을 이뤄내는 악마의 재능! 하지만 이미지는 곤두박질!]
[박도경 군 문제 관련 발언 아직도 깜깜무소식!]
[우리들의 일그러진 스타! 스타들의 방만한 특권의식 어디까지 용납되어야 하는가?]
[박도경 군 비리 관련 문제 고발하다!]
“하……!”
국민 스타에서 한순간에 대역 죄인처럼 죽일 놈이 된 자신의 기사들을 읽으며 도경은 허탈한 웃음을 내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지가 뒤바뀐 것처럼 자신이 한순간에 이리 내몰리게 된 게 너무나 어이없었으며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퍼져나가는 출처 없는 악의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
무적 같은 자신의 행보에 울려 퍼지는 크나큰 적신호의 신호음에 도경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