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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현대로 귀환하다-334화 (334/357)

334화

“그럴 리 없어…….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믿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질문했으니 대답해줬을 뿐이니.”

“닥쳐!”

오랜 세월 속에 폐허가 된 신전에서 한 남자의 절규 어린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려 퍼졌다.

“…….”

신전의 뚫린 천장 위로 보름달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두 남자. 아나긴과 롭 라즐리온이 피투성이가 된 처절한 몰골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주르륵

뚝뚝.

정적 속에서 검날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운데 아나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버지가 되기엔 당신은 젊잖아. 말이 안 되는 일이란 말이다.”

“라즐리온 혈통의 능력이다. 진혈을 잇는 첫째들의 축복이자 저주지. 후후. 너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축복이자 저주…….”

『너희 핏줄은 특별하지. 축복과 저주를 한 몸에 담고 있으니.』

‘이것을 말하는 거였나…….’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나긴은 롭 라즐리온의 말을 무작정 부정할 수 없었다. 드로프 마을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신비한 노파 오올라프가 그와 똑같은 말을 자신에게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비틀!

죽고 죽이려는 사투 끝에 밝혀지는 잔혹한 진실에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나긴은 롭 라즐리온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순간에 보였던 잠깐의 머뭇거림.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검을 휘둘러 베어낸 등에서 드러난 눈에 익은 푸른 문신은 모두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내가 당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그게 중요한가. 나는 너에게 패배했고 너는 나에게 이겼다. 그 이외의 것들은 중요치 않다.”

“웃기지 마……. 중요치 않다면서 그 순간에 왜 머뭇거렸지?”

롭 라즐리온의 무심한 말에 아나긴은 표정을 일그러트려 보였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치 않게 여겼다면 지금 무릎을 꿇는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아나긴은 잘 알고 있었다.

“무얼 기대하지?”

“뭐라고?”

“헛된 생각하지 말아라. 흑기사여. 내가 너에게 진실을 밝히는 이유는 패배자로서 너를 괴롭히기 위함이지. 부정(父情)을 줄 생각은 없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저주다. 일평생을 부모를 죽 죄책감에 시달릴 저주.”

스윽.

“내가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 그게 당신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는가?”

파르르.

롭 라즐리온을 말에 아나긴은 울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자신은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아니,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가 죽는다는 결말은 바뀌지 않는데 말이다. 자신의

“글쎄.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으니…….”

피식.

“그건 지금 보면 알게 되겠지.”

덥석!

“……!?”

자신이 쥐고 있던 검으로 부지불식간에 몸을 던지는 롭 라즈리온의 행동에 아나긴의 두 눈이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푸우욱―!

“큭!”

“무슨!?”

울컥.

익숙했지만 너무나 소름 끼치는 감촉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을 진저리가 날 정도로 많이 베어본 자신이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후후. 제아무리 흑기사라도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군.”

스르륵.

“아…….”

풀썩.

미소와 함께 피를 울컥 게워내며 쓰러지는 롭 라즐리온을 보며 아나긴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어 그를 받치었다. 그 덕에 롭 라즐리온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아나긴은 그 순간 자신이 그의 말대로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깨닫고 말았다.

욱신욱신.

‘놓아야 해.’

그를 지탱하는 손을 놓아야 했다. 자신의 품 안에 안긴 롭 라즐리온을 밀어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말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아나긴의 몸은 석상처럼 굳어 움직일지 몰랐다.

“아무래도 나의 승리인 듯싶군.”

쿨럭쿨럭.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터트리는 롭 라즐리온을 보며 아나긴은 체념한 듯 괴로움이 묻어나는 심경을 담아 물었다. 자식을 일평생 죄책감을 안기기 위해 자식에게 죽는 부모라니 정말 잔인하고 지독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도 자신이 밉고 원망스러웠던 것일까?

“이래야만 네가 살아갈 테니까.”

움찔.

“뭐?”

하지만 이어지는 롭 라즐리온의 대답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쉬이 죽지 마라. 흑기사여. 너는 평생을 자책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삶을 이어가라…….”

“당신. 설마……!?”

욱씬욱씬.

“살아라.”

“……!?”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아나긴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상에는 상상도 못 할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그 어떠한 상처를 받아도…….”

“그만……!”

“발버둥 치며 살아라.”

“그만하라고!”

“그렇게…….”

힘겹게 말을 이어가며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는 롭 라즐리온을 보며 아나긴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만하라 외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아나긴에게 저주를 남기었다.

“살아가는 거다…….”

스으윽.

“으…….”

털썩.

서서히 무거워지는 그의 죽어가는 체중에 결국 아나긴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보다 그의 지독한 거짓말이 더욱 그를 괴로움에 빠트리고 말았다.

“으아아―!”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거짓말쟁이. 아나긴은 그를 향해 절규를 터트렸다.

* * *

컷!

“…….”

무거운 정적을 유지한 수 십명의 스태프들은 환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힘껏 큰 박수 세례를 보내고 싶었지만, 스태프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두 배우가 연기의 여운을 즐기며 감정을 추스릴 시간을 배려해주었다.

‘후…….’

도경과 스캇을 바라보며 맥 클라우드 감독은 헤드셋을 벗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친 짓을 했어.’

작중에서 서로 대립하며 끝없이 전투를 벌였던 아나긴과 롭 라즐리온의 최후의 사투는 그의 디렉팅 아래에 그야말로 고문과도 같은 과정을 겪으며 촬영되었는데 그 스스로가 너무했다고 생각할 만큼 난이도가 괴랄하기 그지없었다.

격렬한 액션 신은 물론 짙은 감정 신까지 요구하는 이 장면에서 원테이크 기법으로 여러 각도별로 3일 동안 재촬영한 횟수만 무려 183회. 그야말로 버텨준 게 기적 같은 일이나 다름없어 두 배우를 바라보며 맥 클라우드 감독은 미안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스윽.

“스캇 이젠 일어나자.”

“아……. 뭐야 도경. 죽을 둥 살 둥 촬영했는데 이 여운을 좀 즐기자고.”

“나도 아는데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진짜 사람도 아니야. 넌.”

“미안”

“뭐, 그래도 네가 제일 고생 많이 했으니까.”

덥석.

제일 먼저 감정을 정리하고 정적을 깬 사람은 숨 막히는 절규를 보여줬던 도경이었다. 가장 격정적인 연기를 펼쳤음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누워있는 스캇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요구했고 스캇은 그런 도경을 보며 투덜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그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운을 방해하는 상대에게 원래라면 짜증을 낼법했지만 스캇은 도경에게 그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촬영하면서 자신의 일방적인 NG 공세에도 짜증 하나 내지 않고 웃으며 재촬영해준 도경에게 짜증을 내다니 스캇으로선 절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와아아!

짝짝짝짝!

전우애랄까? 두 사람의 끈끈한 모습에 스태프들은 참았던 환호성과 박수를 내보내며 그 둘에게 다가가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하나 포착되었다. 평소라면 모두의 환호성과 박수를 오랫동안 즐길 도경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제일 먼저 촬영장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매정한 놈. 뒤풀이도 없이 꼭 오늘 떠났어야 했냐?”

“내 사정 알잖아. 미안하지만 나중에 보자. 뭐, 곧바로 영화 크랭크인 들어갈 네가 시간이 나야겠지만 말이야.”

“웃기시네. 연락하면 어떻게든 시간 낼 거니까 연락이나 잊지 마.”

“하하. 알았어. 그럼 이만 나 볼게.”

“그래 가라. 매정한 놈아!”

“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떠나는 도경을 보며 스캇이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을 드러내며 볼멘 목소리를 내뱉었다.

“진짜 서운하네. 도대체 무슨 볼일이기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거야?”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이해해라.”

“네? 그럴만한 사정이요? 감독님은 도경이 뭐 때문에 저리 가는지 아세요? 아무리 물어봐도 중요한 볼일이라고만 말하지. 저한테는 말 안 해주던데…….”

“들으면 네가 미안해할 텐데 말해줄 수 있나.”

“네? 그게 무슨……?”

3일 동안 함께 고생하며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 스캇으로선 내심 야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내 그 말을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맥 클라우드 감독의 대답에 그의 두 눈은 커지기 시작했다.

* * *

LA 공항.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도경을 향해 크리스틴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강행군을 마친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가시다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아. 지금도 너무 늦게 가는 감이 있어.”

“그래도 그렇지…….”

“걱정 마.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할 테니까.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만 말해도 소용없어 보이네요. 조심히 다녀오시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고마워. 그럼 다녀올게.”

“아…….”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이 되니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심하다 싶은 강행군이었다. 체력 좋기로 유명한 스캇과 도경이 말없이 틈틈히 휴식을 취할 만큼 격렬한 스케줄과 액션 신을 소화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는데 끝나자마자 한걸음에 공항으로 달려가는 도경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조급해하고 서두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악재는 하나씩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하필 가족에게까지 일이 생기다니.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검색대를 통과하는 도경을 보며 크리스틴은 그저 그가 무탈이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길 빌었지만, 그녀는 이 당시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도경이 한국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말이다.

* * *

저벅저벅.

휙.

검색대를 통과하고 제일 먼저 핸드폰을 집은 도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자신들의 물품을 챙겨 한 번 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바쁘게 걸음을 옮겨도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조바심을 풀지 않으면 성질이 뻗쳐 몸에 열이 올랐다.

Rrrr.

딸칵.

『출발하나 보군.』

“늦게 받았어.”

『볼일 보는 중이었다. 그래 한국에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전화를 받는소리와 함께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도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늦게 받았을 뿐이지만 조바심을 별로

“지금 가면 14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 도착하자마자 바로 쓸 수 있게 자료 준비해줘.”

『뭐? 도착하자마자 바로 터트릴 생각인가?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 싶은데. 사전준비나 리허설은 필요하지 않겠어?』

“됐어. 그런 거 가지고 리허설은 무슨 리허설이야? 자료만 주면 알아서 내가 터트려 줄 테니까. 당신은 문제없이 자료나 준비나 해줘.”

『평상시란 다르게 조바심을 내는 군. 네 사정은 알겠지만 이건…』

“가족이 조리돌림 당하면 누구라도 조바심을 내.”

『…….』

도경의 상태에 김강한이 우려를 표했지만, 도경은 그의 그런 걱정을 거칠게 떨쳐내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날 믿어. 당신을 실망 시키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알았다.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해두지.』

“부탁할게.”

뚝.

전화를 끊은 도경은 자신의 좌석에 앉아 비행기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창밖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화려하게 저질러 주마. 그리고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으드득.

“내 가족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너무나 길었던 기다림. 그 기다림 끝에 도경은 드디어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자신을 물타기에 이용하기 위해 액받이로 사용하고 건드리면 안 될 자들을 건드렸던 오만한 자들에게 보여줄 것이었다.

후우우웅―!

높이 날아오르는 비행기. 액운을 담았던 액받이가 재앙이 되어 한국으로 빠른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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