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화
대비가 머무는 처소이자 경운궁의 침전이기도 한 석어당은, 즉조당에서 바로 왼편에 있다.
“문안을 올리고자 하는데, 대비마마께서는 기침하셨는가?”
“예에.”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침소에 입장하니, 대비가 굳은 얼굴로 맞아주었다.
“…….”
맞은편에 놓인 방석에 앉으니 대비가 팔짱을 꼈다. 어디, 문안 한번 올려보라는 느낌이다.
해달라니 해드려야지.
“간밤에는 강녕하셨사옵니까?”
“아니요!”
대비는 기다렸다는 듯 칼같이 답했다.
너무나 호기로운 부정이어서 당황스러웠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대비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전혀 강녕하지 못하였소이다. 한양의 백성들은 입을 모아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들 하는데, 나는 변화를 체감할 수가 없었소.”
그야 반정 때 대접이 안 좋아서겠지.
이유야 뻔했으나 안 물어볼 수는 없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나를 이곳에 유폐한 역괴가 자리에서 쫓겨났음에도, 주벌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않소?”
아, 그 때문이었나.
원래 역사에서도 대비는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를 죽이려고 했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서둘러서 즉위하려고 했을 때 대비가 기 싸움을 걸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인조와 반정 패거리는 폐주와 폐세자 부자의 신병을 확보하고도 죽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니 두 사람을 내어준다면 덜 피곤해지겠지만…….’
나도 딱히 광해군이나 폐세자를 죽일 생각은 없단 말이지?
나는 고작 어제 날치기로 즉위했다. 간판도, 입은 옷도 왕이지만 실상은 모래성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을 죽이는 건 바보짓이다.
“폐주와 폐세자가 살아 있어야만 두 사람을 복권하려는 시도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흥, 지금 처단한다면 역괴가 복권될 일도 없지 않소!”
“대신 역적들이 거리낌 없이 다른 왕족을 내세워 복수를 천명하겠지요.”
더군다나 도승지 이덕형의 말처럼 광해군은 16년이나 왕위를 유지했던 사람이다.
중종반정 때도 연산군은 죽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내가 광해군을 죽인다?
곧바로 친족 살해자에 폭군 낙인까지 찍힐 거다.
“폐주를 죽이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원한을 갚는 일은 잠깐 미뤄두시고, 지금은 소자와 함께 나가서 바람이나 쐬지 않으시겠습니까?”
장대한 유폐 기간 내내 석어당에 갇혀 지냈을 대비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내가 고충을 말씀드렸거늘,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말을 돌리시오? 그대도 이 사람의 처지가 우습게 보이는 게요?”
“당장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진지하게 드리는 권유입니다.”
“나는 바람이나 쐬기 이전에 전하께서 역괴의 생사를 분명히 해주기를 바라오.”
대비는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기 전까지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을 기세다.
어제는 말이 통했던 사람이 왜 이럴까.
‘그새 한숨 잤다고 마음이 놓여서 이러나?’
패륜아가 두 명이 되는 마술을 보여드려야 하나…….
순간 마술사왕이 될 뻔했지만, 나는 능양군답지 않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중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폐주의 생사는, 그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심하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아줌마야…….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대비가 괜히 선조의 새 부인으로 간택된 게 아니었다.
자기 기분만 알고 공적인 지위는 도외시하는 게 선조 판박이다.
“저는 이 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대비마마 한 분을 위하여 사람의 생사를 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되기 이전에는 어째서 역괴를 처단하지 않았단 말이요? 그때도 전하께서는 이미 이 나라의 왕이셨소?”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발언.
하지만 대비답게 눈치는 보지 않는다. 일면으로는 시원하기까지 하다.
여염집 여편네가 아니라 대비가 이러고 있으니 문제지.
하지만 내게는 와닿는 의미가 있었다.
‘……그때도 이미 왕이었냐고?’
반란이 끝난 뒤를 걱정해서 피를 적게 뿌리고자 했고, 반정의 주도권도 가져왔으며, 장차 권신이 될 자들을 압박했다.
“대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뭐요?”
“그때 저는 이미 왕이었지요. 그래서 대비마마께서도 협조해 주신 게 아닙니까?”
왜 이제 와서 아닌 척이야.
“저와 대비의 관계는 여느 가정의 부모 자식 사이와도 다릅니다. 그것을 망각하고 계속 경거망동하시겠다면, 다음번에는 원한조차 가지실 수 없을 겁니다.”
광해군은 그나마 어머니로 모신 적이 있으니 폐서인으로 끝냈던 거다.
하지만 내게 대비는 남과 마찬가지다. 일면식도 없다가, 어제 안 사이 아닌가?
“주상은 나를…… 겁박하시는 게요?”
“아니요. 대비마마께서는 여전히 깨우치지 못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겁박이 아니라, 경고한 것입니다.”
나는 인자하게 웃어주고서 덧붙였다. 이번에는 대비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이 사람이 폐주를 죽이지 않는 건 대비께 큰 행운입니다. 폐주가 살아 있을 때의 효용을 알면서도 기분에 따라 죽인다면, 다음에 죽는 사람은 이 사람의 심기를 거슬린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왕마저 죽였다면, 대비라고 죽이지 못할 건 없겠지.
“자. 대답해 주세요. 대비마마께서는 이 사람이 폐주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끝내 대비를 설득해 냈다.
방법이 방법이었던지라 대비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해야 말이 통하는 것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대로 석어당을 나섰다. 그리고 밖에서는 곧장 호위에게 말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 여주목에 있는 것으로 안다.”
완평부원군은 오리 정승으로도 유명한 이원익李元翼이다.
그는 광해군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유배당했는데, 지금은 풀려 나왔으나 다시 기용되지 못한 채였다.
계속 바깥에 두기에는 아까운 인물.
마침 시킬 일도 생겨났다.
“그로써 재상의 결원을 채우고자 하니, 속히 불러오라.”
“예, 예!”
명을 받은 호위가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 * *
호위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하지만 이원익과 대동한 채였고, 그는 왕이 달라졌음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나를 맞아주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일흔을 넘긴 나이로 황혼에 접어든 이원익이다.
고작 왕이 달라진 정도로 놀라기엔 지나온 세월이 길었겠지. 아니면 이렇게 될 줄 이미 알았거나.
덕분에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일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영의정을 지내던 밀창부원군 박승종이 이번 난리로 복주되었으니, 경께서 재상의 결원을 채워주셨으면 합니다.”
“망극하옵나이다.”
“복상卜相하는 절차는 없었어요. 내가 콕 집어서 완평부원군에게 대업을 맡기려는 겁니다.”
복상卜相이란 의정을 선발하는 과정으로, 기존 의정들이 새로운 의정 후보자들을 선별한다.
그러면 왕이 그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데 이를 낙점落點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전통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제수했다.
“대업이라 하심은…….”
“경이 입안한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을 확대 시행하고 싶습니다.”
경기선혜법은 백성들에게 토산물 대신 쌀을 거두는 정책이다.
대동법의 전신으로 보아도 무방한데, 고작 광해군 1년 이원익에 의해 입안, 시행되었으나 지금까지 조금도 확대되지 못한 채였다.
나는 이 상황에 반전을 원한다.
‘모름지기 나라가 부강해야 무슨 일이든 꾀할 수 있으니까.’
국난을 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청군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직 잘 벼려진 창과 배불리 먹은 군사만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 그리고 두 전제 모두, 나라에 돈이 많아야 가능하다.
“폐주는 경기선혜법이 근원이 아닌 하류만을 맑게 하는 것에 불과하며, 방납의 폐단 자체를 시정하기를 주문하였지요.”
그러나 그 방법은 실패했다. 백성들은 여전히 방납인,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관료와 유지들에 의해 쥐어짜이는 중이다.
이 정도면 부패가 시스템을 좀 먹는 게 아니라 아예 잡아먹었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어쩌면 공을 들여서 차근차근 이 폐단을 바로잡아 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호란 이전에 이를 실현해 낼 자신이 없다.
“갈 길이 먼데 이 하나만을 붙들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특단의 대책뿐이다.
대동법. 그러니까, 경기선혜법의 확대.
다행히 이 방법은 역사로 검증되어 있다. 대동법이 완전무결한 개혁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문란한 세제 구조보다는 낫다.
“나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목석처럼 굳어 있던 이원익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을 한 채로 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동안 많은 능신이 선혜법의 확대를 주장해 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끝까지 이 법을 확대하지 않았다.
반대의 이유로 나름의 논리를 펼치기는 하였으나 본인부터 궁궐 공사를 남발해 재정 파탄에 일조했으니 능신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선혜법의 확대는 일종의 해원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다만, 그전에 양전量田을 하고 싶습니다.”
선조 말년에 토지 조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긴 했지만, 한참 임진왜란 때 버려진 농지가 개간되던 중이어서 미진한 구석이 많았다.
조세 구조를 개혁하려면 일단 조세부터가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법.
“무수한 은결隱結을 둔 채 제도만 개혁해 봐야, 정직하게 납세하는 소수에게만 부당한 부담이 가해질 뿐입니다.”
“지당한 하교이십니다.”
선혜법 이야기는 대강 정리가 되어서,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과연 이원익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을까?
“그나저나 후금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명조차 저들을 감내하지 못하고 요동을 내어주었는데, 그들이 칼끝을 우리에게 향한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광해군은 전쟁의 폐단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 후금의 도발에도 부드럽게 넘어가고자 했다.
언젠가 누르하치가 자신을 너라고 칭하는 무례한 서한을 보냈을 때도, 신하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적당히 예를 차려 답서를 보낸 것이다.
이런 광해군의 대후금 외교를 비난하며 들고 일어선 인조의 반란군 패거리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인조 집권 5년 차에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말았다.
“노적奴賊이 발호하고서 짐朕을 참칭함이 지극히 흉악한데, 저들이 강성하여 여전히 처단되지 못하고 있으니 형국이 고려조 때 거란이나 몽고가 발호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쪽의 야만인이 쳐들어온다는 양상은 비슷하지만, 두 경우는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까?”
거란은 여요전쟁을 통해 끝내 극복하면서 고려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몽골을 상대로는 강화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내내 유린만 당하다가 끝내 항복했다.
“아뢰옵기 민망하오나, 신은 아조가 갈림길에 있는 줄로 아옵니다.”
거란 때처럼 될 것이냐, 아니면 몽골 때처럼 될 것이냐?
왕의 앞에서 하는 말임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아주 후한 평가라는 걸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거의 망할 뻔한 게 고작 한 세대 전의 일.
그동안 군주로서 군림한 자들은 말년의 선조와 실정 끝에 쫓겨난 광해군이 다다.
당장 후금의 칼날이 움직였을 때 승산의 여지는 굳이 고민해 볼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이건 전부 지나간 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는 게 옳다.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거란 때처럼 북적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가 거란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먼저 싸우기 전에는 서희徐熙가 있었고 싸울 때는 강감찬姜邯贊이 있었으며, 또 수차례 전쟁하는 동안 30여 만의 군병을 징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재와 부국강병이 비결이었다는 뜻이로군요.”
“단순하지만, 그래서 확실한 비결이옵니다.”
“하나 경이 기로에 섰다고 한 이유는, 이 나라가 그런 비결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노적이 아직 칼끝을 돌리지 않았으니 기회는 있사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소서.”
이원익은 반정 패거리와는 다르게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쓸 준비도 되어 있었다.
“역시 경을 부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야말로 전하의 부름을 받아 다시 나랏일을 하게 되어 망극할 뿐이옵니다.”
이원익은 한이 많았다는 듯 깊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인재를 부릴 때는 대가가 필요한 법.
더군다나 이원익은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왕의 의사에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유배까지 당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전하께서는 폐주를 어찌하고자 하시옵니까?”
“경의 생각부터 듣고 싶습니다.”
“중종께서도 연산군을 몰아내셨지만, 옛 군주에 걸맞은 대우와 혈연의 도리를 다하셨사옵니다. 좋은 선례를 뒤집는다면 반드시 여론에 해악이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유념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로.
* * *
“이번에 이원익이 영의정을 맡게 된 데는 이견이 없으나, 복상하는 절차가 생략된 것은…….”
어전에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반정 패거리의 거두인 이귀가 고고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구구절절 말은 길었으나 왕의 독단으로 의정의 결원을 채우는 건 신중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대비의 일로 망신 좀 당했다는 게 불만이란 거지?’
이번 일로 만회하고서 체면을 좀 세우고 싶은가 본데, 나는 호락호락하게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경께서는 이 나라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