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화
이귀는 내가 화제를 옮긴 것이 못마땅했는지 은근히 뜸을 들인 뒤에야 답했다.
“폐주가 그르쳐 손상한 종묘와 사직을 재건하는 것이 중대하고, 과거의 간적을 일소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옵니다.”
“간적을 일소하는 건 그렇다 치고, 종묘와 사직은 어떻게 재건할 수 있겠소이까?”
“종사는 오직 예로써 재건할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어떠한 예로 재건하라는 말입니까?”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게…….”
“아니!”
나는 삐딱하게 앉아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노골적인 자세를 의식했는지 여러 신하가 허리를 숙였다.
“이보세요. 너만 문자 씁니까?”
“……!”
“경전에 있는 글귀를 그대로 따라 읽는 건 천자문만 뗀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가능할 것이다, 이 무식한 샊…… 후우우우.”
나는 내면의 분노를 천천히 흘려내고서 말했다.
“중요한 건 글귀가 아니라 해석과 실행이지요. 내가 경에게 물어본 것은 무엇이 군군君君이고 신신臣臣이냐는 것입니다.”
이귀는 답하지 못했다. 정론이야 얼마든지 읊어댈 수 있겠지만, 또 뻔한 소리를 했다간 정말로 ‘무식한 새끼’가 된다는 걸 알아서겠지.
“지금 경들이 반정에 성공했다고 다 끝인 줄 아나 본데, 곧장 압록강 너머에서는 요동을 강탈한 북적이 호시탐탐 중원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
“저들이 아직 산해관山海關을 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칼끝을 당장 우리에게 돌린다면 무슨 재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나서주기를 바랐는데 다들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 놈쯤은 붓 한 자루 쥐여주고 요동에 던져 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럴 때만 눈치 잘 보지.
“독단으로 완평부원군을 의정으로 삼은 이유는, 복상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 없고, 또 그 외에는 대안이 없으므로 자잘한 절차를 생략했을 뿐입니다.”
“…….”
“나라가 위기에 처했거늘 내가 왕업을 수행하는 데 차질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왕권 강화의 흐름을 읽었는지, 신하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한 놈만 조지랬다고, 이미 이귀가 무식한 새끼 소리까지 들어가며 개 같이 망신을 당해 버린 채다.
누구도 다음 차례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들고 일어선다면 항거할 수 있겠지만, 아직 조정에는 북인 잔당이 잔류해 있었다.
“군무軍務를 봐야 현실을 알던가 하지. 참판은 병조참판과 직을 바꾸세요.”
그 말에 이조참판을 지내는 이귀와 병조참판을 지내는 김류의 시선이 교차했다.
“왜 대답이 없어?”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일단은 관직을 제수한 것이기에 예를 표하는 이귀였다.
김류는 고개를 돌리고서 작게 웃었다. 참판이라는 직책은 그대로지만 육조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이조로 옮겨진 덕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김류가 못을 박으려는 듯이 예를 올렸고, 나는 제신을 향해서 일렀다.
“내가 천하의 안녕을 위하여서 기어코 노적奴賊은 처단해야겠는데, 오랑캐의 기세가 날로 승승장구하여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놈의 수급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고취鼓吹하지 마세요.”
고취鼓吹는 왕이 행차할 때나, 가마나 연을 타고 내릴 때 연주하는 의전 음악이다.
대단한 인간 납시니 다들 알아서 기라는 의미지.
내게는 귀만 아픈 짓거리였으므로 결의를 다지는 척 겸 아쉬움 없이 쳐냈다.
“…….”
이어지던 분위기가 있어서인지, 북적에 대한 적대감은 서인 전체의 공론이기 때문인지 이견도 의논도 없었다.
나는 고취를 희생하며 늘어놓은 떡밥을 수거했다.
“또한, 능장의 조언을 받아서 북방을 경계해야겠습니다. 정충신鄭忠信과 한명련韓明璉에게 입조入朝하라 전하십시오.”
천민 출신임에도 임진왜란 때 분전한 공으로 관직까지 오른 자들이었다.
* * *
“정녕 전하의 태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오?”
어제에 이어서 오늘까지 왕에게 망신을 당한 이귀였다.
반정 때야 자신이 대비를 모시지 못한 잘못도 있고, 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으니 당했다 칠 수 있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원색적인 모욕을 들을 줄이야!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동석한 김류는 확답하는 대신 말을 늘어뜨렸다.
그는 왕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창을 일시에 죽여 존재감을 부각하면서도 연좌제는 최소화하여 숙청에 선을 그었다. 덕분에 북인 잔당은 옛 주인을 버리고 새 주인의 자비에 기대는 신세가 되었다.
‘이귀가 굳이 나섰다가 욕을 처먹은 이유도, 원래 의정 후보자를 선발해야 할 다른 두 의정이 입을 닥치고 있어서였지.’
좌의정 박홍구朴弘耉와 우의정 조정趙挺은 역시 금상의 자비에 묻어갈 생각이다.
의정대신이 되고도 배알이 없나, 싶기도 하지만 사방이 적이고 믿을 사람은 오직 왕 한 사람뿐인데 저들이라고 별수 있겠나.
왕은 내어주는 것 없이 두 의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김류 본인이 수족으로 부리고자 했던 김자점도 배신을 유도해서는 대비와 공멸시켜 버렸다.
‘게다가 오늘은 나와 이놈의 관직을 뒤바꿨지?’
이귀가 자신을 질시하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공신들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목적이다.
마침 자신과 이귀 모두 반정의 주역이자 각자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천하대세는 합구필분…….’
반정에 승리하여 공신들의 세상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느 정쟁의 승리자들이 그러했듯, 비대해진 권력은 쉽게 분열되게 마련.
왕은 이 틈을 벌리고자 한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이귀가 성을 내자 김류는 작게 웃었다.
“고민을 하고 있었소이다.”
이귀와 연대하여서 왕에 함께 맞서느냐?
아니면 이귀를 버리고 서인 내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느냐.
왕은 강경한 대후금 노선을 천명하면서 비공신 서인들의 지지가 대폭 상승한 데 반해, 이귀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대비의 일 때도 뭣도 모르고 자신을 저버렸겠지.
‘무식한 사람 같으니. 생각도 짧으면서 참을성까지 없으면 금방 화를 입고 말걸…….’
“그래서 고민의 결론이 뭐요?!”
“전하께서 노추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으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지켜봐야지요.”
“하아!”
이귀는 기가 찬다는 듯이 탄식하고는 외쳤다.
“앉아서 가만히 구경만 하다간 노추가 아니라 우리 목이 먼저 떨어질 거요!”
“진정하세요.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잖습니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는! 내가 살다 살다 어전에서 쌍욕을 먹었고, 억울하게 관직도 깎였는데 그것이 어찌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말이요!”
김류는 속으로 답했다.
‘나나 다른 이는 아무런 일도 안 당했으니 그렇지, 이 무식한 사람아…….’
김류는 이귀에 대한 왕의 평가에 백분 공감했다.
* * *
정충신과 한명련을 부르긴 했지만, 두 사람은 북방에 있어서 당장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자유 시간이지.
“아직은 문안을 받기에 이르다는 생각이 드오만?”
나는 석어당을 찾아왔다.
아침에 이어서 또 대비를 갈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그동안 갈구고 싶어서 갈군 것도 아니지.
대비와 건실한 관계를 성립하고 싶은데 이런 진심을 몰라주니 효도에서 인정머리가 배제됐을 뿐이다.
“잠시 시간이 비어서, 대비마마를 뵙고자 왔습니다.”
“……주상이 이렇게 기약도 없이 방문하니 매우 놀랍소.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나를 놀라게 하실 생각이요?”
입을 열자마자 나를 엿 먹이려 든다.
여전히 길 길이 먼 분이시군.
계속 이러면 진짜로 멀리 가실 수도 있는데 말이지.
“대통大統에 의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계속 얼굴을 붉히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와 잘 지낼 방법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오.”
폐주와 폐세자 부자를 처형하는 것 말이지?
“그래서 대비께서는 제가 역괴를 처단하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이 바뀌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대비는 답하지 못했다.
이럴 거면 투정은 왜 부린 거야?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건 어떻겠습니까? 소자가 동행하겠습니다.”
대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거부로 일관하려는 건가. 유치한 대응이다. 나도 시간은 많은지라 조용히 버텼다.
“…….”
“…….”
“…….”
“…….”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대비는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 쉬듯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짝 몸을 뗀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항복 맞지?
항복이 맞았다.
대비가 석어당을 나서기로 하면서 동행이 생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행은 총 세 명이 됐다.
먼저 똥이라도 씹는 듯한 면상의 아줌마는, 종법상으로는 어머니지만 족보상으로는 할머니인 대비.
그리고 어제 즉위하면서 기념으로 개족보가 생긴 나.
마지막으로 종법상으로는 누나지만, 족보상으로는 고모인 정명공주. 그동안 대비와 함께 석어당에 갇혀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게 셋이서 나오니 그림에 나올 듯한 가족이 완성되는군……. 여기에 애완동물도 하나 껴 있으면 딱이겠어.’
어디서 개 한 마리 주워 오고 싶어졌다.
마침 생각해 둔 이름도 있었다.
인조라고, 강아지에게 이보다 더 종족 정체성에 부합하는 이름은 없을 거다. 하지만 이름이 그따위여서야 사랑해 줄 자신이 들지 않는군…….
나는 애완동물 입양 계획은 포기하고서 말했다.
“오래간만에 밖으로 나오셨는데 기분은 어떠십니까? 퀴퀴한 방 안에만 갇혀 있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까.”
그러자 대비가 여전히 똥 씹은 얼굴로 답했다.
“바로 어젯밤만 해도 한양을 구경하지 않았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습니다만…… 이런 거동과는 종류가 다르지요. 아무래도 대비께서는 화가 많으신 듯합니다.”
나는 한쪽 다리를 들고 손을 모았다.
“따라 해보세요. 나마스떼.”
“……?”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분노가 대비마마의 옥체를 해치고 있어요.”
대비가 호응해 주지 않아서 나는 몸을 살짝 돌려 정명공주에게 향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그나마 정명공주는 말이 통하는군.
내면의 분노를 최소화해야 평화가 찾아오는 법이다. 적어도 내 눈앞에서는 말이지.
그것을 대비가 알아주지 않으니 이 효자는 마음이 아프다.
‘진짜 인왕산에 신원 미상의 봉분이 하나 만들어지려고 이러나?’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자꾸 내 몸 안의 사악한 능양군이 작동하려 하는군. 녀석의 방식으로는 대비와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
인조 치세 초기 역반정 기도 하나가 적발된다.
명분은 반역한 사람들이 먼저 대비부터 받들지 않았고, 인조는 스스로 왕위를 취했다는 것.
대비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이런 명분이 힘을 얻게 된다.
나는 합장한 두 손을 대비에게 돌렸다.
“분노를 다스리셔야 됩니다.”
나를 봐라. 가정의 인위적인 평화를 위해 이렇게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전하의 방식으로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듯하오. 어째서 그것이 분노를 다스리는 법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요.”
와.
그건 너무한걸?
내 안의 사악한 능양군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정명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복잡한 의미가 담긴 부름이었다.
하지만 대비는 반응하지 않았고, 내가 대신 답했다.
“이해합니다. 이 사람이 침전에서는 불경한 모습을 보여드렸으니 대비께서도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신다니 그것만은 다행이오.”
“하오나 대비마마께서 저와 잘 지내려는 노력을 아니 하시겠다면, 소자도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역시 이렇게 되나.
설득이 쉽지 않아서 내 안에 사악한 능양군이 튀어나오려 한다.
“소자는 앞으로 대비마마께 경사만을 안겨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대비께서도 부디 이런 소자의 진심에 부응해 주셨으면 합니다.”
치국평천하 이전에 수신제가해야지.
“나마스떼?”
대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한참 버티다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드디어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셨군요. 경하드립니다.”
대비의 얼굴은 여전히 찌그러진 채였으나, 그녀는 더 불만을 늘어놓는 대신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건 무슨 뜻이오? 내 일평생 듣도 보도 못한 구절이오.”
나는 빙긋 웃어주며 손을 모았다.
“나마儺魔는 마귀를 쫓아낸다는 뜻이고, 수태守泰는 안녕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거, 처음 나마스떼 타령을 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다. 천재 같다고 추앙해 줄 사람이 없어서 안타깝군.
대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이 올라갔다.
“아. 전하께서 농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뜻을 가진 구절이었구려?”
다행히 대비가 출처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내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화를 다스려볼 테니, 부디 전하께서도 함께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소.”
내게 많은 양보를 원하는 어조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진전이다.