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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5화 (5/380)

인조, 명군이 되다 5화

도총부를 나서자 구굉이 물었다.

“폐주를 동정하시옵니까?”

딱히 숨기지 않는 질문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여러 사람의 주목을 느끼며 답했다.

“동정은 강자의 권리지요. 폐주는 갈 데까지 갔으니, 한 명의 애처로운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비도 동정도 좋지만…… 대감께서 높은 사람이 되신다면 더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반정 인사들이 긍정했다.

그들에게 광해군은 동정의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다. 몰락한 지금의 모습조차 가증스럽게 느껴졌겠지.

“경청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광해군을 동정한 건, 정말로 내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발한 공사로 민생은 파탄이지, 어중간한 외교로 꼬장꼬장한 사대부들의 지지도 잃었다. 친위 세력인 북인은 이번 반정으로 처참하게 몰락했다.

그런 광해군이 가진 우위는 명분뿐.

‘세자 때부터 명나라가 책봉을 공인하고 정당한 절차를 따라서 즉위했으니까. 그동안 16년이나 군림했고.’

하지만 딱 그뿐이다.

실속 없는 명분은 지금의 광해군처럼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대적 풍조가 아무리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도 그 점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극강의 정통성을 가졌던 단종도 세조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광해군 역시 그러했지.

나의 적수는 아니라는 뜻이다.

“폐주가 항복하고 나의 만수무강을 바랐으니, 이제 대비께 경사를 전하여 혼란을 가라앉힙시다.”

나의 제안에 반정 인사들이 끄덕였다.

“이李 공께서 중임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이귀를 바라보자 그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당찬 모습을 보니 좋긴 하다만.

이귀의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가만히 일렀다.

“어려울 텐데.”

이에 김류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야, 대비가 반정 당일부터 인조를 상대로 기 싸움을 걸거든.

이렇게 이귀를 보내서 모시려 하니 안 간다고 버티지를 않나, 그래서 인조가 찾아가서 즉위식을 치르겠다 하니 못 믿겠다며 또 버티지를 않나.

인조가 울고 엎드리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즉위식을 시작하니 자기식대로 진행하겠다며 억지도 부렸다.

그러니 의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빈말로도 대비께서는 현실감이 있다 하기 어려운 분이니, 걱정이 들어서 말이지요.”

“대비께서는 그간 고생이 많으셨으니, 대감께서 너른 마음으로 받아주셔야지 않겠습니까.”

“그 너른 마음, 한 번 펼치면 다시 닫을 수 없음을 모르십니까?”

김류가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답했다.

“대감께서 장차 왕이 되시면 대비마마는 대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당연히 너른 마음으로 대해주셔야지요.”

“이 사람이 그런다고 대비께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 주실 거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사랑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는, 뭐 그따위 소리나 나오겠지.

더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대비에게 숙이고 들어가면 그 뒤로 펼쳐질 나와 그녀의 관계는 단순히 애정이 결핍된 삭막한 모자 관계와는 다르다.

“만약 대비의 생각이 공과 다르다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어찌…… 그럴 일을 생각이라도 하겠습니까?”

상상만으로도 불손하다는 투였다.

“김 공께서는 이 사람과 함께 거사를 지휘하였으니 장차 백관을 대표하실 텐데, 말을 돌리는 사람이 그런 위치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정승까지 지내고 싶다면 대답 흐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폐주가 다 하지 못한 효를 기대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두루뭉술한 말씀만 하십니다.”

뭐 어떤 효도를 바란다는 거야?

자꾸 이러는 이유는 뻔하다.

추측을 솔직하게 내뱉으면 곧 대비를 음해하는 발언이 되니까. 담이 부족한 간신배로서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겠지.

그런 김류를 대신해 한 사람이 나섰다.

“소인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누구십니까? 미안하지만, 이 사람이 거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알지는 못합니다.”

“소인 안동 김씨의 자점이라 하옵니다.”

“아하…….”

김자점金自點이라!

실세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권세를 누렸던 간신배였다.

어쩐지 주변을 계속 알짱거리더니.

이름을 알지 못해서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놈 딴에는 내게 존재감을 각인시킬 기회를 노렸던 거겠지.

이 녀석이 때마침 나선 의도가 너무 뻔했으므로 나는 밝게 맞아주었다.

“우계 선생 밑에서 수학한 낙서洛西입니까?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번이 초면이라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미 도장이 찍혀 있다는 말에 김자점이 반색해서 답했다.

“대감께서 소인을 알고 계셨다니 영광이옵니다!”

몇몇 반정 인사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김류가 견제의 대상일지라도, 그는 반정 패거리의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압박을 당하는 와중에 간신배 하나가 끼어들어서는 관심과 점수를 따고 있으니 이런 질시도 당연했다.

물론, 김류는 누구보다도 더 미간을 좁힌 채 김자점을 노려보았다.

‘……이게 이렇게 되나?’

원래 역사에서는 서로 밀고 당겨주었던 김류와 김자점이다.

김자점이 먼저 뒤통수를 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오리지널 능양군과 달리 대비를 노골적으로 불신하자 김자점은 간신배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얽혀들었다.

김류는 그런 김자점을 벌써 원수 보듯이 보는 중이었고 말이다.

이게 나비 효과인가.

두 간신이 서로를 적으로 여긴다면 나야 좋을 따름이다.

“그래서, 낙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대도 이 사람이 무모한 발상으로 괜히 공신 될 사람을 핍박한다 생각하십니까?”

김자점은 과장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다 대감께서 짚이는 부분이 있으셔서 만약을 경계하고자 하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대비마마께서 국사에 관심을 두신다면, 국정이 지극히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이보게!”

김류였다.

“자네는 무슨 근거로 대비께서 국사에 관여하실 것을 말하는가?”

“대비마마께서는 폐주로 인해 심려가 크셨으니, 대감께서 대의로 거사하셨음을 아시더라도 마음이 쉬이 놓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랏일에 간섭할 거라는 말인가? 적당의 졸개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따위 비약으로 대비마마를 음해하느냐?!”

김류는 자신이 들을까 걱정했던 말을 정확히 그대로 김자점에게 쏟아냈다.

그의 말처럼 이 시점에서 대비의 행보를 의심할 근거는 없다.

‘실제로 그렇게 되긴 하지만 말이야…….’

실현되기 전까지는 음해에 불과하다.

김자점도 나의 눈에 들기 위해 나섰을 뿐인지라 반박할 수도 없고, 굳이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소란이 송구하다는 듯 나를 향해 허리만 숙였다.

‘너무 대놓고 간신배라서 웃기네.’

벌써 싹수가 이렇게 노랗다.

그래서 김류니 능양군 따위의 여러 간사한 권력자들이 길러준 거겠지.

누구에게나 잘 드는 칼 한 자루는 필요한 법이니까.

마침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

논쟁이 잦아든 상태에서 불편한 분위기만이 이어지는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이귀였다.

“송구합니다, 대감.”

이귀는 패잔병처럼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비께서 궁을 안 나오시겠답니까?”

“예. 진력을 다해 주달하였으나 대비께서는 궐을 나오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분명 공께서는 최선을 다하셨겠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나, 폐주를 끌어내린다고 갖은 소란이 있었고 창덕궁마저 타올랐거늘 대비께서 정녕 반정을 믿지 못하신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럼, 이는 대비께서 이 사람에게 직접 경운궁을 찾아오라고 명하신 것이겠지요?”

“…….”

“과연 대비께서는 어찌하여 이 사람 상대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하시는 걸까요.”

김자점이 가능성을 말했으니, 이귀는 근거를 말해줘야 했다.

다행히 이귀는 김류처럼 끝까지 대답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위식이 있지 않습니까.”

맞다. 그것이 대비가 쥔 무기다.

폐주를 쫓아냈다고 곧장 용상에 걸터앉으면 찬탈일 뿐이다.

그래서 반정 패거리는 보여주기에 불과할지라도 형식을 신경 쓰기로 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용상이 비워졌으며 정당한 후계자도 없을 경우, 그 후임을 왕실의 최고 어른이 지정한다는 절차를 따르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리지널 능양군처럼 비굴하게 굴어서 즉위식을 치를 생각은 없다.

나는 대비에게서도 주도권을 가질 생각이고, 그러려면 이곳의 반정 패거리를 설득해야 했다.

“왕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즉위식은 반드시 빠르게 치러야 합니다. 그럼, 대비께서는 길어봐야 며칠일 우위를 원하시는 걸까요?”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물음에 이귀는 썩 편치 않은 기색이었다.

대담은 내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흐르는데,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은 자신만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입을 열어버렸다면 계속 떠드는 수밖에 없다. 중간에 멈춰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명분을 믿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랬다.

광해군은 대비를 유폐할 정도로 강경하게 맞섰으나, 인조와 떨거지들은 그런 행동을 패륜으로 규정하고서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니 이들은 대비에게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귀의 말처럼, 명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즉위식과 함께 대비가 쥔 또 하나의 무기였고, 한 번 허리를 숙인 인조는 대비가 죽을 때까지 질질 끌려다녀야 했다.

‘그 대가로 인조는 대비가 죽기 무섭게 뒤통수를 쳐버리지만.’

대비 생전에 갖은 재물고 농토를 하사받았던 정명공주가, 정적 대비가 죽기 무섭게 왕을 저주했다는 누명을 쓴다.

먼저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원산폭격을 박지 않았다면, 그래서 군림할 명분이 더 남아 있었다면 정명공주는 그때 죽었겠지.

아무튼 소름 끼치는 인간이다.

‘나는 정명공주에게 그런 짓을 할 생각도 없고, 대비에게 끌려다닐 생각도 없다.’

그래서 고루한 논의를 이어왔다.

꼬장한 반정 패거리들이 저들의 입으로 대비를 견제할 근거를 제시하도록 말이다.

남은 건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 김자점이 주둥이를 오므린 채 바짝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 똥을 쏟아내고 싶어 하는 엉덩이처럼 보이는군.’

나는 김자점에게 쾌변의 은혜를 하사했다.

“이 공의 고견을 들어보니,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데, 어쩌면 좋을지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김자점이 망극하다는 듯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대비마마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대도 즉위식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그 뜻을 대비마마께 전하시지요.”

“흐음…… 어째서입니까?”

“왕실의 어른은 누가 왕위를 채울지 지목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 그것이 대감을 향하지 않는다면 왕실의 어른이라 할지라도 역적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살려 두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즉위식의 강행을 통보하자는 것은, 곧 대비를 협박하자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잘 드는 칼이야.’

인조가 자기 며느리를 죽일 때 기용한 간신배답다.

이에 김류가 버럭 일갈했다.

“미친 소리! 대감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저런 소인배의 뜻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반정 인사들이 침음과 함께 끄덕였다.

대비를 겁박하자는 건 반정의 명분을 포기하는 꼴.

폐모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면서 북인과 날을 세웠던 서인 전체에 치명적인 판단이 되겠지.

권력을 잡기 무섭게 대비를 저버렸다는 말이 나오게 될 테니까.

“저런 간악한 자의 말소리에 놀아나다간 식자와 백성들 모두 거병의 대의를 의심할 것입니다!”

김류가 언성을 높였으나 김자점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비께서는 거병의 대의를 의심하시고, 나아가 대감을 조종하려는 뜻까지 보이시거늘 그래도 순응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닥쳐라! 이 간귀 같은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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