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7화
도총부를 나서니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엉덩이가 참으로 무거웠던 대비마마와 그녀를 수행하는 궁인들이었다.
그들의 앞에서 안내하던 김자점은 나를 발견하고는 곧장 튀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대감!”
김자점이 굽실거리는 동안, 나는 미소를 지어준 뒤 뒤따라 합류한 대비를 마주했다.
“……아무리 사군嗣君께서 대업을 성사했다지만 나를 궐도 아닌 도총부로 불러내는 건 법식과 맞지 않는 듯하오.”
나는 능청스럽게 한없이 송구한 얼굴로 말했다.
“직접 궐로 찾아가 대비마마께 경사를 전해 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불편을 겪게 하였으니 이 죄인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짧은 정적이 있고서, 대비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사군께서 나를 부른 게 아니란 말이오?”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고서 곧장 덧붙였다.
“처음부터 경운궁으로 가서 대비께 경사를 전해 드린 뒤 분부를 받들고자 하였는데, 어찌 밤중에 감히 대비마마께 행차를 청하겠습니까? 영문을 모르겠으나 다만 결례를 저지르게 되었으니 죄인으로서 한없이 송구할 뿐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뻔뻔한 개소리였다.
하지만 인조는 원래 개 같은 놈이니 상관없지 않을까? 이건 분수에 맞는 행동이다.
고개를 들어 마주하지 않아도 대비가 여전히 황당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마저 뻔뻔하게 죄송함을 가식했다.
“대비마마께서 억울하게 핍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창의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날에 뒤늦게 용기를 내었으니 죄인이 이 자리에서 복주伏誅되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엎드리려 하니 대비가 팔을 붙잡았다.
“아니요. 일어나시오. 사군은 막대한 공을 세웠거늘 어찌하여 대죄하려 하시오?”
“한시라도 일찍 창의하지 않은 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한없이 송구하고, 또 망극할 뿐입니다.”
“……내가 사군을 오해한 모양이오. 방금 한 말은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니, 내게 더 무안을 주지 마시오.”
“예에.”
그제야 반쯤 굽힌 무릎을 세우고 뒤쪽을 가리켰다.
“궐로 모시겠습니다.”
겨우 나왔던 데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에 대비가 인상을 굳혔다.
그러나 앓는 소리는 이미 많이 늘어놓은 덕인지 더 따지지는 않았다. 대신, 도총부까지 오면서 했을 생각을 꺼냈다.
“사군께서는 어디에서 즉위할 생각이시오?”
“폐주는 사로잡혔고 인군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으니, 오롯이 대비마마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대가 사군이거늘 어찌 나의 뜻으로만 정하겠소.”
“죄 많은 사람을 거듭 사군으로 불러주시니 민망하고 부담스럽습니다.”
“사양하지 마시오. 그대는 선왕의 종자宗子이고 종사宗社를 소생한 공이 있는데, 다른 누구를 사왕嗣王으로 삼겠소?”
“분부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거듭된 사양에 대비는 질렸다는 듯 냉랭하게 말했다.
“대통大統을 잇는 건 중대사이니 두말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오. 나는 처음부터 능양군을 사왕으로 정했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니 사군께서는 어디서 즉위식을 치르고자 하는지 알려주시오.”
그래. 사양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폐주는 그간 자리만 차지한 채 무위도식하여 민생과 종사를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선비와 백성들은 한결같이 사왕이 선왕의 유지를 올바르게 이어주기만을 바랄 터이니, 저는 선왕의 생가였던 경운궁 이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대답에 대비가 코로 한숨을 흘렸다.
기껏 밖으로 나왔는데 경운궁이냐, 이럴 거면 왜 나를 불러냈냐, 하고 항의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는지 대비는 감정을 갈무리하고서 답했다.
“나 역시 경운궁을 안배해 두고 있었는데 사군과 뜻이 같으니 다행이오. 이대로 함께 궐로 돌아가 즉위식을 치른다면 더 번잡해질 필요도 없으니, 그리합시다.”
“예.”
대비가 먼저 몸을 돌렸고 궁인들이 따랐다. 뒤이어 나도 발을 옮기니 반정 인사들이 달라붙었다.
“대감?”
김자점이었다.
놈은 나와 대비 사이에 오갔던 말이 싸했던지, 모두를 제치고 허둥지둥 쫓아와서는 일단 말부터 건 것이다.
“낙서께서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압니다. 단지 대비마마 앞이라 예의를 아니 차릴 수는 없었을 뿐이니, 염려 마십시오.”
그러고도 김자점은 썩 걸리는 기색이었다.
“하오나…….”
“낙서 덕분에 일이 쉬워졌는데 설마 그대 같은 충신을 내가 저버리겠습니까?”
너처럼 써먹기 좋은 간신배를 왜 처분하겠냐는, 그나마 진솔한 대답에 그제야 김자점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이 사람을 도와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골쇄신의 각오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꼴에 문자 쓰기는.
마음이 안 놓이나 본데, 어차피 김자점은 제가 원하지 않아도 개 노릇은 마저 하게 될 거다.
바로 솥에 들어가는 것이지!
대비도 사냥했겠다, 여차하면 주인 물 개새끼의 다음 행선지는 솥밖에 없다.
“이만 물러나 주세요. 낙서가 이 사람 곁에 계속 머무르면 대비께서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예, 예.”
김자점이 굽실거리며 물러나자 그동안 눈치만 보던 반정 인사들이 다가섰다.
“간귀 같은 놈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구굉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김자점은 너무 간신배였나 보다.
“하하……. 제 역할은 다 하였으니 가상하지 않습니까?”
“설령 가까이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저런 인물을 자주 쓰신다면 국가의 기풍에 해악이 될 것이옵니다.”
“알지요…….”
구굉은 김자점에 대한 의견이 확실하니, 나중에 처분을 맡겨도 되겠다.
개를 삶으려고 해도 일단 물부터 올려야 하는 법.
왕이라고 사람을 무작정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여론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자점은 참으로 가상한 녀석이다.
자기 스스로 온몸에 된장을 발라놨으니까. 물만 올려놓고 던져놓으면 된다. 여의치 않으면 비공식적인 방법을 써도 되고.
‘참으로 가상한 녀석이지…….’
다른 녀석들이 이만큼 가상하지 못한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죄다 잔머리나 굴릴 줄 알지.
몹쓸 놈들.
속으로 한탄하고 있으니 어느새 경운궁 도착했고, 대비는 내가 즉위할 장소를 소개했다.
“이곳은 선왕께서 난리 때 정전正殿으로 사용하셨던 곳이오. 사왕께서 선왕의 유지를 있겠다면 즉위할 장소로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소.”
장차 즉조당卽阼堂이라 불릴 장소였다.
“식을 시행하기 전에 허좌虛座를 두어 선대왕을 모시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어차피 대비가 두려고 할 거라, 점수나 딸 겸 선수 쳤다.
곧 즉조당(진)인 별당 앞에 두 개의 의자가 놓였다.
하나는 대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조의 것이었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자리하는 것도 아니거늘 대비는 제 의자에 앉아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선조를 그리는 마음만은 진실해 보였다.
정적이 오래 이어졌지만 식을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고, 한참이 지나자 대비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이 오랫동안 깊은 별궁에 갇혀 세상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소. 미망인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상제上帝의 영험이 있어서이니 사군은 상제께 배사拜謝하시오.”
나를 궐 밖에 세워두고서 시간을 끄는 절차는 생략됐으니 똥개 훈련을 시킨 보람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즉위식을 자기 입맛대로 진행하려는 건, 기강이 덜 잡혔다는 뜻.
“오늘날의 대업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대비께서 폐주의 핍박을 받아 억울하게 유폐되셨습니다. 매사가 하늘의 뜻이라면 어찌 그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하늘에 절할 때가 아니다.
대비가 나에게 절할 때지.
“신은 폐주의 패륜을 오롯이 그의 죄로 삼고, 오늘의 대업은 대비마마의 경사로 삼고자 하니, 부디 대비마마께서는 헤아려 주십시오.”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인이 할 일이나 하시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비가 할 일이란 즉위식을 서둘러 나를 빨리 이 나라의 왕으로 만들어주는 거다.
이미 김자점을 보내서 한 협박에 굴했던 대비다. 그 처지를 자각했는지, 대비가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보를 가져오라.”
그래, 아줌마는 어보나 주고 꺼지라고.
개 같은 태도지만 상관없다. 인조는 개새끼 맞으니까. 고증이지.
* * *
즉위식이 끝난 뒤 반정 인사들은 각자의 처소로 해산했지만, 나는 내가 정신을 차렸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제 왕이니 궐에서 사는 게 맞다나?
‘그야 명분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막 반정에 성공했는데 사택에서 꿀잠 자다가 칼침이라도 맞으면 큰일이잖아?
같은 이유로 즉조당(진)인 이곳 별당 주변에는 구 반란군이자 현 정부군이 쫙 깔려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차가운 방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왕 돼도 별거 없구만?”
즉위식부터가 워낙 날치기였던 탓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뒤늦게 내가 처한 상황을 직시했다.
‘이게 다 뭐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불분명했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아도 딱히 단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뺨을 스쳤던 바람의 한기부터 죽은 삼창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 그리고 타오르는 창덕궁의 불빛은…….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설마, 죽으면 뭐가 달라지려나?’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굳이 실험해 볼 가설은 아니었다.
‘……젠장. 모르겠다. 잠이나 쳐 자자.’
반정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지라 피곤했다. 흙바닥에 쓰러져도 꿀잠 잘 자신이 있을 정도다.
커피라도 있으면 몰라.
이런 몽롱함은 견디기 어렵다…….
* * *
어제 봤던 그 천장이다.
“……후우. 자고 일어나도 뭐 달라지는 건 없네.”
딱히 기대하지도 않았다.
입이 자동으로 벌어져서 하품이 쩍 나왔다.
그리고 버릇처럼 뒤통수도 벅벅 긁었다. 망가진 상투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팔자에도 없던 왕 노릇이라니.”
이제야 확 체감이 든다.
진짜로 왕 노릇을 해야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적당히 옷을 추리고서 밖으로 향했다. 아직 궁인이 투입되지 않아 텅 빈 복도를 지나 문지방을 넘어서니 호위들이 맞아주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어어. 예.”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기분이라 대충 손만 들어주고 별당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바람이 쌀쌀했다.
아무래도, 내가 원래 살던 현실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능양군 개새끼.’
명백한 사실이지만, 내가 이북의 독재자마저 감명받을 정도로 자아비판을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무언가 뾰족한 수라도 생기기 전까지는 능양군으로 살아가야 할 모양이다.
혹 운이 좋아서 죽기 전에 현실로 돌아간다면 세계최초 실화기반 대체역사 소설을 쓸 수 있겠군.
제목은 「조선의 개○끼가 됐다」.
필명은 개고기라는 뜻인 구육狗肉으로 지으면 딱이군.
……멍청한 생각이 길어지고 있는지라 일단 세수부터 하기로 했다.
“세안수 가져다주겠나? 아직 궐이 허전해서 그대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네.”
“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구)반란군은 금세 대접에 찬물을 잔뜩 받아서 돌아왔다.
“여기 있사옵니다.”
호위가 건넨 물 대접을 받아서 얼굴을 적시니, 추위가 짜릿하게 흘러내렸다.
정신 하나만은 확 드는군.
대강 얼굴을 닦아내자 똘마니가 아차 싶었다는 듯 탄식했다.
“아, 송구하옵니다!”
“무엇이 말인가.”
“물을 데워 와야 했는데……. 일단 신의 소매로 용안을 닦으시지요.”
호위가 애꿎은 소매를 찢으려 하길래 만류했다.
“됐네. 덕분에 정신은 차렸어.”
나는 내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아냈다.
졸지에 인조가 되었지만, 어처구니없는 것과는 별개로 대비해야 할 사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병자호란.
내가 청나라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능양군처럼 홍타이지 앞에서 원산폭격을 박게 될 거다.
‘끔찍한 일이지…….’
그런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니, 조금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미래를 안다고 무조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젠장. 내 인생도 똑바로 못 살았는데 나라를 이끌라니.’
한 영화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X팔!’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호위가 운을 뗐다.
“전하…….”
“말씀하시게.”
“지금쯤이면 대비께서도 기침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왕의 기상 후 첫 일과는 여염과 다르지 않다.
문안 인사.
“알겠네. 세안도 마쳤으니 대비께 인사를 올려야겠어.”
옛말로도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지 않던가.
먼저 몸을 다스리고 가정을 안정시킨 뒤에야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암, 참으로 옳은 말이지.
그게 내가 대비를 견제하는 이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