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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화 (3/380)

인조, 명군이 되다 3화

“뜻대로 하시지요.”

구굉은 나의 관철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뜰로 돌아오니 마침 인정전 정문에서는 신하 두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자발적인 걸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좌우로 동행한 반정군을 연신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처박은 채 이따금 곁을 흘깃거리던 두 사람은 내 앞에 이르러서야, 나를 발견했다.

“……대감?”

어째서 능양군이 타오르는 궁궐의 한복판에 있는 걸까.

의문 가득한 반응에 구굉이 나를 대신해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도승지. 그리고 윤 보덕. 대감께 예를 표하시오.”

도승지는 승정원의 수장.

보덕輔德은 세자시강원의 종삼품 관직이다.

늦게까지 궁궐에 있다가 반정군에 붙잡힌 모양.

도승지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는 다분히 겁을 먹은 모습임에도 뻔한 소리를 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옵니까? ……내막을 알기 전까지는 대감께 예를 올리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호기로운 꾸중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반란이라는 걸 알기는 하냐는.

구굉도 그런 의도를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렸고 도승지의 곁에 선 반정군이 창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창대가 도승지의 오금에 찍히려는 순간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나의 인사에 세 사람이 멈칫했다.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눈에 새겨질 만한 광경은 사양이었다.

구굉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반정군이 물러났고, 도승지의 이마에서는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니 도승지가 눈을 굴리다가 어렵사리 말했다.

“……대감께서 미안하실 일은 아닙니다. 단지, 소관은 상황을 이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 부정처럼 느껴지는군.

나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면서 답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

“폐주의 죄악이 하늘에 다다랐으니, 이 사람이 예정된 결말을 이행하였지요.”

반란이 맞다는 시인에 도승지의 목젖이 꼴깍 오르내렸다.

“폐주는 잡으셨습니까?”

“곧 잡힐 것입니다.”

그러자 구굉이 끼어들었다.

“의병들이 도주한 폐주의 뒤를 추적하고 있으니, 그대가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나의 불투명한 대답에 힘을 실어주려 했던 모양이다.

이미 성공한 반정이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눈앞의 사람을 왕으로 받들라는 거겠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때를 대비해 공범으로 만들려는 거다.

미래를 아는 나는 허리를 세우고서 여유롭게 말했다.

“외숙, 두 분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억지로 공범을 만들려 할 필요가 없다. 이 반정은 성공하니까.

구굉은 송구하다며 물러났고,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반정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미 성공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감과 배포를 보여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제신들이 긴장할 정도의 분위기는 만들어야지 않겠습니까.”

거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느슨한 모습을 보였다간 신하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

미래를 알지 못하는 구굉으로서는 신하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곧, 죽어야 할 사람들이 도착할 터이니 외숙께서 원치 않으신대도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반란군이 도성을 장악하면서, 수도와 함께 정적들의 신변도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반란군은 후환을 예방하기 위해 위험한 경쟁자들은 지금 죽이려고 하겠지.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다른 신하들을 위협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

도승지와 윤 보덕은 여전히 맞은편에 있었다.

막 나와 논의를 마친 구굉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대감께서 긴히 이르셨으니, 내 두 분께 예를 강요하지는 않겠으나 처신에는 유의해 주셨으면 좋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칼 맞을 생각은 없다는 듯 도승지와 윤 보덕이 차례로 허리를 숙였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다. 갈 곳도 일정도 없어진 도승지와 윤 보덕이 난감한 표정만을 짓는데, 인정전 정문이 어수선해지더니 반정 인사들이 문간을 넘어왔다.

“대감!”

선두는 김류였다. 그는 무척이나 희희낙락한 낯으로 자신을 뒤따라 입장하는 무리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제가 역적들을 잡아 왔습니다!”

자신 있게 뻗은 그의 팔 뒤로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들이 이어졌다.

다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신세라 행색마저 볼품없었다.

그런 포로들을 향해 김류와 함께 입장한 반정 인사들은 조소 가득한 시선을 보냈고, 김류가 선언했다.

“이곳이 너희의 국문장이요, 형장이다! 아직 인세에 미련을 가진 자가 있다면 쓸데없는 희망은 버리고 마음의 준비나 해라!”

하하하!

장난기마저 묻어나는 선언에 여러 웃음소리가 터졌고 포로들은 제각기 한탄과 저주, 변명과 애원을 쏟아냈다.

김류와 반정 인사들은 이런 반응을 원했다는 듯 턱을 추켜들었다.

포로들이 당장의 모습은 초라해도 본디 광해군의 측근이거나 북인의 중진으로 그간 서인을 하찮게 여기며 핍박해온 자들.

그랬던 이들이 제 발아래 깔렸으니 서인들은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김류는 한껏 승리자의 여유를 뽐냈다.

“대감, 어떤 놈부터 죽이시겠습니까!”

마치 자신의 제안을 선물쯤으로 여기는지 얼굴도 참 해맑았다.

“…….”

그동안 냉정함을 가장하는 건 쉬웠다.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라 도리어 비현실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를 먼저 죽일 거냐고?’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아도 결과는 같다.

살인. 두 글자가 입안에서 쓰게 구른다.

의미를 생각하면 너무 짧고 가벼운 음절이다. 발음하는 동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도록 이보다는 길고 복잡한 단어가 되어야지 않을까.

이런 상념마저 들 정도로 김류의 제안은 껄끄러웠다.

그런데 이놈은 불난 집에 기름까지 끼얹는다.

“오래 고민하실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이들 중에서 단 하나만 골라 죽이자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대로 미친놈이로군.

그저 난처해하고 있으니, 곁에서 구굉이 속삭였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대감께서 말씀하신 자신감과 배포를 보이셔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요.”

반정 인사들이 원수들을 처단하려는 순간이다.

옳건, 그르건 자신감을 보여주지 않으면 유약한 인물로 낙인찍히겠지. 그러면 계속 피곤해지겠지.

‘나는 유약한 사람인가?’

……질문도 대답도 무의미한 자문이었다.

이 순간 중요한 건 나의 본질이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저들에게 보이는 모습이다. 유약한 군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현실이다. 마구잡이인 반정의 흐름을 내가 가져와야 한다는 결론이다.

“……크흠.”

나는 먼저 목부터 가다듬고서,

진중하게 일렀다.

“내명부의 신분으로 폐주와 작당하고 권신과 모의하며 국사를 농락한 자가 있습니다.”

“끌어내라!”

김류가 반갑게 외쳤고, 반정군이 포로들 사이에서 한 여인을 끌어냈다.

“아악!”

상궁 김개시…….

알려진 이름과 실제 이름이 다르다는 말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곧 죽을 사람이니까.

돌바닥에 팽개쳐진 김개시는 차마 일어서지는 못한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고개만 치켜든 채로 항변했다.

“나는 무고하오! 그대들이 난을 일으킨다는 고변이 들어왔을 때 폐주를 안심시킨 게 나였거늘, 어찌 이런 대우를 한단 말이오?! 세상천지에 이런 배은망덕은……!”

“죽여라.”

단호한 명령에, 가까이 있던 반정군이 김개시의 등을 찔렀다.

등판으로 쑥 들어간 창날이 가슴을 뚫자 김개시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커허억!”

그것이 김 상궁의 유언이었다.

연이어 내려쳐진 환도가 목을 갈랐고, 분리된 머리가 뒹굴었다.

“…….”

속이 뒤틀리는 광경이었으나 애써 무시하고서 말했다.

“처형된 죄인의 조카사위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린 자가 있으니 마찬가지로 정형正刑하는 게 좋겠습니다.”

“안 돼! 살려주시오!”

끌려 나온 정몽필鄭夢弼이 비명과 함께 죽었다.

두 사람의 피가 얼룩지면서 형장이 된 인정전의 뜰을 적셨다.

어느새 주변에는 부름을 받고 당도한 신하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나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떨며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새 왕의 등극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나 역시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다시 형장에 집중했다.

“광창부원군 대감 나오시오.”

“자, 잠깐!”

끌려 나온 이이첨李爾瞻이 사방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단 이 사람 말부터 들어주시오! 대감께서는 아시지 않소?!”

나를 향한 발언은 아니었다. 이이첨의 시선은 이귀를 향한 채였다.

“이 사람이 그대의 말을 들어 폐론을 멈추었으니, 대비께서 살아 계시는 건 순전히 나의 공이지 않소!”

이이첨은 주변을 향해서도 말했다.

“나의 공로로 대비께서 목숨을 보전하셨으니, 나도 이 한목숨 보전하는 게 이치에 합당하지 않겠소?!”

당당한 항변에 이귀가 답했다.

“그대가 정녕 힘을 썼다면, 어찌하여 대비께서는 유폐의 화액을 입으셨단 말인가!”

이이첨은 광해군 시기의 실세.

왕이 마음먹은 한, 그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벅찰지도 모르겠으나 이귀의 말처럼 이이첨이 진심이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는지 이이첨이 절규했다.

“아니야! 나는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반정 인사들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칼을 쥔 반정군이 나서자 이이첨이 다시 외쳤다.

“나는 살아서는 효자고, 죽어서는 충신이다!”

이이첨이 유언을 부르짖는 동안 단두의 칼이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떨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손 역시 올라갔으니까.

반정 인사들과 주변에서 시립한 신하들의 이목이 일제히 모였다.

형이 잠시 유예된 이이첨마저 질끈 감았던 눈을 반개하고서 나를 마주할 정도였다.

“…….”

그간 내가 숙청을 주도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반정 인사들의 입맛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반정 인사들에게 어울려 준다면 처형식은 분명 환호 속에서 끝나겠지.

하지만 나는 피를 많이 보고 싶지 않다.

광기에 순응하고 방만하게 처형을 일삼는다면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

반정 후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서는 숙청이 정확하고 깔끔해야 한다.

흐름을 가져가야 하는 이유는 이런 나의 판단을 관철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분위기를 바꿀 생각이다.

“광창부원군께 이 한마디는 하고 보내드려야겠소.”

“무, 무슨……?”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오.”

반정 인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이이첨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절박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나는 상께서 지시하신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인데, 어째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반정 인사들이 극렬하게 규탄했다.

“미친 소리!”

“네가 무슨 자격으로 변명한단 말이냐?!”

“대감, 들어줄 필요가 없는 헛소리입니다! 다시 형을 집행하십시오!”

나는 무수한 목소리에도 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가,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입을 열었다.

이이첨을 향해서였다.

“그러니 폐주의 천하가 다한 지금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들 게 아니라 순순히 끝을 보는 게 아름답지요.”

나는 무릎 꿇은 이이첨에게 나아가 어깨를 두드렸다.

“아들 대까지만 사사賜死하는 것으로 끝낼 터이니 조용히 갑시다. 부원군께서 얌전히 떠나셔야 다른 사람들도 순순히 주벌을 받고, 이 혼란도 빨리 수습되지 않겠습니까?”

“……으윽!”

나름대로 위안을 주고자 한 말인데 진심이 닿지 않은 듯했다.

이를 악물고서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울분을 참는 꼴이었으니까.

……곱게 가지 않으면 손자 대까지 화가 미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이이첨은 신음을 끝으로 고개를 떨어뜨렸고, 나는 물러나서 손짓했다.

“보내드려라.”

벼락처럼 칼이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이이첨의 머리도 떨어졌다.

주변은 한동안 조용했다. 김 상궁과 정몽필을 죽일 때까지만 해도 들떴던 반정 패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이첨은 서인의 원수.

이런 대우는 과분하겠지.

콰르르!

멀리서 전각 하나가 요란하게 무너졌다.

팽팽했던 긴장감도 일시에 무너지면서, 김류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말했다.

“대감, 이첨은 만고의 죄인입니다!”

그러니 비참하고 한심하게 죽어야만 했겠지.

“광창부원군은 폐주의 충신을 자처하였으니, 마지막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군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하오나!”

나는 김류의 말을 끊고서 덧붙였다.

“폐주의 충신들이 절의를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다음에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자는 명백하게 역적이겠지요?”

역반정의 명분을 깎아내리기 위함이라는 설명에도 김류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으, 으으음!”

설사 실익을 위해서라도, 이이첨이 충신이라는 말은 달갑지 않을 테지. 반정 인사들에게 정적들은 반드시 죽어 마땅한 소인배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나의 흐름대로 이이첨을 처형한 상황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더 따진들, 한번 잘라낸 목이 다시 붙지는 않는다.

김류가 발언을 고민하는 사이 나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밀창부원군 나오시오.”

“대감?!”

밀창부원군 박승종과 사돈이었던 훈련대장 이흥립이 놀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미 배신해 놓고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는 건가?

당황하기는 고민하던 김류와 이귀도 마찬가지였다.

“밀창대원군의 처분은 다음에 논의하시지요!”

“그러하옵니다! 밀창부원군은 광창부원군과는 다르게 폐출을 전력으로 반대한 사람이니 가볍게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또, 반정 패거리와도 가까웠으니까.

이미 저들 사이에서 박승종은 살려주기로 합의된 채였다. 그것을 엎으려 하자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무수히 뒤따랐으나,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밀창부원군은 수령을 지내는 두 아들과 친척 박안례朴安禮를 시켜 반정을 저지하고 나라를 환란에 빠뜨리려 했으니 사사로운 정으로 살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

특히 박승종의 장남인 박자흥朴子興은 경기감사를 지내고 있다.

한양이 경기도에 포위된 형세라는 걸 생각하면, 반정의 결과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섬찟할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서둘러 의병부터 성문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전에 밀창부원군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세 사람에게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이 밀창부원군의 안위는 도외시하고 싸움을 건다면요?!”

“그래도 가족인데…….”

“아직 폐주도 잡히지 않았고, 공신이 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웅성웅성.

박승종을 두둔하는 의견은 사라지고 대신 당황한 반정 인사들 사이에서 대응할 방법만이 분분히 오갔다.

그러는 사이, 박승종이 신하들 사이에서 나와 대죄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일순 입을 닫고 이어질 박승종의 말에 귀 기울였다.

“죄인은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도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나라의 어지러움이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사지가 찢어져 죽더라도 한 점 억울함이 없사옵니다.”

박승종의 시인에 여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박승종은 발언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두 아들과 당숙은 거사의 대의를 알지 못하고 죄인이 부르는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대감께서 선처해 주신다면, 죽어서도 망극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피는 적게 뿌리고 연좌는 지양한다.

이이첨을 곱게 보냈을 때 김류와 반정 인사들이 보인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피를 보고자 했다. 그래서 반정 인사들이 옹호하는 박승종을 불러냈다.

그의 죽음이 이 광기에 제동을 걸어줄 거다.

“변란의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키는 건 수령의 직분이니, 군대를 해산하고 항복한다면 삭탈로 끝내겠습니다.”

박승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나서도 대감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세 사람에게 제사와 명을 죄인의 뜻을 전해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더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밀창부원군의 목이 떨어졌다.

박승종이 절단면에서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고, 바닥에 깔린 돌 틈 사이로 검붉은 체액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나의 발아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죽음에 반정 인사들은 섬찟하며 물러났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목젖이 꼴깍 오르내렸다.

그들은 전과는 다른 기색으로 다음 호명을 각오했다. 도살의 광기는 가신 지 오래다.

흐름은 내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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