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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화 (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화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우레 같은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자, 말고삐를 잡은 구굉이 환하게 외쳤다.

“장단부사! 오셨소이까!”

구굉의 환대와 함께 무장이 어둠을 헤치고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외다!”

중후한 목소리였다.

반정 때 등장할 장단부사라면, 이서李曙밖에 없지.

능양군과 함께 반정을 일으켰으나 인조에게는 마지막까지 충성했던 자.

구굉과 짧은 인사를 나눈 그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숙였다.

“상황이 급해 예를 다 갖추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아, 아닙니다.”

목구멍을 쥐어짜서야 겨우 대답이 나왔다. 그런 나를 대신해 구굉이 대화를 이어갔다.

“부사, 서둘러 다른 의병들과 합류합시다. 다들 절박한 마음으로 공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겠구려. 다들, 대감을 옹위해라!”

구굉과 이서의 군사는 마치 물줄기 섞이듯 하나가 되었으며, 함께 어딘가로 나아갔다.

그동안 장단부사 이서가 곁으로 다가와 사람 좋은 인상을 지었다.

“제가 출발할 때만 해도 바람이 불고 안개가 심했는데, 거사가 시작되니 구름이 걷혔습니다.”

이서는 보라는 듯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드니 과연 구름 사이로 달빛이 창연했다.

이서가 호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늘도 이 거사를 돕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에 나 역시 쓰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긴장한 게 다 보이나 보는군.’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 이유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겠지.

그 마음은 고마웠으나 내가 긴장한 이유는 반란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자려고 방에서 눈 좀 붙였는데 이 지경이 되어서지.’

이유가 어떻건,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건 맞다.

정신 차려야 한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던가?

호들갑 떨어서 좋을 건 없었다.

각오를 다지면서 호흡을 조절하니 긴장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부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지요?”

이서가 씨익 웃었다.

그와 구굉의 안도를 받으며 민가 사이를 계속 나아가니, 또 새로운 무리가 우르르 다가왔다.

말을 탄 소수 너머로 무수한 창검이 반짝였다.

“대감!”

선두의 일행들이 나를 반겼지만, 그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인사마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양편 사이에서 오가는 자잘한 잡담에 귀를 기울였다.

얼굴은 몰라도 누가 반정에 참여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작은 단서로도 신상을 구별할 수 있었다.

‘……한 놈은 주둥이 꾹 닫은 채로 고까운 티만 내고 있지만, 어차피 이괄李适일 테고.’

뒤늦게 합류한 김류金瑬에게 반정군 지휘권을 빼앗긴 탓이다.

나중에 저지를 짓을 생각하면 위험한 인물이지.

‘대놓고 자기 이름이 박힌 이괄의 난을 일으키는 사람이니까.’

그 이외에도 몇 사람을 식별했으나 오가는 잡담은 인사치레로 그쳤다.

반정을 일으킨 와중이다.

또 한 무리 병력이 합세하면서 나의 좌우로 동행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감의 곁에 서게 되었으니 소관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내게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은 자는 김류다.

한평생 기회주의적인 행보만 보였던 자.

일을 벌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감당하는 재주는 없어서, 반정의 주모자이면서도 고변이 들어가자 반정군 합류에 미적거렸던 소인배이기도 했다.

신임하거나 신용할 인물은 아니지.

하지만 이미 반정이 시작된 마당에 나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사람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이 사람이야말로 새 시대의 개벽을 이끌어갈 영웅들과 함께하여 영광이지요.”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서를 만나고 나름의 각오를 다진 덕일까. 긴장이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능양군의 원래 태도가 어떨지는 몰라서 속으로 걱정했으나 김류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소관이 오늘 분골쇄신의 각오로 임하여 기필코 새 시대의 지평을 열겠습니다.”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군.

“이 사람이야 경만 믿고 따를 뿐입니다.”

나의 화답에 김류는 방긋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다들 들었지? 예비 전하께서 나만 믿으신단다!’ ……하고 자랑하는 느낌이었다.

김류가 자신의 지각으로 무너진 입지를 다시 구축하는 동안 반정군은 어느 성문 앞에 도달했다.

‘이곳은…….’

꾹 잠긴 성문 위로 시선을 옮겼으나, 누각 아래는 달빛이 들지 않아 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 북소문北小門의 이름인 창의문彰義門이 현판에 새겨져 있겠지.

기록에는 반란군이 창의문을 통과하니까.

성문 앞에서 모두가 일단은 멈추는데 대뜸 이괄이 외쳤다.

“문을 열어라! 사왕嗣王이신 능양군 대감의 행차시다!”

사왕이란 장차 왕이 될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곳에 세자는 없다. 참으로 당당한 역적 선언이었고 김류가 성을 냈다.

“말조심하시게!”

일갈에 이괄은 김류와 마주한 채 활을 뽑았다. 그리고 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

김류가 흠칫하자 이괄은 조소를 머금고는 성문 위를 조준했다. 그곳에서는 무관이 막 반역을 알린 참이었다.

쐐액!

달빛을 쪼개며 날아간 화살이 무관의 목을 꿰뚫었다.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리던 고함이 일순 그치고, 무관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성벽 아래로 흘러내렸다.

둔중한 충격음이 일순의 정적을 깨뜨리자 이괄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쳐라!”

진정한 반역의 개시였다.

함성들이 밤을 울렸고 나무 패는 소리가 연이었다. 창의문으로 돌진했던 한 병사는 추락한 무관의 수급을 거두어 바쳤다.

“적의 머리이옵니다!”

상투를 틀어쥔 거친 손 아래로 창백한 낯이 덜렁거렸다. 이름 모를 무관의 머리는 목숨에 이어 몸까지 잃고도 여전히 반역을 알리고 있었다.

“소관의 첫 전공은 대감께 바치겠습니다!”

이괄이 호탕하게 웃었으나 나는 억지로라도 그럴 수 없었다. 욕지기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이때 곁에서 누군가 외쳤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흉참한 것을 들고 오느냐?!”

김류였다.

그의 시선은 수급을 가져온 병사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발언의 의도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거사가 피부터 보면서 시작했음을 기념으로 여기기라도 하라는 뜻이냐!”

병사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고, 김류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괄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으나 우열은 일방적이었다.

김류를 향한 시선은 이괄뿐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이괄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북병사께서 경솔하셨소이다.”

이귀李貴가 발언했다.

그는 김류의 합류가 늦어지는 동안 이괄을 임시 대장으로 추대한 자였다. 분쟁에 책임을 느끼고 개입한 모습이었으나, 소용은 없었다.

이괄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렸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꽝!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창의문이 활짝 열렸다.

도끼질은 멈추었으나 주변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반란을 알게 된 탓이다.

“서둘러라! 폐주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

김류가 일갈과 함께 박차를 가하자 반정군이 우르르 뒤를 쫓았다.

이괄은 그런 김류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이렇게 시작부터 개판이 나는군.

주변이 한산해지자 말고삐를 쥔 구굉이 중얼거렸다.

“북병사는 유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구굉은 안내를 이어갔고, 나는 창의문을 지나가는 동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성문을 통과해 다시 달빛이 느껴졌을 때, 감았던 눈을 떴다.

“……죽은 무관의 수급은 어디에 두었습니까?”

“대감께서 껄끄러워하시고, 김 동지同知도 격렬하게 반응했으니 그 병사가 어딘가에 던져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다니.

시신은 외면하여 눈에 담지 않을 수 있었으나 이미 시야에 들어온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거북한 광경이 계속 눈에 밟혔다.

떨쳐내려면 애써 외면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 필요했다.

“비록 폐주의 신하로 남았으나 끝까지 충성한 자입니다. 시신과 수급은 잃어버리기 전에 수습해 주는 게 좋겠습니다.”

구굉은 작게 끄덕이고는 곁을 향해 까딱였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물러났다.

“대감께서 이토록 크게 은혜를 베푸시니, 죽은 무장도 한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

구굉의 발언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무명의 무장에게 할 수 있는 건 해주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을 뿐이다.

둥! 둥! 둥! 둥!

도성 안에서는 반란에 물이 올랐는지 반정군이 북을 쳤고, 고함도 쳐댔다.

폐주를 잡아라!

와아아아아!

주변의 소란과 겁 많은 시선을 헤치며 도착한 창덕궁의 주변은 밤에 어울리지 않게 환히 빛나고 있었다.

불길로.

궐문 아래에는 무장 하나가 버티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두 팔을 활짝 펼치고서 다가왔다.

“대감! 오셨습니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인가.

그는 광해군 때 실세인 박승종朴承宗과 사돈인 이유로 도성의 수비를 전담하게 되었으나, 보이는 대로 왕과 사돈을 모두 배신하고 반정에 가담한 자였다.

이흥립의 기꺼운 환대에 구굉은 슬쩍 궐문 너머를 보고는 말했다.

“불은 훈련대장께서 붙이셨소이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짓은 하지도 않았고, 명령을 내린 적도 없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궁궐이 타오르고 있답니까?”

“하, 너구리를 잡다 보면 연기를 피울 수도 있는 거 아니요? 덕분에 갈 곳 잃은 폐주가 자연히 손에 들어올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구려!”

한 놈은 화살부터 날리더니 다른 놈은 불부터 지르는구나.

창덕궁이 폐주의 소굴인 건 맞지만, 그건 궁궐이 본디 왕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창덕궁은 동시에 새 왕의 집이 될 곳이기도 한데, 지시도 허락도 없이 불을 지르는 건 문제가 있었다.

구굉은 그것을 지적하려던 것이겠지.

“……으음!”

그가 떫은 소리를 내자 이흥립이 나를 바라보았다.

“대감, 아니 그렇습니까?”

이미 불이 붙어버린 창덕궁이다. 뻔뻔한 태도를 지적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니, 다소간의 손실은 불가피하겠지요.”

“예! 소관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차피 궁궐이라면 폐주가 여럿 지어놓지 않았습니까?”

이흥립은 그것이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 대소했다.

“……물건은 회복할 수 있으나 인명은 그렇지 않으니, 훈련대장께서는 무의미한 살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염려치 마십시오!”

대답은 열성적이었으나 신뢰는 가지 않았다.

궁궐을 땔감으로 만들어버린 데 조금의 반성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나라고 이흥립이 철저하게 따라주리라 믿고 지시한 건 아니었다. 말을 해두면 조금이라도 신경 쓸 것을 기대했을 뿐이다.

보아하니 그마저도 어려울 것 같지만.

“이미 신하들을 불러모았으니, 입궐하여 백관의 하례부터 받으시지요!”

역시 한 귀로 흘려 버린 게 분명하다.

같은 소리를 또 해서 알아먹을 사람 같지는 않은지라 하는 수 없이 끄덕이니 이흥립이 제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사왕께서 행차하시니 엄중히 모셔야 한다!”

이흥립은 병사만 붙여주고 따라오지는 않았다. 계속 궐문을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하려는 거겠지.

창덕궁의 인정전에 다다르니 주변은 더 환해졌다. 궁궐은 역사대로 전소 수준의 피해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신하들이 이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높게 솟은 화마가 주변을 둘러싼 장관을 볼 수 있겠지.

누가 악당인지 알려주는 연출로는 최고다.

주변에서 반정군이 사위를 확보하는 동안 구굉은 인정전의 안쪽을 가리켰다. 용상이 있는 자리였다.

“저기서 백관의 하례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왕이 앉는 자리 아닙니까?”

“대감께서는 곧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이니 용상에 자리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신하들도 누가 새 주인인지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나를 진짜 악당으로 만들려는 건가.

자려고 누웠더니 대뜸 능양군이 되었다는, 이 정신 나간 환상(혹은 현실)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낙관적인 기대는 들지 않았다.

인조가 고작 반정만을 체험시키려고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다음도 생각해야겠지.’

반역을 저지할 수 있지 않은 한, 신하들은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상식적인 왕이기를 바라겠지.

‘찬탈에 취해서 용상에 떡하니 걸터앉은 모습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왕이 될 자라는 말은, 아직 왕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하오나…….”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가식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신하들은 가식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왕은 바라지 않을 테니까.

“뜰에서 신하들을 맞는 게 좋겠습니다.”

나의 관철에 구굉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능양군이 보여준 모습과는 달랐던 걸까?

상관없다.

능양군을 따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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