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혜화. 대학가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도경의 소극장. 그곳에 도경의 초대를 받았던 지인들이 모여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자리에 온 멤버들이 상당히 놀라웠다.
『은하수』 멤버는 물론 그가 프로듀싱한 『탑텐이(Top.10 Project)』들을 시작으로 도경이 MC를 맡았던 『아이돌 현장』에서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아이돌 멤버들까지. 이건 시사회가 아니라 하나의 음악방송 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구성원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두두둥-!
“와 드디어 시작인가? 이젠 노래만 들어도 가슴이 뛰네.”
“하하. 나도 그래. 근데 기분 이상하지 않아? 드라마의 출현 인물이 앞에 있잖아.”
“아니 보통 자신이 나온 드라마를 시사회를 해? 나도 사차원이긴 한데 진짜 저 형 똘기는 이길 수 없다.”
“팝콘 맛있다.”
우적우적.
“지금 그거 3통째 아니야? 숙소 가면 팝콘 기계 사줄테니까 그만 좀 먹어라.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
“콜. 약속했다.”
“아, 큰일 났다. 나 술 많이 마신 듯. 졸리기 시작한다.”
“드라마 보는데 이 사람들 앞에서 너 코 골면 나 바로 손절한다.”
왕좌의 길 마지막 에피소드를 기리기 위한 시사회기도 하면서 파티이기도 한 자리. 도경이 준비한 먹거리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던 이들은 현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왼손에는 팝콘을, 오른손엔 콜라를 들며 왕좌의 길의 오프닝을 보고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얼굴 표정에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봐봐요. 다들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요. 고생한 보람이 있죠?”
“납득은 가지 않지만 그러네…….”
팝콘 기계와 음료 기계를 가져와 설치는 물론. 각종 먹거리까지 같이 준비하며 자신이 했던 고생을 떠올리자니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많이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도경의 말대로 보람은 있었기에 박진용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 넌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니까.”
“쉿. 드라마 시작한다. 기대해도 좋아요. 이번 에피소드는 형이 아주 많이 놀랄 에피소드니까.”
“그러셔요.”
도경의 마이페이스에 이제는 체념했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젓는 박진용은 골치 아픈 생각들을 버리고 극장에 비추는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 *
【왕좌의 길-(Finale)】
“…….”
환한 달빛이 아래에 놓여있는 수련장. 그리고 그곳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나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긴. 거기서 뭐 해?”
“생각 좀 하고 있었다. 아서 너야말로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지? 설마……?”
“맞아. 레이나에게 가는 길이야.”
“…영주님이 알면 노하실 거다.”
“알아. 아는데…….”
“물러터지다 못해 미련한 놈. 첩자에게 속은 것도 모자라 마음 까지 빼앗기고 정말 잘하는 짓이야.”
“뭐, 그렇지. 하하. 그녀가 첩자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니까.”
“웃음이 나오냐? 분명 내가 그 여자 수상하다고 경고했을 텐데?”
“뭐, 어쩌겠어. 속은 놈이 바보지.”
블루문의 수장인 롭 라즐리온의 잘린 머리를 들고 온 아나긴을 보며 구심점을 잃은 블루문은 손쉽게 와해 되었다. 그들과 연관된 모든 잔당들은 현재 감옥 안에서 수감 중이었는데 그중에 아서 파이크의 생명의 은인이자 사랑의 여인이었던 레이나 또한 포함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보러 가는 거냐?”
“아나긴 너도 나중에 사랑을 알게 된다면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더라. 난 그녀를 사랑해.”
“하, 내일모레면 프레드릭 가문의 여식과 결혼할 놈이 잘도 그런 말을 내뱉는구나.”
“정략결혼인 거 알잖아. 내가 얌전히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레이나가 살 수 있어. 그걸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감당할 수 있고 말이야.”
“사랑의 힘이라는 거냐? 구역질 나는 군…….”
“하하하. 역시 아나긴 너는 혹독하다니까.”
“웃지 말고 당장 꺼져라. 더는 네 얼빠진 낯짝은 보고 싶지 않아.”
“레이나 만나러 가는걸. 말리지 않아서 고마워 아나긴.”
씨익.
“…….”
힘이 없지만 그런데도 맑음을 띠는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기는 아서의 모습에 아나긴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냐?”
어떻게 저리도 자신의 감정에 순수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버지에게 구속당하고 억압당하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놈이 자신을 기만하고 속인 여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그 모습에 아나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서. 너는 정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중얼.
그 수많은 사건을 겪고도 괴로움 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은 채 성장해 나가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아나긴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속 한 편에 깊게 억눌러 놓았던 어두운 감정을 일렁이는 것을 느끼다가 이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질투한다고 내가? 이제 와서?’
멈칫.
현재 아나긴은 레지스탕스인 블루문과 그들과 협력했던 프레드릭 가문의 불순분자들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윈터플 영지의 기사단장이 되는 영광을 누리며 자신만의 기사단을 가졌건만 그에겐 그 어떠한 성취감이나 기쁨이 존재치 않았다.
아나긴에게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잔인한 현실과 자기혐오와 괴로움으로 얼룩진 어두운 감정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와중에 질투심을 느끼다니 아나긴은 자신의 감정에 당혹스러운지 쉼 없이 두 눈을 떨고 있었다.
“나는…….”
* * *
“와. 진짜 저런 내적 연기도 잘하는구나.”
“아니 진짜 저렇게 연기까지 잘하는 건 반칙 아니야?”
“도경 오빠 멋있다.”
“진짜 동일인 맞아? 도경 오빠 쌍둥이 있는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동일인물이라는게 실감이 안가.”
마지막 말을 삼키며 하늘을 바라보는 도경의 연기에 소극장에서 드라마를 지켜보던 몇몇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껏 강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막판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보여주는 그 섬세한 연기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보통 아는 사람이 펼치는 연기를 보면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알기에 몰입이 되지 않지만, 어찌 된 게 도경이 펼치는 연기는 그저 넋 놓고 보게 된다.
“이야. 저런 연기가 진짜 어려운 건데…….”
소극장 안에서 가장 감탄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진용 대표. 좀 전까지만 해도 헤드락을 걸고 엎치락뒤치락했던 놈이 저런 연기를 선보이니 도저히 안 놀래야 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박진용의 감탄사를 옆에서 듣던 도경의 대답이 더욱 가관이었다.
“아, 저 부분은 힘들었죠. 저 컷에만 NG를 5번이나 냈거든요.”
“5번이나……? 도경이 너 보통 한 신에 NG를 얼마나 내냐?”
“글쎄요. 세보질 않아서요. 굳이 따지자면 많아야 2번 정도? 아, 물론 상대에 따라서 나오거나 제가 일부러 NG를 낸 것은 빼고요.”
“한 컷이 아니라 한 신? 그럼 거의 NG를 안 낸다는 소리잖아? 뭐, 그런 괴물 같은……. 아니, 잠깐만 왜 일부러 NG를 내?”
보통 한 신(Scene), 한 컷(Shot)에 수십 번의 NG를 내는 배우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안다면 도경의 대답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봐왔던 드라마의 모든 연기가 거의 다 한 번에 찍은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쉿. 드라마에 집중해요. 얼마 안 있으면 클라이맥스로 갈테니까.”
“으, 응.”
도경의 말에 박진용은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이내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경의 말대로 드라마의 내용 전개가 가속이 붙기 시작하더니 쉴 틈 없이 척척 스스로 뿌려진 조각을 맞추어 가며 클라이맥스로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 봐. 레이나한테 한 고백 완전 설레지 않냐?”
“미친! 그럼 처음부터 전부 서로 짜고 친 거라고? 두 영주들 완전히 미친 거 아니냐?”
“베르닉 영주는 블루문을 이용해 영지 내의 반동분자들을 한 번에 쓸어 버리는 한편 아나긴을 구심점으로 이용해 젊은 카이어인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모으고, 자하드 영주는 자신의 권력을 노리는 방계를 다 쳐버린 거네……. 권력과 힘 앞엔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더니 모두가 두 영주한테 완벽하게 놀아났네.”
“소름…….”
레이나를 향한 순애보 적인 사랑표현을 하는 아서의 모습에서 여성들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으며, 윈터플 영지에서 등장한 레지스탕스 조직과 그 안에서 벌어졌던 영지 간의 내전들이 사실은 자신들의 영지 안의 불순분자를 걸러내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베르닉 파이크』영주와 『자하드』영주가 서로 손 잡고 계획한 합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원래 13편 분량에서 10편으로 분량을 줄인 만큼 지금 마지막 한 편의 에피소드에 많은 것들이 농축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도저히 눈을 떼기조차 아까울 만큼 드라마는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피날레 장면에서 모두는 할 말을 잃고 만다.
* * *
【결혼식(Finale Scene)】
오늘은 윈터플 영지에서 특별하고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파이크』 가문 아들 아서 파이크와 『프레드릭』 가문의 장녀인 샤이아였다.
수십 년간 원수지간 사이였던 두 가문이 원한을 풀고 서로의 힘을 합치는 기념비적인 일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하.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순간입니다. 둘이 저리 세워두니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안 그렇소? 베르닉 영주?”
“그렇군. 우리들의 관계도 저리 어울려야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지. 자하드 영주.”
“하하하. 맡겨 주시오. 야만족 전사들과 용병들을 통솔한 파이크 가문의 무력과 우리 프레드릭 가문의 황금과 지력이라면 앞으로 펼쳐질 전쟁에 우리를 막을 이들은 없을 거요. 장성한 아들이 없는 게 이리 복으로 돌아오는군.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소.”
“그거 든든하군.”
피식.
앞으로 대륙에 벌어질 대영주들의 전쟁을 앞두고 서로의 이해과정 속에 취약점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며 마지막으로 서로의 강점을 합한 두 가문의 영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런 두 영주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나긴은 은밀히 결혼식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결혼식인 만큼 그 자리에 누구도 자리를 벗어나는 아나긴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 발걸음이 피의 결혼식의 서막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뚜벅뚜벅.
“아나긴 단장님? 이곳은 왜?”
“한스. 네가 오늘 당번이었구나…….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다는데 안타까운 일이야.”
“네? 단장님?”
“잠깐! 한스 뒤를 봐!”
“뭐?”
결혼식을 몰래 빠져나와서 아나긴이 당도한 곳은 영지 성내의 감옥 앞.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 중에 낯익은 자가 말을 걸어오자 아나긴이 평소와 달리 그와 눈을 마주치며 아는 체했는데 이내 동료의 외침에 한스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나긴의 뒤로 펼쳐지는 어둠 속에 푸른 안광을 일렁이는 살벌한 존재들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반, 반란이야! 야만족들이 반란을 일으키……!”
휘익! 푹!
“끅!”
“히익!”
“야만족이라니…….”
어디선가 날라오는 화살에 가슴에 맞고 쓰러진 자신의 동료를 보며 한스는 기겁 성을 내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나긴을 바라보았다.
“듣는 야만족의 기분이 다 나빠지는데 말조심해야지. 안 그래?”
스르릉.
“……!”
“죽여.”
서거걱!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나긴과 그 뒤로 푸른 안광을 일렁이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악귀들의 모습은 꿈에서나 봐도 두려울 그 광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한스 그런 악몽을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가져간다.
“가지.”
데구르르 툭!
저벅저벅.
자신의 발치 아래에 충격에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는 한스의 머리통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걷어차며 발걸음을 옮기는 아나긴. 그와 동시에 그를 뒤 쫓는 발걸음과 함께 하나의 음악이 틀어졌다.
띵. 띵. 띠링! 툭! 타다닥.
가볍게 울려 퍼지며 귀를 간지럽히는 현란하고 독특한 사운드. 그리고 그음들은 진한 소울을 머금으며 강렬하게 퍼지기 시작하고 드라마 영상은 그 음악에 힘입어 독특한 텐션을 유지하며 특유의 속도로 나아갔다.
[Yeah-! 네 말이 맞아 세상에 치울 게 많아.]
“……!!!”
『Be a Man』
도입부부터 모두의 귀를 사로잡는 도경의 목소리. 그렇다. 드라마의 피날레 신과 함께 등장한 도경의 첫 신곡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 * *
[돈, 명예, 권력으로 으스대는 쓸데없는 놈들로 넘쳐나.
정말로 거추장스러운 것투성이야. 난 숨을 쉴수 없어.
나에겐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서거걱!
휘익! 푹!
화르륵-!
[Yeah-! 네 말이 맞아 세상에 치울 게 많아.]
“크아아악!”
감각적으로 버무려진 컨트리 멜로디와 힙합 트랙의 독특한 조합 속에서 울려 퍼지는 도경의 노랫소리가 드라마에 겹치자 비장한 살육 신은 모두의 마초 신경을 자극하고 묘한 흥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으로 마법처럼 변모하였다.
[착하거나 나쁜 놈이 될 생각은 없어.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치우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두두둥 탁!
이 독특하기 그지없는 노랫소리에 소극장에 있는 모두가 직업이 가수인 만큼 빠르게 반응을 보여왔다.
‘이거 도경이 형 목소리 맞지? 게다가 싱잉랩? 와 이젠 도경이 형이 랩까지 하는구나.’
‘컨트리에 싱잉랩이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괴랄한 조합이야? 그런데 너무 좋아……!’
‘미국 드라마에도 자기 노래를 집어넣는구나. 우리 사부 수완은 진짜 미쳤다니까.’
‘곡 진짜 어떻게 만드는 거지? 미친거 아니야!?’
모두가 놀라움에 가득한 채로 드라마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박진용은 어버버 거리며 옆에 있는 도경을 돌아보았다.
“도경아 이건……!”
“놀랠 거라고 했잖아요? 그때 그 곡이에요. 어때요? 서프라이즈 마음에 들어요? 오늘 고생한 보람 있죠?”
“이 또라이 새끼……! 그래그래! 대박 좋다. 이런 거라면 언제든지 고생해줄 수 있어.”
바쁜 자신을 기어코 이 자리에 부른 도경의 행동을 뒤늦게 이해한 박진용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미친 집중력을 발휘해 드라마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음악과 드라마 영상이 어찌나 찰떡같이 맛깔나게 잘 어울리는지. 온몸에 소름이 끼쳐오며 희열을 안겨 왔다.
‘하하하. 아직 그게 끝이 아닌데……. 뮤직비디오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네.’
더 기쁜 소식도 있었건만 도경은 애써 뮤직 비디오 건에 대해서 박진용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야기한다면 드라마 보는 와중에 기쁨을 주체못하고 소리지를 것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따라와.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해줄게.
신선한 바람이 되어줄게.]
늑대의 우두머리처럼 카이언인들을 이끌며 피의 길을 그려나가는 아나긴의 모습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난 영웅도 악당도 될 생각이 없어.
될 생각도 없고 될 필요 없지.
그저 자신의 행동에 책임만 지면 돼.
난 그저 그런 남자야.
그리고 바람이 될 남자야.]
쾅!
휙! 끼이이익-!
귓가에 흘려 들어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카타르시스. 그와 동시에 결혼식장 굳게 닥쳐있던 대문을 걷어차며 등장한 아나긴은 베르닉 영주를 향해 거침없이 활시위를 겨누며 당기었다.
[그게 바로 나야.]
“죽어.”
퉁!
쇄애애액!!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활시위에 손을 떼어 베르닉 영주에게 화살을 쏘아 보낸 아나긴에 행동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애증의 관계 속에 그 어떠한 서사도 가지지 않고 베르닉 영주와의 관계를 끝내려는 도경의 행동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
“……!!!”
하지만 그 덕분에 왕좌의 길은 그 어떠한 드라마보다도 강렬한 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미국 시청률 810만, 한국 시청률 43%.]
[빌보드 차트 HOT100 1위 『Be a Man』]
[HC Films! 차세대 동양 히어로로 박도경 전격 캐스팅!]
[모두에게 러브 콜을 받는 최고 인기 글로벌 프로듀서 카일(Kyle)!]
이 엄청난 결과물들이 화살을 하나 쏘아 보낸 한 장면으로 이룩한 것이니 말 다 한 것이었다.
* * *
모두가 충격에 드라마의 엔딩의 여운에 젖어있을 때. 소극장에 뒤늦게 나타난 두 남자 중 한 명이 그 광경을 보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아~ 이런! 재미난 부분은 다 놓쳐버렸잖아요. 이게 다 강한 씨 때문이에요. 책임져요.”
“중요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직접 사과드리겠습니다. 카심.”
“사과까지야……. 그냥 투정 한번 부려본 거예요. 일인데 어쩔 수 없는 거 저도 알아요. 그리고 뭐, 괜찮아요. 저는 저것보다 재미난 것을 도경이 삼촌과 함께할 거니까요.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거예요.”
“즐거운 시간이라. 과연 그들은 즐거울지 의문이군요.”
“후후. 당연히 그들은 후회해야죠. 감히 푼돈으로 우리 삼촌을 건드리려 했으니 말이에요.”
뒤늦게 도착한 초대객들의 정체는 재벌가들 사이에서 화자 되고 있는 아랍 왕족 카심과 사이비 교단의 에덴을 뒤쫓고 있는 김강한. 그 둘이 함께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 둘이 나누는 대화는 더욱더 심상치 않았다.
“강한 씨. 이 나라는 곧 많은 것들이 바뀔 겁니다.”
“그럴 것 같군요…….”
20대 청년이 하기에 너무나 허황한 소리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김강한은 정말로 그 청년 말대로 한국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수긍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무대 위에 올라선 도경을 향해 삼촌이라 부르며 두 손을 크게 붕붕 흔들며 지나친 반가움과 표시하는 기이한 아랍 왕자의 존재라면 그것이 분명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막힌 상황이지만 뭐, 나쁘지 않나?’
그야말로 말이 되지 않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상황이었지만 김강한은 이러한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갑갑한 현실에 이러한 코미디는 용납해 줄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중얼.
“네? 뭐라고 했어요? 강한 씨?”
“아닙니다. 그나저나 도경 씨가 카심 님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인사를 보내고 있군요.”
“네!? 정말요? 도경이 삼촌!”
뒤늦게 자신에게 보내는 도경의 인사를 발견한 카심이 호들갑 떨며 기뻐하는 모습에 김강한은 그답지 않게 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가진 아랍 왕족이 고작 살짝 보인 손 인사에 이리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정말 재밌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